[향토문화]간이학교..구억리 평화회담 터(건물 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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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간이학교..구억리 평화회담 터(건물 멸실)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4.12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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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21일 소개령 내려지면서 학교 건물은 군경에 의해 불태워져


구억리 평화회담 터(건물 멸실) 


구억리 평화회담 터
위치 ; 대정읍 구억리 861-1번지 및 866-1번지. 옛구억국민학교 자리(현 제주옹기배움터(구억분교 터)에서 서광리 쪽으로 200여 지점 귤밭)
시대 ; 대한민국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 구억리_구억국민학교_터.

◆ 구억리_428평화회담_터.

사삼사건이 일어난 지 25일이 지난 1948년 4월 28일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본명 이승진)과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 제9연대(모슬포 주둔, 1947년 11월 16일 창설, 당시 연대장 부위 장창국) 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사태 해결을 위해서 회담을 열었던 장소이다.(그러나 고희범의 글에 따르면 김익렬이 해임 직후 <국제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협상을 "어느 민가"에서 열었다고 기록한 자료가 최근 발굴됐다고 한다.)


김익렬 연대장이 인민유격대 점령 지역인 이 곳에 단신으로 들어가 합의를 본 주요 내용은 ①72시간 내에 제주도내 전지역에서 적대행위 중지 ②주동자를 제외한 항전 가담자가 귀순하면 무죄 방면 ③중간 지도자들에 대한 해외(일본) 도피 지원(어선 제공) ④주동자는 자수 및 재판 회부 등이었다.


그러나 이 평화회담은 무력진압을 결정한 미군정 사령관 하지에 의해 무시되고 말았다. 평화협상이 파기된 사건은 협상 사흘 뒤인 5월 1일 발생한 '오라리 방화사건'이었다.

우익 청년(대동청년단) 등에 의해 저질러진 방화는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 "폭도들이 한 행위"로 조작됐고, 미군이 상공에서 불타는 마을을 촬영해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라는 제목의 영상기록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들여다 보면 미군정의 최대 약점인 2년 반 동안 남한에 군정을 실시하면서 민심의 지지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미군정 수뇌부의 ‘반공주의’는 그 책임을 ‘공산주의자의 책동’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희생자를 줄이면서 사태의 진정한 원인이 드러나게 하기보다 희생을 늘리더라도 ‘공산주의자의 책동’ 주장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을 경찰도 미군정 수뇌부도 바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협상파기의 더욱 결정적인 사건은 귀순무장대에 대한 경찰의 총격 사건이다. 5월3일에는 오후 3시경 귀순 무장대 200~300명이 오라리 마을 부근을 거쳐 제주비행장에 설치된 수용소로 귀순한다는 연락이 왔다. 9연대 고문 드루스 대위와 미군병사 2명, 9연대 병사 7명이 하산하는 귀순 무장대원들을 호송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완전무장한 경찰 약 50명이 92식 일본군 중기관총과 카빈총으로 귀순무장대원들과 미군들을 기습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무장대원들은 총에 맞아 죽고 생존한 나머지는 산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경찰은 계속 미군과 9연대 병사들을 향하여 집중사격하였다. 그들은 중기관총 엄호 하에 드루스 대위 일행에게 공격을 가해 왔다.

경찰은 숫자가 훨씬 많았으나 드루스 대위는 2차대전의 역전의 용사였다. 2명의 미군병사를 시켜 M-1총으로 중기관총 사수를 사살하고 일제히 경찰지휘관을 집중사격하여 그를 쓰러뜨렸다.

경찰은 5명의 시체를 버리고 제주읍 방면으로 도주했다. 쓰러진 자는 제주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위였으며 양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중상은 아니었다.


구사일생한 드루스 대위 일행은 격분했다. 부상한 경위를 미군정 본부로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하여 주고 나서 드루스 대위 일행을 기습한 이유를 심문하였다.

그자는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하였다.


다음날 미 군정장관은 김정호 경찰토벌대장을 소환하여 어제 발생하였던 사건의 경과를 따졌다.

김정호 씨는 뻔뻔스럽게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이 사건은 공산주의 폭도들이 경찰을 중상하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고 잡아떼었다. 경찰을 미군정과 군대와 이간시키려고 폭도들이 경찰로 위장해 기습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또 드루스 대위에게 총격을 가한 경찰들도 사실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제주도 출신 경찰이며, 이 자들은 폭동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의 중기관총 등 무기를 가지고 공산폭도들에 가담하여 현재까지도 경찰복장과 무기를 가지고 민가를 습격하고 선량한 양민을 학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드루스 대위를 습격했다가 부상을 당하고 생포된 경위도 사건발생 전에는 제주도 경찰서 본부에 근무하던 자였으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로서 폭동사건이 발생하자 부하들을 데리고 산으로 도망간 사람이라고 하였다.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그자가 어젯밤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중 감시 소홀을 틈타서 자살하였으므로 사체를 검증하여 보라는 것이었다. (4-3은 말한다② 335-336쪽)

이로써 회담은 무효가 되고, 이어서 5월5일 제주에서 미군정 수뇌부가 참석한 대책회의(참석자 ; 딘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맨스필드 제주도 군정장관, 최천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김익렬 제9연대장)에서 강경진압을 주장한 경무부장 조병옥과 선무귀순 공작을 역설한 김익렬 연대장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진 직후 김익렬은 전격 해임되고 다음날 박진경 중령으로 연대장이 교체됐다.

후임자인 박진경 연대장에 의해 수행된 초토화작전으로 도민 수만 명이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박진경은 9연대를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내몰았고, 그 공로로 곧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에 대한 경비대원의 반발이 두 차례 사건으로 터져 나왔다.

5월 20일 밤 11명의 하사관을 포함한 41명의 제주 출신 사병이 탈영, 대정지서를 습격한 뒤 입산했다. 그 후 제9연대는 제11연대로 재편되어 본부를 제주읍내로 옮겼는데, 6월 18일 새벽에 연대장 박진경이 부대 내 숙소에서 취침 중 부하에게 사살당했다. 제주에 부임한 지 44일 만이었다.


박진경을 암살한 주범인 문상길 중위의 진술 내용은 이렇게 보도되었다.


“4월 3일 제주도소요가 봉기한 이후 전 연대장 김 중령 재임시에는 경찰의 폭도와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대하여 경비대는 도민을 선무하기에 노력하여 그들의 신뢰를 받았으나, 박 중령 부임 후로는 경찰과 협력하여 소요부대에 무조건 공격명령을 내렸으며, 도민도 탄압하기 시작했으므로 도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고 경비대 내부 공기도 동요하였다.

나(문상길)는 김 중령의 동족상잔을 피하는 해결방침에 찬동하였으며 처음으로 김달삼과 만난 이유는 김 중령과 회견시키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박 대령 부임 후였는데 그때 김달삼은 30만 도민을 위하여 박 대령을 살해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을 뿐 아무런 지령도 받지 않았고 김달삼과 두 번이나 만난 것은 30만 도민을 동족상잔으로부터 건지기 위하여 경비대의 근본이념 국가지상 민족지상의 정신으로 원만해결책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서울신문 1948년8월13일, <4-3은 말한다 3> 212쪽에서 재인용)


이 상황에 대한 김익렬의 유고는 다음과 같다.


《귀순공작의 성공으로 제주도 전역에 전투가 종식되고 완전 진압이 눈앞에 보이던 중 경찰의 방해공작과 귀순폭도들의 잇단 피살로 폭동이 재연되는 상황으로 급변하고 만다.

당황한 미 군정청장관 딘 장군은 직접 제주도로 내려와 현지에서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제주읍에 비래(飛來)하겠다고 연락해 왔다.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는 사전에 나에게 자기들의 난처한 입장을 설명하고(딘 장군이 자기들의 건의를 들어주지 않고 강압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고 차후 대책과 작전을 건의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3인은 회의에 내놓을 일체의 증거물과 사진첩을 준비하였다.(당시 9연대는 사진자료와 그런 자료를 만들 시설이 없었으나 미군정에서 수집 작성한 앨범이 있었다.)


회의는 5월 5일 12시에 개최되었다. 장소는 제주중학교의 미 군정청 회의실이었다. 참가자는 미 군정장관 딘 장군,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 딘 장군 전용통역관 김 씨(목사 출신) 등이었다.

이상 9명이 참가한 회의는 극비에 부쳐졌다. 회의는 맨스필드 대령 사회로 개최되었다. 회의의 첫머리에 맨스필드 대령은 이 회의는 딘 장군의 명에 의하여 참석자 누구든지 자유로이 의견을 말할 수 있으며, 이 회의의 내용은 극비이며 누설자는 군정재판에 회부한다고 선언하고 먼저 경찰에서 설명하라고 하였다.


경찰을 대표하여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 씨가 상황 설명과 건의를 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이 폭동은 국제공산주의자에 의한 사전에 조직 훈련 계획된 폭동이며 군-경 대병(大兵)을 투입하여 합동작전으로 철저하게 토벌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송호성 장군에게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 장군은 제주도 실정은 연대장이 자기보다 잘 아니 연대장이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송 장군의 지시에 따라 군의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그 내용과 건의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제주도민의 전통적인 배타성을 이용해 공산주의자-불평분자-밀무역자 등 각종 성분의 무리가 일으킨 도민폭동으로 본다. 직접적인 도화선은 밀무역자와 경찰 간의 마찰이다.

폭동자 수가 수만으로 증가된 것은 경찰이 초동의 대책과 작전에 실패한 데서 기인된 것이다. 실제 무장한 인원은 300명 이내로 보며 나머지는 여러 가지 불가항력으로 인한 동조자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1) 적의를 가진 폭도와 일반 민중동조자를 분리시켜, 폭도를 제주도민으로부터 고립시켜야 된다. (2)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위압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전개하여야 된다.

일방으로 회유와 선무를 하여 응하지 않는 자는 토벌하는 것이다. (3) 이 작전의 방해요소는 경찰의 기강문란이며 이것이 폭도 증가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전 제주도경찰을 나의 지휘 하에 달라. 작전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서도 이것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보고와 건의가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물을 제시하겠다 하면서 준비하였던 물적 자료와 사진첩을 제시하였다.

사진첩을 보자(사진첩에는 맨스필드 대령이 영문으로 상세한 설명을 기입해 놓았다.) 딘 장군은 흥분하여 안색이 붉어지며 즉석에서 나의 건의를 채택하는 동시에 경찰을 나에게 배속시키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진첩을 조병옥 씨에게 던져주면서 불쾌한 어조로 “닥터 조, 이것 어떻게 된 일이오. 당신의 보고 내용과 전연 다르지 않소.”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조병옥 씨는 사진첩을 두루 살피면서 당황한 기색이더니 갑자기 단상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는 우리말로 자기가 설명하겠노라고 인사를 하고는 그 다음은 유창한 영어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조병옥 씨는 처음에는 영어로 한 말을 자신이 통역하는 식으로 설명하다가 열을 띠자 우리말을 치워버리고 영어로만 떠들었다. 영어를 모르는 안재홍 씨, 송호성 장군, 유해진 도지사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조 씨는 연대장의 설명과 사진첩 등 증거물이 전부 허위조작된 것이며(사실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가 작성한 것인데)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나에게 손가락질하면서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국제공산주의가 무서운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 헝가리-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각지에서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상투수단이오.”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닥쳐라!” 하고 고함을 질렀다. 딘 장군은 나를 제지하며 연설 방해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조병옥 씨는 계속해서 나를 가리키며 “민족주의의 가면을 쓴 청년들이 먼 외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연대장이 그런 청년이요. 우리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당 간부로 열렬히 활약하고 있소. 저자는 자기 부친의 교화를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자기 부친의 지령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오.” 하면서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더구나 나의 부친은 내가 다섯 살 때 이미 작고한 분이었다.)


딘 장군은 조병옥 씨가 나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라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자 깜짝 놀라며 의심에 찬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그냥 두었다가는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을 찍힐 판이었다. 나는 격분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에 뛰어올라 조병옥 씨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조병옥의 복부를 친 후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려고 하였다(나는 유도 3단이었다). 그러나 조 박사는 의외로 힘이 장사였다. 당시 50세가 넘었는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아 단상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당기니까 그는 목을 졸리게 되었다.

조 박사는 숨을 못 쉬고 비명을 지른다. 최천 씨가 말리러 올라왔으나 나의 발길질에 급소를 차여서 그도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딘 장군이 송호성 장군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조병옥 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기에 애국자인 줄 알았더니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무고한 나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모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하며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송 장군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은 채로 “이놈 연대장! 누구에게 폭행을 하느냐. 네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손을 놓고 말로 하라.” 하며 고함을 친다.

그러나 말릴 뜻은 없는 듯 입으로만 호령호령했다. 돌아가는 내용의 대강을 눈치챈 안재홍 민정장관은 “연대장! 손을 놓으시오. 폭행을 멈추시오. 외국 사람들이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흉을 보니 어서 손을 놓고 말로 하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역시 소리만 지를 뿐 단상에 올라와 말릴 뜻은 없었다. 유해진 지사가 단상에 올라와 나의 손을 떼어 놓으려고 하였으나 노령이라 역부족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덤볐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딘 장군을 싸움은 말리지 않고 떠들고만 있는 안재홍 씨와 송호성 장군이 지금 무어라 말하고 있냐고 통역관 김 씨를 옆으로 불러 물었다.

그런데 이자의 통역이 또 괴변이다. 그 경황 중에도 내가 단상에서 듣자니 이자는 딘 장군에게 안재홍 씨와 송 장군이 연대장에게 “너는 공산주의자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고 있다고 터무니없는 통역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화가 치밀 대로 치밀어서 두 손으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붙잡은 채 단하로 끌어내리면서, 김 통역관에게 발길질을 했다. 입을 걷어찬다는 것이 빗나가서 그만 그자의 음부 급소를 걷어찼다. 김 통역관은 비명을 지르면서 마루 위에 나뒹군다.

놀란 딘 장군은 급히 회의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가더니 대기 경호 중이던 미군헌병을 불러들여 장내 질서를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수 명의 MP가 달려들더니 그중 2명의 MP가 양쪽에서 나의 팔을 붙잡아 조 박사에게서 떼어놓고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번쩍 들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두 팔을 잡고 꼼짝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장내의 소란은 끝났다.》

구억리는 모슬포에서 산간 쪽으로 약 12Km 쯤 올라간 해발 100m의 중산간 마을이다. 현재 상하동 100여 가호에 600여명이 살고 있고, 해방 당시는 70가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다.

구억국민학교(당시 명칭 대정북공립국민학교)가 있었던 구억리 상동은 1948년 10월 하순경 군경 토벌대에 의해 소개·방화되어 버리고 1950년 3월에 이루어진 마을 재건으로 하동에 현재의 구억리가 형성되었다.(전교조 제주지부 교과위원회, 4.3 순례. 52쪽)


평화회담이 열렸던 구억국민학교[옛 대정북공립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 1941년에 정식인가를 받아 간이학교로 출발하였다.

개교 당시 교실 2개에 교사 2명이었다. 해방 후에는 6년제 국민학교로 승격되어 구억리 아이들의 교육을 맡아왔던 곳이다.

3000여 평 규모에 넓은 운동장과 관사, 교실이 있었고, 4·3 사건 당시 교사로는 조석인, 송병길 씨가 소개 전까지 근무했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교문은 서쪽에 있었으며 교실은 동쪽에 북쪽에 관사가 있었는데 회담은 관사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1948년 11월21일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학교 건물은 군경에 의해 불태워져 없어졌다.(제주큰동산 글)

국민학교 터가 지금은 감귤원으로 바뀌었으며, 학교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관리사가 지어져 있다.(구억리 804번지 윤경하씨)


1948년 당시 이 학교 3학년에 재학했던 주민 강영화씨(76)도 당시 기억을 더듬으며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는데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짚차를 타고 와 한동안 머물다 자리를 떴다”며 “나중에야 어른들로부터 김익렬 9연대장과 김달삼 총책이 회담을 벌였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말했다.(제주일보 140123)
《작성 041024, 보완 1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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