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수호신..보성리 대정현 돌하르방(돌할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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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수호신..보성리 대정현 돌하르방(돌할으방)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4.19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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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문 밖에 옹중석을 세우고 원귀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한 것


보성리 대정현 돌하르방(돌할으방)

 
문화재 지정 사항 ; 제주도민속자료 제2호(1971년 8월 26일 지정)

있는 곳(位置) ; 대정읍 보성리 일대

시대 ; 조선

 

 

 

이름(名稱) ; 돌하르방이란 말은 근래에 생긴 명칭이고 원래의 이름은 우석목, 무석목, 벅수머리, 옹중석(翁仲石) 등이다.

돌하르방이란 명칭은 '돌 할아버지'라는 뜻의 제주어로서 1971년 문화재 이름으로 채택한 이래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숫자(數) ; 동·서·남문 밖에 각각 4기씩 12기가 있다.

유래(由來)


돌하르방에 대해서는 그 설치 유래가 정확하지 않다. 고려시대에 몽골 석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한 것이 있었으나 이는 시기적으로 볼 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타당하지 않다.

비교적 타당한 주장은 1754년에 김몽규 목사가 만들어 세웠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담수계(淡水契)에서 펴낸 《耽羅誌》에 나온다.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나, 1653년에 이원진 목사가 동국여지승람과 제주풍토록을 참고하여 편찬했다는 《耽羅誌》나 이형상 목사가 1702년 그린 《탐라순력도》, 1704년 저술한 《南宦博物》에도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1700년대 초까지는 돌하르방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고 보면 김몽규 목사 설치설은 어느 정도 타당할 것 같다.

돌하르방은 옹중석이라고도 하는데 옹중은 사람 이름으로 진시황 때 흉노족 등을 격파하였던 거인역사(巨人力士) 완옹중(阮翁仲)이다. 그가 죽은 후 진시황은 그의 공을 생각하여 그의 상을 구리로 만들어 아방궁 문밖에 세워 두었다.

흉노족이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원한을 풀기 위하여 쳐들어왔으나 멀리서 아방궁 쪽을 바라보니 완옹중이 의젓이 서 있으므로 그대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이 때 진나라 사람들이 완옹중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라를 지킨 수호신이라 하여 그의 상을 구리나 돌로 만들어 궁궐이나 관아 앞에 세우게 되었다.

김몽규가 돌하르방을 만들어 세운 뜻은 숙종 영조 연간에 흉년이 자주 들어 굶주리거나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많았고 그 중에는 원귀가 되어 생인을 괴롭힌다 하므로 3문 밖에 옹중석을 만들어 세우고 원귀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예가 되어 정의현과 대정현에도 성문 밖에 옹중석을 만들어 세웠다.(제주통사 164-166쪽)

기능(機能)


돌하르방의 주요 기능은 수호신적 기능과 주술종교적 기능, 위치표식기능으로 보고 있다.


(1) 수호신적(守護神的) 기능


돌하르방이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의 치소 입구에 쌍쌍이 마주하여 서 있음으로써 도읍지내는 물론 관내 주민들의 강녕과 융성을 지켜 주며 기원하는 기능을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은다. 문지기 노릇을 한다든가, 무덤 앞에 세우는 동자석과 같은 기능을 한다든가 하는 말들은 돌하르방이 수호신적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2) 주술종교적(呪術宗敎的) 기능


원귀의 출입을 막는다고 한 김몽규 목사의 돌하르방 제작 목적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축사(逐邪)의 기능을 지님으로써 난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든지, 악질(惡疾)의 침범을 막을 수 있다든지, 애를 못 낳는 여인이 밤에 몰래 돌하르방의 코를 쪼아다 빻아서 먹으면 잉태할 수 있다든지 하는 전승도 이에 해당한다.


(3) 위치표식(位置標識) 및 금표적(禁表的) 기능


돌하르방은 도읍지의 성문 앞에 세운 것이므로 도읍지의 위치를 분명히 알려 준다. 성 바깥 사람들은 성 안으로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삼가도록 했었으므로 위치 표식과 더불어 금표로서의 기능을 지녔음이 드러난다.

모양


47기의 돌하르방이 모두 형태는 조금씩 다르고 제주목의 것이 가장 커서 평균신장 181.6cm, 정의현(성읍리) 141.4cm, 대정현(보성리) 136.2cm 인데 제주시의 것이 더욱 위용있고 예술성 있게 조각되었다.


제주시의 것과 성읍리의 것에는 받침돌(基壇石)이 있다. 특히 제주시의 것에는 받침돌에 O , L모양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 표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제주의 문화재 385쪽) 하나 필자는 그런 모양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허리 아래는 표현하지 않았고, 뭉툭한 주먹코, 부리부리한 왕방울 눈, 넓게 뻗은 귀, 굳게 다문 입, 차양이 짧은 모자를 눌러쓰고 양손을 단정히 배 위에 올려놓은 돌하르방은 시커멓고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으로 만들어져 어찌 보면 보기 사납게 보이지만 왠지 푸근하게 정이 가는 인상이다.


대부분의 돌하르방은 손을 배에 대고 있는데 오른손을 위로 가게 한 것과 왼손을 위로 가게 한 것을 어떤 구분의 기준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면 왼손이 위로 간 것이 문관이다. 아니다 그 반대다, 또는 오른손이 위로 간 것은 환영의 뜻이다 등이 있고 그밖에도 여러 주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손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만 후대의 사람들이 추정할 뿐 기록이 없다. 더구나, 대정현의 돌하르방 중에는 두 손을 마주대고 있는 것도 2개 있고, 정의현의 돌하르방을 보면 동문과 서문 밖의 것은 8기 모두 왼손이 올라갔고 남문의 것은 3기가 오른손이 올라갔기 때문에 문무관 등 서로 상대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제주시의 것들은 11기가 오른손이 올라갔고 10기는 왼손이 올라갔다. 앞으로 확실한 근거가 나타날 때까지는 판단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또한 보성리 마을 길가에는 미완성 돌하르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재질은 현무암이며, 털벙것과 같은 모자가 표현되어 있고, 눈과 코 일부가 양각 혹은 반양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외에 팔과 손이 나타나 있다.

이 돌하르방은 상단 부분이 파손되어 있는 상태지만 전체적인 상태로 보아 현존하는 다른 돌하르방을 조각할 당시 미완성 또는 실패작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제주도내의 돌하르방들이 그 지방(濟州牧·大靜縣·旌義縣) 석공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음을 입증하는 최초의 확증 자료이다.(남제주군의 문화유적 3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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