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김씨영감..삼달1리 웃카름당(본향당)
상태바
[향토문화]김씨영감..삼달1리 웃카름당(본향당)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4.27 07: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삼달리 마을 수호신,청렴한 관리의 아들이었다가 제주로 귀양온 신


삼달1리 웃카름당(본향당)


삼달리 웃카름당 本鄕堂


위치 ; 성산읍 삼달1리 삼달본향당은 웃동네에서 하천을 건너 서쪽 농로를 따라 700여m 쯤 되는 곳, 대나무와 팽나무 등이 우거진 곳에 당집을 지어 모시고 있다.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시대 ; 조선

 

▲ 삼달1리_웃카름당(디서문)건물

▲ 삼달리_본향당(내부).

웃카름 본향당의 본향당신은 ‘황서국서 어매장군’이며, 그 아래로 ‘김씨 영감’도 함께 모셨다. 제일은 정월 2일, 2월 13일, 7월 13일이다. 제물로 메는 2기지만, 돼지고기는 금한다.


웃카름당은 최근에 당을 새로 정비하였다. 당집은 자연석에 시멘트를 덧발라서 지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시멘트로 만든 제단이 있다. 제단 위에는 신상(神像)을 모시는 나무 궤와 함이 놓여 있다. 그 앞으로 큰상 2개를 펼쳐 놓았다. 신상을 모신 궤는 2단으로 되어 있다.

상단에는 나무판에 한복을 입혀 놓은 신상 5기가 있고, 하단에는 물색과 촛대·소주·술잔·양초 등이 놓여 있다. 그 옆의 나무함에는 물색과 그릇 등이 있다. 당집 한쪽 구석에는 명실들을 비닐봉투에 담아 한데 모아 두었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①이 당의 신은 황서국서 어모장군이다. 황정승이 역적으로 몰려 나라의 미움을 받고 있을 때 중병에 걸렸다. 황우의 피를 받아 마셔야 병이 낫겠다 하므로 백정을 불렀으나 나라에서 백정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기 때문에 구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아들들에게 소를 잡아 달라고 했는데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못하겠다고 하므로 셋째아들이 소를 잡아 피를 드리니 아버지가 원기를 회복하였다. 아버지는 '너도 역적으로 몰릴 것이니 피난을 가라.'고 했다. 아버지의 말을 따라 충청도 전라도로 해서 제주도에 배를 붙였다. 동복리로 들어와 장군혈을 밟아 좌정할 곳을 찾았다.


종달리, 심돌, 손당, 정의골 멍둥마루, 난미를 거쳐 와갱이로 들어섰다. 이 마을에 좌정하기로 결심하고 좌정할 곳을 찾기로 했다. 당골에 가 보니 김씨영감이 병이 깊어 사경에 이르렀다.

황정승 셋째아들은 김씨영감에게 현몽하여 '백돌래에 백시루에 소주를 차리고 너희 집 고팡으로 위판을 모셔서 나를 위하면 너를 살려 주마.' 했다. 김씨영감이 그대로 했더니 병이 낫고 상통천문 하달지리하여 죽을 사람 살 사람을 척척 알아맞혔다.

앓은 사람은 김씨영감이 빌기만 하면 꼭꼭 나았다. 그래서 김씨영감은 심방이 되고 부자가 되었다. 그 때 제주에는 아홉해나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죽게 되었다. 김씨영감이 사재분급하여 쌀을 사다 한 집에 닷 되씩 열 되씩 나누어 주어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이 일을 나라에서 알고 김씨영감을 불러 통정대부 벼슬을 내렸다. 김씨영감은 벼슬을 받고 돌아와서도 계속 심방 일을 하다가 늙어 죽었다.

나라에 이 사실을 보고하니 '신체는 비록 죽어도 영원히 남을 신상(神像)은 내어 주마' 하고 밤나무로 황서국서 어모장군 부부와 김씨영감의 신상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당에 그 신상을 모시고 대대손손 전수되어 오늘날까지 위해 내려온다.(신산리 여무(女巫) 김영선 제공)(현용준, 제주도신화, 1977.269-273쪽)

②한양에 황정승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세도를 부렸는데 세도가 높을수록 백성들은 그를 멀리 하였다. 그러던 중 황정승이 몹쓸 병을 얻었다. 백약이 무효로 사경을 헤매는데 과객이 산 소의 피를 마시면 된다는 처방을 해 주었다.

백성들이 황정승의 세도를 미워하여 아무도 소를 잡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셋째아들 어가장군이 손수 소를 잡고 상놈이 되었다. 그러나 양반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부모님께 의절을 고하고 죽기를 간청하였다. 할 수 없이 그를 상자에 넣고 바다에 버리게 되었다.

그의 혼백은 바다를 표류하다 구좌읍 세화리 단지모래에 도착했다. 얻어먹을 곳을 찾기 위해 바당소동산에 올라 살펴 보니 '동읫한집' 귀신이 차지하고 있었다. 송당 높은 오름으로 가 보니 '하늬바람' 귀신이 지키고 있고, 통오름에 올라 난산 쪽을 보니 '쇠당' 귀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읍리로 가 보니 '할망당' 귀신이 있어서 가던 길을 되돌아 뫼미 르(와강)로 와 보니 과연 양반이 살 만한 지형이었다. 집배기못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찾아가 거처하기를 청하니 '고망할망'이 거절하면서 윗집 김씨영감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어가장군 혼백은 김씨영감에게 위탁되었다.


그러자 김씨영감은 갑자기 죽게 되었는데 죽더라도 묻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유언대로 놔 두었더니 3박4일만에 회생하여 황정승 셋째아들 어가장군이 자기 몸에 위탁된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 후 김씨영감은 신통력을 발휘하여 소소한 병은 손만 닿아도 나았고 어떤 병도 침이나 경으로 치료를 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돈을 벌게 되어 이웃을 도움은 물론 나라에까지 재물을 진상하니 통정대부의 직함을 받게 되었다. 김씨 영감은 경주 김씨 김대길이란 분으로 그 6대손이 삼달하동(삼달2리)에 살고 있으며 이 일은 180년 전의 일이다.

김씨영감은 평생 어가장군 혼백을 신탁하고 제사지내며 모셔 왔는데 김씨영감이 돌아간 후로는 한바기(함백이)물 강씨가 그의 덕을 기리어 4년에 한 번씩 큰 굿을 하며 마을 주민 전체가 모시는 본향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마을 공동의 본향당으로 된 지가 150년에 이르고 있다.


본향제는 매년 음력 정월2일, 2월13일, 7월13일 당을 책임진 무당(당맨심방)이 행한다. 제물은 메, 쌀, 흰돌래떡, 달걀 1개, 백지를 지성으로 진설하는데 다만 돼지고기는 금물로 되어 있다.(삼달1리 고만송(高萬松) 씨 제공)(삼달리지.1986.46-48쪽)

③삼달리 마을 수호신은 목소리가 크고 담대한 장군으로 청렴한 관리의 아들이었다가 제주로 귀양온 신이다. 옛날 서울에 황정승이 살고 있었다.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는데 모두 똑똑하고 유망하였기 때문에 집안이 날로 번창해가는 듯했다.

그러나 어느 해엔가 황정승이 죽을 병에 걸리면서 떵떵거리던 가세는 갑자기 기울고 말았다. 환정승의 병은 희귀한 것이어서 백가지 약이 소용없었다. 다만 황소의 피를 받아 먹으면 낫는다는 처방이 내려졌다.

황씨 집안은 청렴하였기 때문에 재물과 권세욕에 눈이 어두웠던 탐관오리들에게는 미움을 샀다. 황정승이 황우혈을 먹으면 살아난다는 소문은 어느새 이 세도가들에게도 알려졌다.

백정들이 불려가 황소를 잡아 피를 마시고 황정승이 살아날까 두려워한 두려워한 이 세도가들은 백정들을 모두 잡아다 가두어 버리고 아무도 황씨집안에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병석에 누운 황정승을 역적으로 몰아붙였다. 아무도 황정승을 위해 황소를 잡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천금같이 믿었던 아들마저도 피보기르 꺼려해 황소를 구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나서지를 않았다.


하는수없이 효심이 깊은 막내아들이 나섰다. 황정승의 막내아들을 배포가 크고 힘이 좋았기 때문에 훗날 주민들에게 '황서국서어메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황소를 끌어다 그 목에 참실을 걸어매어 대문간에 묶어 두고는 황소의 귀에다 대고 우뢰와 같은 소리를 질렀다. 황소는 놀라 달아나다가 실에 목이 졸려 죽었다. 막내아들은 대청에서 그 소의 피를 받아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는 되살아났다.


그러나, 역적으로 몰렸던 아버지의 권세는 되살아나지 못했고 막내아들은 소를 잡았기 때문에 상놈의 신분으로 전락했다. 한양에서 살 수 없게 된 막내아들은 제주도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황도령이 구좌읍 동복리로 들어와 장군혈을 밟으며 오다 보니 성산읍 시흥리로 허풍헌이 부임해 오고 있었다. 황도령은 참새로 환생하여 그 앞을 날아다녔다.

허풍헌이
"어떤 짐승이 이렇게 앞을 어지르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그만하면 풍헌을 할 만하구나."


길을 비킨 황서장군은 종달리 쪽으로 갔으나 그곳에서는 아낙네들이 삼태기를 들고 소금을 만들고 있어서 너무 강포하여 앉을 자리가 못 되었다. 장군혈이 뻗어 있는 시흥리 '큰물머리'로 갔더니 허풍헌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누구 하나 반겨 주는 이가 없어서 구좌읍 송당 인근의 높은 오름에 올라앉아 옥퉁소를 부노라니 밤이 새어 날이 밝았다. 한라산에 올라 오백장군 오백선생을 구경해 봐도 인간이 그립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의고을 '멍둥마루'에 와 앉아 보니 정의현 관가에서 죄인들을 잡아다 족치는 것이 내려다보여서 양반이 앉을 자리가 못 되었다. 다시 장군혈을 밟아 성산읍 난산리로 내려가니 '골미당'이 있어서 앉을 곳이 못 되어 와갱이로 발길을 옮겼다. 삼달리는 도내에서 양반촌으로 유명한 곳이다.


"촌은 빈촌이라도 좌정할 만하구나. 매밋물도 좋아지고, 베릿물도 좋아지고, 세숫물도 좋아진다."
삼달리에 도착하여 보니 김씨영감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김노인의 꿈에 현몽한 황도령은
"백돌래에 백시리에 자소주를 제물로 올리고 너희 집 상고팡으로 위판을 모셔 위해 주면 살려 주마."
고 했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 살아난 김씨영감은 상통천문하달지리하게 되었다. 김씨영감은 죽음에 이르러 시신은 묶지 말라고 유언을 했는데 그대로 했더니 삼일만에 되살아나서 그 때부터 영험이 좋아졌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병에 걸리면 신통하게 그 원인과 처방을 알아내어 치료해 주는 등 영험이 좋아 돈을 많이 벌었다.


어느해 마을에는 아홉해 동안 흉년이 들어 모두 굶어죽게 됐다. 김씨영감은 그 동안 모아 두었던 재산을 풀어 주민들을 구휼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기특히 여겨 통정대부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부터는 황서장군과 김씨영감이 함께 모셔지고 있으며 무덤도 삼달리에 남아 있다고 한다. 여기 나오는 김씨영감은 경주김씨 김정희(金政熙)씨의 5대조 김대길(金大吉)씨라고 한다.(제민일보 4328.9.20. 神들의 故鄕「황서국서어메장군」)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달본향당신에 대해서는 전하는 이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대체적인 줄거리는 같다고 할 수 있으나, 당신의 이름에서도 「황서국서어메장군」「황서국서어모장군」「어가장군」 등으로 차이가 있으며, 서울에서 삼달리로 들어오는 경로도 서울을 피해서 생인의 상태로 왔다고도 하고 혼백이 되어서 왔다고도 한다.


당집 속에는 옷장과 같은 함이 있고, 그 속에 지금은 밤나무 신상은 없고 한복을 입은 형태의 당신(堂神) 4위(어가장군 부부,김씨영감 부부)가 정면에, 또 한 신위가 왼쪽 측면에 모셔져 있다.

현재는 당맨심방이 없는 상태이나 신풍리 심방이 본향제를 지내어 준다고 한다. 삼달리에서는 이 당에 대한 신앙 때문에 설에도 돼지고기를 쓰지 않으며 돼지고기를 먹은 사람은 당에 출입하지 않는다고 하며, 삼달리에 거주하는 사람은 물론 다른 곳에 가서 살고 있는 사람도 본향제에는 꼭 돌아와서 참석한다고 한다.
《작성 041025, 보완 14060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