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한달 만에 만든 ..보성리(안성리, 인성리) 대정현성(大靜縣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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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한달 만에 만든 ..보성리(안성리, 인성리) 대정현성(大靜縣城)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4.18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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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감이 탐욕하면 물이 마르고, 청렴하면 물이 풍부했던 드레물


보성리(안성리, 인성리) 대정현성(大靜縣城)


문화재 지정사항 ; 지방기념물 제12호
위치 ; 대정읍 보성, 안성, 인성리 일원
시대 ; 조선

 

▲ 보성리_대정현성(남쪽_치성).

▲ 보성리_대정현성(복원된_옹성).

조선 정부의 8도의 하위 체제였던 군현제에 대한 정비는 1416년(태종 16년)에 제주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일단락되었다.

8도 체제가 성립되기 이전, 제주는 여말선초 계수관(界守官)[전국의 교통로나 큰 고을을 중심으로 주위의 작은 고을을 통할하는 통치방식] 지역의 하나인 나주목(羅州牧) 관할 하에 놓여 있었다.

계수관 지역인 전주목과 나주목의 첫 자를 따서 8도의 하나로 전라도가 정비되면서 제주는 전라도에 예속되었고, 당시 제주의 행정 구역은 제주목 한 읍으로 되어 있었다.


조선이 개창된 이후 제주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이미 고려 시대 원에 의해 설치된 목마장에서 생산된 제주의 말이 대명 외교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전시(戰時)에는 전쟁 수행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중앙 정부의 이와 같은 인식은 제주에 대한 강한 통치력을 행사하기 위해 여러 시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즉, 1392년(태조 원년)의 제주 향교 설치와 더불어 1394년(태조 3년) 우마적의 작성, 1404년(태종 4년)의 노비적 작성 등으로 이어졌고 이는 모두 제주 지방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앙 정부는 대대적인 행정 개편을 통해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결국 중앙 집권적 집권 체제를 강화해 나가고 있던 조선 왕조는 그의 일환으로 제주에 대한 행정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태종 16년(1416)에 삼읍 체제 즉, 제주목(濟州牧)·대정현(大靜縣)·정의현(旌義縣)을 형성하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대정현의 사방 경계로는 동쪽으로 정의현과의 경계까지 57리이고, 남쪽으로 바다까지 10리이며, 서쪽으로는 제주목(濟州牧)과의 경계까지 37리이고, 북쪽으로는 제주목과의 경계까지 32리였다고 전해진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임승희 글)


대정현성은 태종16년(1416) 한라산 남부에 정의, 대정 양현을 설치한 후 왜구 침입 방지를 위하여 태종18년(1418) 초대 대정현감 유신(兪信)이 축조하였다. 현감은 지금의 서귀포시 강정에서 한경면 고산에 이르는 제주의 서남부 일대를 다스렸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대정현은 멀고 도적에 대한 방어가 허술해 성을 쌓게 됐는데 장정들이 내 자식의 일처럼 와서 공사에 참여해 한 달도 되기 전에 성을 이뤘다고 밝혔다. 주요 건물을 보면 임금의 위패를 모신 객사인 영안관, 현감의 집무처인 윤경당, 청풍당, 향사당, 군관청, 군기고 등이 있었다.


당시 제주 판관 하담은 대정성의 축성 전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무술년(1418) 여름 일이 있어 이 현에 왔더니 현감 유신이 술을 내어 놓고 위로하여 말하기를 “당신께서는 현을 설치한 유래를 아십니까?

오식 공이 안무사로 제주에 와서 생각하기를 …… 마땅히 현을 나누어서 수령을 두어야겠습니다고 아뢰니 임금님과 조정에서 그렇다고 생각하여 곧 부절(符節)을 명하셨으므로 비로소 제가 오게 된 것입니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임시로 묵은 지 몇 달만에 오식 안무사는 소환되고 이간 공이 부임하고는 통첩하여 말하기를 ‘성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으므로, 이에 한두 사람 부로(父老)와 더불어 지방을 두루 돌아보고 위치를 정하여 땅을 재니 주민과 장정들이 스스로 공사에 나왔으므로 한 달도 채 못 되어 성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말을 듣고 술잔을 들어 사방을 돌아보니 성지(城池)는 다 되었고, 관부(官府)는 완성되었으며, 백성들의 얼굴에는 희색이 있고, 관원들은 예의가 있었다.》


성 둘레는 4890척(1481m), 높이 17척4촌(5.1m)으로 장축인 동서방향이 거의 정확하게 동서쪽을 가리키고 있다. 동성리(현 인성·안성리)와 서성리(현 보성리)에 걸쳐 읍성이 축조되었다.

성내 관아건물은 18동이 있을 만큼 규모가 컸고, 성문은 동·서·남에 설치됐고 문 위에는 문루가 있었다. 원래는 동, 서, 남, 북에 모두 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오래지 않아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동,서,남문으로는 현재도 길이 남아 있으나 북문터로는 통하는 길이 없다. 또한 선조 연간에는 옹성과 포대를 가축(加築)했다.


성 안에는 드레물(擧手井·두레박으로 떠올리는 물)이 있었지만 물이 풍부하지 않아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이 샘물은 탐관오리와 목민관에 빗댄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현감이 탐욕하면 물이 마르고, 청렴하면 물이 솟구칠 정도로 풍부해진다는 것이다.


주요 건물을 보면 임금의 위패를 모신 객사인 영안관, 현감의 집무처인 윤경당, 청풍당, 향사당, 군관청, 군기고 등이 있었다.


이원진의 탐라지(1653년)에 따르면 병력은 파총 1명, 성장 2명, 초관 7명, 군관 72명, 기병 204명, 보병 101명, 수군 375명, 차비군 111명, 속오군 555명 등 1477명에 이르렀다.


1702년 이형상 목사가 점검할 당시에는 성장 2명, 치총 4명, 성정군 204명이 배치됐고, 말 849마리와 흑우 228마리로 돌보던 목자와 보인 123명이 있었다. 창고에는 곡식 1957석을 보유했다. 12개 마을에 민가는 797호, 전답은 149결이 있었다.(제주新보160620)


동문은 정종 을묘년 현감 고한록이 중수하고, 순조 정해년 현감 박상률은 동문과 서문을 개건했으며, 철종 경오년 현감 신성흠이 중건했다.

남문루는 일명 해안루(海晏樓)라고도 하며 현감 이관이 중건했다. 성 안에는 객사, 동헌, 위사(衛舍), 향사당 등 현의 정치를 위한 관아가 있었다.(제주도, 제주의 문화재, 1982. 138쪽) 동헌은 지금의 보성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제주도, 제주도의 문화유산, 1982. 147쪽)


고종원년(1864) 대정현은 대정군으로 승격하였고, 고종32년(1895) 제주목이 제주부(府)가 되자 대정현은 대정군이 됐고, 1914년 제주목이 전라남도에 합병되면서 대정군은 폐지돼 제주군에 통합됐다.


대정현의 군사·행정·경제의 중심지였던 대정읍성은 일제강점기와 4·3사건을 거치면서 크게 훼손됐다.
1986~2001년까지 성곽 703m를 보수했고, 1994~1999년에 북동, 남동, 남서 모퉁이에 치성 3개소가 재현되었다. 북서쪽에도 치성이 있었으나 복원되지 않았다.


북성(北城)의 가운데에 북문이 있고 2002년 옹성을 복원했다. 복원된 옹성은 내부가 너무 좁다. 옹성은 1990년대말까지 둘레 40여m, 높이 2m 정도가 남아 있었다. 옹성 주위에 쌓아진 낮은 돌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원래 있었던 것인지 경작하는 과정에서 나중에 만들어진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옹성 위에는 1975년 전후에 만든 것이라고 하는 물탱크가 설치되어 1995년까지 있었다. 서정길씨의 증언에 따르면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는 자리는 원래 5m 정도 깊이의 호가 있었고 호의 서남쪽 구석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동쪽과 남쪽 성은 멸실된 것을 복원했고 북성은 복원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인데도 매우 높아서 약 5m 정도가 되었다. 2005년 전후에 낮아진 부분을 모두 보수했다.


성 위에는 두께 10cm 정도의 작은 방석만한 넓적한 돌들이 많았었다고 한다.(보성리 출생 인성리 거주 여 75세 정임춘 할머니. 1998년 5월 31일) 넓적한 돌들은 아마 미석(眉石)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청 건물에 썼던 주춧돌과 기와들이 민가(인성리 洪學士씨 댁)에서 더러 발견된다.


또한 성 위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바닷돌을 수없이 깔아 놓았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바닷돌은 전투시 투석용(投石用)으로 추정된다.


"ᄒᆞᆫ 사름이 멫 가멩이씩 지여 오라 ᄒᆞ난 그 때엔 자동차가 시카 몬 등짐으로 지어단 성 우티 ᄀᆞ득 ᄁᆞᆯ앙 놔 뒀당 적이 오민 대가리라도 맞쳥 죽이자 ᄒᆞᆫ 거주."("한 사람이 몇 가마니씩 지여 오라 하니 그 때엔 자동차가 있을까 모두 등짐으로 지어다가 성 위에 가득 깔아 놔 뒀다가 적이 오면 대가리라도 맞쳐서 죽이자 한 것이지.)(옹성 바로 남쪽 집에 거주하는 79세 허정길 할아버지. 1998년 5월 31일)
위 사진은 1990년대에 복원한 남문 동쪽 치성이고, 아래 사진은 2002년에 복원한 북쪽 옹성이다.

 

치성이란(참고)


치성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하기에 유리한 시설이다.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도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인용하여 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효용성을 말하였다.


“만약 성에 곡성․옹성이 없다면 비록 사람마다 한 살받이터를 수비하고 사받이터 사이에 방패를 세우고 외면에서 오는 화살과 돌을 가려 막더라도 적군이 성 밑에 와서 붙으면 이를 보고서도 막을 수가 없다.

『기효신서』에 의거하면 50타마다 1치를 두어 밖으로 2~3장(丈)이나 나오게 했는데 두 개의 치 사이의 거리는 50타이며 1치가 각각 25타를 점령하게 된다.

따라서 화살이 나가는 힘이 한창 강하고 좌우로 돌아보면서 쏘기가 편리하므로, 적군이 성 밑에 와서 붙을 수 없게 된다.”
《작성 041024, 보완 1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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