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효자문거리..수산1리 홍달한효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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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효자문거리..수산1리 홍달한효자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5.03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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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효자의 묘는 작은물뫼(소수산봉)에 고성리 바라보는 방향에 있어


수산1리 홍달한효자비 孝子碑


수산리 홍달한효자비 孝子碑
위치 ; 성산읍 수산리 수산초등학교 서북쪽 200여m 지점. 수산초등학교 북쪽 길로 서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길로 들어가서 다시 왼쪽 길로 가면 길가에 보인다.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시대 ; 조선 후기

 

 

조선 제24대 헌종(1834-1849) 때 남제주군 성산읍 고성리에 효자로 이름난 홍달한(洪達漢)이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리 지극하고 남달리 부모를 극진히 공양하였다.

아버지는 홍달한이 어릴 때 돌아가셨다. 젊어서는 현청의 포졸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홍효자는 어머니가 병으로 눕게 되자 침식을 잊고 병구완에 힘썼다.

먼저 재력을 다하여 좋은 이부자리를 마련하여 드렸고, 아버지는 방안에 모시고 자신은 옷을 입은 채 마루에 자면서 아버지를 보살폈다. 그리고, 매일매일 아버지의 변을 받아내고 직접 먹어 보았다.

날이 갈수록 단맛이 더해가자
"똥 냄새가 궂어야 오래 사는 법인데 똥 냄새가 단 것을 보니 속히 세상을 떠나실 것 같구나."
하면서 통곡하였다.


하루는 홍효자가 어머니의 병세도 나아지고 해서 이를 잡았는데 살생을 하지 않는 그는 가죽옷 털 속에 빽빽히 들어 있는 이를 하나씩 잡아내어 땅바닥에 놓아주는 것이었다.

육지서 온 말총장수가 지나다가 이잡는 꼴을 보고 놀려 주려고
"옷을 시루에 넣어 찌면 이가 한꺼번에 도망가리다."
하고 말해 주었다.

순진한 홍효자는 그 말을 믿고 가죽옷을 시루에 넣어 쪘다. 이는 다 죽었지만 옷이 구운 오징어처럼 비틀어져 입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아, 공연한 놈의 말을 들어서 이는 다 죽어 버리고 옷마저 못 입게 되었으니 어머니께서 아시면 얼마나 상심하실까?"
하고 탄식을 하였다.


한편 말총장수는 말총을 사가지고 육지로 가려고 배를 놓았다. 그러나 출발하려고 할 때마다 풍파가 세어서 돌아오기를 수십번 되풀이하였다. 하다못한 말총장수는 점쟁이를 찾아갔는데 점쟁이는
"천하대효(天下大孝)의 마음을 거슬러 놓았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
고 꾸중을 하였다.

말총장수는 죄를 뉘우치고 홍효자를 찾아가서 용서를 빌었다. 그 후에야 순풍이 일어 육지로 갈 수 있었다.
헌종이 승하하자 홍효자는 다랑쉬오름에 올라 향을 피우고 북향사배하며 통곡하였다. 이 때 향 냄새가 한양까지 퍼져서 제주 홍효자가 분향하는 것을 궁중에서도 알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정성스럽게 상을 모셨으며 무덤 옆에 여막을 지어 3년을 지켰다. 또한 사람들을 빌지 않고 혼자서 산담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 모친상을 마친 후에는 다시 상복을 입고 어려서 치르지 못한 부친상을 치렀다.

식생활까지 절제하여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자식에게는 '네가 병이 나면 누가 조상님을 모시겠느냐?' 하며 고기를 먹게 하였다.


말년에는 '성인의 가르침을 터득하고 실천해야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며 책을 즐겨 읽었으며 날마다 강론을 하였고 새로 터득한 것이 있으면 고치기도 하였다.


그 후 효자비가 내려져서 고성리에서 수산리로 가는 길목에 남아 있고 그 넋을 높이 받들어 그곳을 '효자문거리'라고 부른다.(제주도, 제주도의 문화유산. 95-96쪽)


현재는 효자비는 수산리 수산초등학교 북쪽 500여m 지점 외진 곳에 있고, 후손들이 커다란 기념비를 세워 놓았고 남제주군수 명의로 세운 안내판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22년(1746) 7월 28일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命濟州人洪達漢加資 達漢有孝行且於庚子甲辰國喪俱行方喪之制 每朔望必登高而拜 牧使韓億增以聞有是命
〔제주인 홍달한(洪達漢)에게 가자(加資)하라고 하였다. 홍달한은 孝行이 있고 또 경자년과 갑진년 국상에 모두 방상지제(方喪之制)를 행하였다. 그리고 매번 삭망에는 반드시 높은 산에 올라가 북향재배하였다. 목사 한억증(韓億增)이 이를 아뢰어서 이 명이 있었다.〕(조선왕조실록중 탐라록 528쪽)

여기서 경자년은 1720년 숙종의 상이고, 갑진년은 1724년 경종의 상, 방상지제란 三年服喪을 뜻한다.


홍효자의 묘는 작은물뫼(소수산봉)에 고성리를 바라보는 방향에 있는데, 1749년 세워진 비석에는 「留鄕座首濟州都訓長忠孝嘉善大夫洪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제민일보 1991년 2월 27일 '오름나그네')


제주에 유배되었던 정실(鄭實)이라는 사람이 적거하는 동안 주홍양열녀급홍효자전(周洪兩烈女及洪孝子傳)을 지어 널리 알렸다.(제주사인명사전 643쪽)

홍달한 효자에 대한 오조리 사람 吳鳳祚의 시가 전한다.

敬次烏川洪孝子贊


千古卓然不朽名
忠孝雙全日星幷
三年燃燭瞻宸淚
六載居廬泣血情
人竪口碑揚實蹟
天褒旌楔樹風聲
餘慶有子循遺矩
逖矣耽羅義理明

오천이 홍효자를 찬양한 시에 붙여
오래도록 탁연하게 잊지 못할 그 이름이여
충과 효를 함께 닦아 해와 별 같이 빛이 나네
삼년동안 촛불 밝혀 북쪽 궁궐 우러러 눈물 흘렸고
육년 동안 시묘(侍墓)하여 정성이 눈물 겹네
행적을 찬양하는 말 대대로 전해 오고
나라에서 정려 세워 그 명성을 표창했네
후손이 대를 이어 그 가풍을 따르니
먼 지방 탐라섬에 의리가 밝혀졌다.

글자풀이
∙烏川:鄭實의 호. 대제학을 지냈다.
∙楔:문설주 설. 旌楔은 旌閭를 뜻함.
∙逖 : 멀 적.


※ 오봉조(吳鳳祚) 영조6년(4063:1730)~순조15년(4148:1815)


호는 항인(巷人). 현 성산읍 오조리에서 판관을 지낸 오후찰(吳厚札)과 김해 김씨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인 청주 한씨의 슬하에서 자랐다.

천성이 총명한데다가 모부인 한씨의 인자한 훈육으로 학문을 닦아 당대의 본도 유종(儒宗)으로 추앙되었다.

평생을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고 조사(造士)에 힘써 문하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중에 강성익(康聖翊), 고명학(高鳴鶴), 부종인(夫宗仁) 등이 유명하며 정의서당의 훈장으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오조리 오훈장으로 통칭된다.(http://blog.daum.net/ik3711/ 밝은토끼생의 글)

《작성 041025, 보완 13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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