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제주 의병의 시초..난산리 오흥태 의사비
상태바
[향토문화]제주 의병의 시초..난산리 오흥태 의사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4.25 07: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백인이 모여 장차 발선(發船)하고자 할 때 난이 평정돼 정지'


난산리 오흥태 의사비 吳興泰 義士碑


난산리 오흥태 의사비 吳興泰 義士碑
위치 ; 성산읍 난산리 416번지. 마을에서 온평리로 가는 길 중간 지점 길 옆(북위 33°24′02″, 동경 126°52′44″)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시대 ; 조선

 

 

 

오흥태는 유향별감(留鄕別監) 오전(吳 )의 아들로 성산읍 난산리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부지런히 공부하여 과거에도 수차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강직한 성품을 지닌 그는 세속에 젖지 않고 의리를 위해서는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관철하였다.

영조4년(1728)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오흥태는 출전을 결심하고 근왕병을 모집하려고 전도에 격문(檄文)을 돌렸는데 응모자가 수백명에 달하였다. 모든 준비를 하고 출발하려고 날씨를 기다릴 때 난은 벌써 수습되어 평란의 소식이 전하여졌다.

오흥태는 전선에 출전하여 진충의 성을 다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이 출진을 중지하게 되었다. 그의 격문은 구구절절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으며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다.(남제주군지 202-203쪽)

 

다음 글은 오의사가 썼던 격문이다.


〈다음과 같이 격문을 띄우는 일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임금과 어버이요 귀한 것은 충성과 효도일 뿐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임금과 어버이가 비록 같지 않다고 하나 충성과 효도는 둘이 될 수 없다 하였다.

이를 두고 볼 것 같으면 사람의 신하되고 아들된 자는 임금과 어버이가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구차하게 살려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혹시라도 아들이 아버지의 위급함을 구하지 아니하고 신하가 임금의 어려움을 풀려고 먼저 서둘지 아니한다면 충효의 마을에 죄가 될 뿐만 아니라 소나 말 같은 무리가 될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어니하랴!


우리 임금님은 숙종의 아들이며 경종의 동생으로 백성들의 노래부름(원하는 바)에 따라 대통을 계승하였다. 요 임금과 같은 자질을 타고 나셨고 탕 임금이나 무왕과 같은 덕을 지녀 임금님 되신 지 사년만에 은택이 모든 백성에게 적셔 들었다. 그러므로 나라 안 백성들은 모두 죽지 않고 오래 살아서 그 덕화가 성대히 이루어짐을 잠시라도 보고자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천만 뜻밖에 흉적의 무리가 음큼한 마음을 품고 신기를 엿보려고 무리를 모아 경기도와 영남에서 발호하였다. 구정을 가벼이 여겨 묻고자 하였고, 머리를 내밀어 삼천을 엿보니 어리석고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따라야 하고 거절하여야 할 의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왕왕 그 무리에 들어가 삼남 지방 태반이 적의 소굴이 되었다 한다.


아! 어찌 이와 같은 세상이 되었는가? 수천년 전해 온 기자의 나라요, 삼백년 이어온 우리 조정이 예의와 문물이 조금도 중국에 비하여 부끄러움이 없었고, (임금님의) 깊은 어짐과 두터운 은택이 실제로 백성에게 적셔져 있어 흉악한 무리가 그 사이에서 물들여질 줄은 일찍이 생각하지 못하였다. 통분하고 한탄할 일이다.

지금 적의 괴수가 불괴를 도모하여 하늘을 거역하는 악한 일을 시작하였으니 어찌 조정의 장군이나 정승들만이 절치부심할 도적들인가? 실로 온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원수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364현 가운데 강계하고 충의로운 선비가 먼 시골 구석에서 반드시 일어나 국가의 위급함에 몸바쳐 충분히 적을 평정할 것이다.


우리 제주도는 육지와 달리 오래도록 잊지 못할 국가의 은덕을 입었다. 지난 계사년(숙종 39년, 1713)과 갑오년에 흉년을 당하여 굶주릴 때 우리 숙종대왕께서 특별히 곡식을 보내어 은덕을 베풀었으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처자를 보전할 수가 있었으니 모두 임금님이 내려준 바가 아닌 것이 없다.

초목금수도 오히려 하늘에서 비와 이슬을 내려주는 은혜를 알거늘 항차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유독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지금이 임금님이 위태롭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때라 신하가 목숨을 바치기에 알맞은 때이다. 위아래 모든 사람들이 선왕을 잊지 못하는 마음으로 전날 구원하여 준 은혜를 생각하여 가지런히 전쟁터로 나아가 적진과 맞부딪혀 우리의 임금님께 보답하지 않겠는가?


옛날 진(進)나라 목공이 기산 아래 사는 야인들과 밥을 같이 먹고 말을 같이 타면서도 법을 집행할 때에는 마땅한 벌을 주었다. 그러나 목공이 술을 하사하였던 일을 감사히 생각하여 접전에 나아가 진(晋)나라 군사를 무찔러 목공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어찌 만고에 아름다운 이름이 아닌가?

야인의 무리도 이와 같이 하는데 두루 국가의 은택을 입은 우리 섬 안의 백성들이 어찌 야인의 무리만 못하여 국가의 어려움에 몸바쳐 성스러운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겠는가?


우리들 백면서생은 임금을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순국을 결의하였으나 적을 제압할 재주와 임기응변할 책략이 없이 망령되이 근왕(勤王)의 뜻을 내었다 하여 함께 국난에 나아갈 자가 없으니 진실로 통탄할 일이다.

그러나 백성과 신하된 사람이 국가의 어려운 때를 당하여 (국가를) 위하여 죽으면 영광된 일이지만, 흉악한 칼날이 횡행할 때에 살아남는다면 이 또한 욕이 된다. 옛 사람은 성공과 실패, 무기의 날카롭고 둔함은 의론할 것이 못 된다고 말했다. 만약 싸움에 이기고 질 것과 한 몸이 죽고 살 것을 헤아려 그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선다면 어찌 충신 의사의 마음이라 하겠는가?


이에 삼읍의 각반(各班) 각청(各廳) 각면 각리에 격문을 보내어 진실로 충의롭게 한 몸을 잊고 나라에 몸바칠 자가 있으면 맹세코 더불어 행하려 한다. 나의 말을 우활하다 하여 머뭇거려 바라보지만 말고, 또 한 번 죽기가 어렵다 하여 늦추어 임금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꾸며서 하는 말이 아니고 진실한 마음에서 하는 말이니 혈기 있는 대장부는 어깨를 펴고 뛰어나와 의로운 함성을 함께 외치고 국가의 어려움에 부딪혀 죽던지 살던지 해 준다면 다행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겠다.〉(제주향교지 611∼616쪽)

 

정조18년(1794) 심낙수 어사가 와서 사실을 확인하고 아뢰기를


〈정의현 故 학생 오흥태는 무신년(1728) 역란(逆亂) 때 손수 의리를 일으키는 토적(討賊)의 격문을 초하여 이를 삼읍에 전하니 대략 수백인이 모여서 장차 발선(發船)하고자 할 때 난이 평정되었다는 것을 듣고 정지하였습니다.

그 글은 충의와 비정(悲情)이 격렬하고 말은 엄숙 정의(正義)하여 비록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 그 마음은 불민(不泯)하오니 섬의 민속으로 하여금 마땅히 어버이와 임금을 위하여 죽는 것이 옳은 의리임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흥태의 일에 대해서는 마침내 표장(表奬) 이 없으니 실로 흠전(欠典)이라 하겠습니다.〉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오흥태가 나라를 위한 충의는 어사로 하여금 오흥태의 마을을 정인(旌人)하여 의사(義士)라 하고 행적을 편찬 기록하여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마을을 지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머리를 숙이게 하여 백대(百代)에 풍속을 교화하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되도록 하라.〉하였다.(濟州鄕校誌 624쪽)

이에 따라 의사(義士)로 정표(旌表)되고, 철종원년(1850) 목사 장인식이 정의서당에 의사묘(義士廟)를 세워 배향하였다.(남제주군지 202-203쪽)


오 의사는 제주 의병의 시초가 되며, 오 의사비는 비석이 두 개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글씨가 마멸되어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지만 작은 글씨가 가득 쓰여 있었으며, 1991년 남제주군수가 원문과 똑같은 내용을 쓴 새로운 비석을 그 옆에 세워 놓았다. 비문은 심낙수 어사가 제주에 왔다가 오흥태 의사의 모병 내용을 듣고 비문을 직접 써 준 것이라 한다.

 

오흥태 의사의 충절을 기리는 시가 있다.

난산리 高鳴鶴의 시①
題吳義士傳後
草檄生前事
旌門死後榮
可憐泉下恨
不得渡重溟

오의사 전기에 붙여
살았을 때 격문을 지었고
돌아가신 뒤 정문의 영광
땅 속에서도 맺힌 한은
넓은 바다를 건너지 못한 일

 

글자풀이


∙吳義士:영조 4년(4061:1728) 정희량(鄭希亮)의 난에 의병을 일으켰던 오흥태(吳興泰)를 가리킴. 정조 18년(4127:1794)에 정려(旌閭) 되었고, 철종 원년(4183:1850)에 의사묘를 건립 제향되었다. ∙草:초잡을 초. 풀 초. ∙檄:격서 격. 草檄은 ‘격서를 초하다(쓰다)’의 뜻. ∙泉下恨:泉은 黃泉을 뜻함. 오의사가 의병을 일으켰으나 바다를 건너 적진에 나가기 전에 난이 평정되었으므로 죽은 뒤에도 餘恨이라는 뜻.

※ 고명학(高鳴鶴) 영조 45년(4102:1769)~헌종 2년(4169:1836)


자는 자화(子和), 호는 우졸재(愚拙齋)이다. 정조 18년(4127 : 1794)에 대과에 급제한 정의 삼장령(三掌令)의 한사람으로 시와 문에 능했고 특별한 애향심으로 우리 고장의 문화적인 침체를 벗어나게 하려고 향현(鄕賢)을 높이고 향학을 일으키는데 평생을 보냈다. 우승지, 장령, 대정현감 등의 벼슬로 여러 번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고향인 상효리에서 자연을 벗 삼아 살았다.(http://blog.daum.net/ik3711/ 밝은토끼생의 글)

 

난산리 高鳴鶴의 시②


題吳義士傳後
莫非王土莫非臣
報國丹衷亦幾人
可識先生天下士
照心星月掛蒼旻

오의사 전기에 붙여
임금님 땅 아닌 곳이 없고 신하 아닌 사람이 없는데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바친 이 몇 사람인가
선생이 천하의 뛰어난 선비임을 알 수 있는 것은
환한 마음 별과 달같이 저 하늘에 걸려 있기 때문

글자풀이
∙莫非王土:온 나라가 모두 임금님의 땅. 즉, 모든 백성이 임금님의 은택을 입고 산다는 뜻.
∙照心:티 없이 맑은 마음. 여기서는 충성심을 뜻함.(http://blog.daum.net/ik3711/ 밝은토끼생의 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