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제주도의 오현(五賢)을 말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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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제주도의 오현(五賢)을 말하다"(2)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 승인 2017.05.09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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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처음으로(?) 총정리한 오현

 

 

1. 충암 김정 (沖菴 金淨, 1486∼1520)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자는 원충, 호는 충암, 고붕. 충북 보은 출신. 중종2년(1507)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보임되고, 홍문 관수찬, 병조화랑을 거쳐 정언에 전입되었다. 이어서 병조정랑, 홍문관부교리, 헌납, 홍문관교리, 이조정랑 등을 거쳐 중종9년(1514)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 때 왕의 구언에 응하여 담양부사 박상과 함께 일찍이 중종이 왕후 신씨를 폐출한 처사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신씨의 복위를 주장함과 아울러 신씨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 등을 주최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얼마 뒤 그는 박상과 함께 재등용되고 응교, 전한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부제학, 동부승지, 좌승지, 이조참판,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 뒤 기묘사화(중종14년(1519) 11월 조광조·김정·김식 등 신진사류가 남곤·심정·홍경주 등의 훈구 재상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로 인해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 등의 옹호로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충암이 진도에서 제주도로 옮긴 1520년 8월부터 사형당한 1521년 10월까지의 기록으로 지형·기후·동식물·특산물을 다루었다. 주민의 생활상과 관원의 횡포, 귀양살이 하는 자신의 형편과 마음에 대해서도 기록했다.)을 썼다.

 

그 뒤 신사무옥중종16년(1521) 송사련(宋祀連)·정상(鄭鏛)이 모의하여 안처겸(安處謙) 등이 무리를 모아 변란을 일으키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무고하여 일어난 옥사.에 연루되어 사람파의 주축인 생존자 3명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인종즉위년(1545)에 복관되었고, 1646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또한 시문과 그림에도 능하였다.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와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이다.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 등을 추진하였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으며,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이고 나중에 문간으로 고쳐졌다.


김정의 묘는 충남 대덕군 동면 내탑리에 있었으나 1978년 대청댐 공사로 그곳이 수몰되면서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동 268-5번지로 옮겨졌으며 1991년 7월 10일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부인은진송씨정려문도 있는데 송씨부인은 진사 송여익의 딸로 남편이 사사되자 같이 세상을 떠나려 했으나 늙은 시부모를 모시고 있어 자결하지 못하고 효도로 부모를 공양했다. 이후 시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8일 동안 음식을 전폐하여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2. 규암 송인수 (圭庵 宋麟壽, 1487∼154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 자는 미수 또는 태수. 호는 규암. 아버지는 건원릉참봉 세량이다. 송시열의 종증조부이다. 진사 엄용공에게 배웠고, 김안국에게 지도를 받았다.

중종16년(1521)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로 임명된 뒤 20여 년에 걸친 관직생활의 대부분을 언관(言官)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는 기묘사화를 일으켰던 훈구와,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한 척신이 정국을 주도했던 훈척정치기(勳戚政治期)였다. 따라서 사림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고 언론의 기능 역시 크게 위축되었다. 권력자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언관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송인수는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언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언관활동을 시작한지 3년이 채 지나지 않은 1526년, 경연에서 그는 “왕이 자신의 허물을 듣기를 싫어하면 끝까지 말을 다하는 언관을 죽이게 되고 결국 나라가 망한 예가 허다하다” 며 간언(諫言)을 소홀히 여기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간언을 그치지 않는 언관과 지나친 간언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왕, 이것이 그가 바라던 언론의 모습이었고 실제로 송인수는 그러한 언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김안로가 권력을 쥐고 정권을 오로지하자 홍문관의 모든 관원이 함께 인사행정의 공정한 실시를 내세워 김안로를 탄핵하였다. 이어서 경연의 전경을 겸임하고 왕의 특지로 충청도 지방을 순찰한 뒤 공물, 잡역의 해를 보고하였다.


중종20년(1525) 박사로 승진하고 이어서 부수찬, 수찬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어 검토관으로써 경연에 참여하였는데, 육조낭관 임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뒤 사헌부 지평, 홍문관의 교리, 부응교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유행한 사치풍조를 배격하고 교육 진흥책을 건의하였으며, 김안로가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탄압하는 등 전횡을 일삼자 중종28년(1533) 그의 죄상을 열거하며 강력히 탄핵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요직에 있는 자가 모두 김안로 일파였고 그의 비위를 건드리면 죽기까지 했던 서슬 퍼런 시절이라 송인수는 오히려 그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중종29년(1534) 3월에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병(풍토병)을 핑계대고 부임한 지 석 달 만인 6월에 사임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이것이 다시 김안로의 미움을 사 사천(泗川)으로 유배되었다. 제주목사 재임 중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 잡았으며,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제주향교지,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조선왕조실록에서 송인수 관련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종29년(1534) 6월 23일〈전라도 관찰사 남세웅(南世雄), 도사 박세후(朴世煦), 제주 목사 송인수(宋麟壽)를 추고하라는 전지(傳旨)를 모두 비망기(備忘記)로 내려보내고, 이어 전교하였다.


"이 3인에 대한 추고 전지(推考傳旨)는, 정청(政廳)에서 서계(書啓)한 것이 이미 잘못되었고 또 미진한 곳이 있으니, 지금 내려보낸 비망기의 내용으로 수정을 해서 다시 전지(傳旨)를 받들어야 한다."


관찰사와 도사에 대한 추고 전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송인수는 조정에서 널리 선발해서 임명했으니 관직에 그대로 있게 하면서 조리(調理)시키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도 갑자기 그 정에 따라 경솔하게 이문하였으니 까닭이 없지 않다."

송인수에 대한 추고 전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인신(人臣)으로서는 쉽고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고 그 직책을 극진히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다. 제주는 해외의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특히 품계를 올려주어 선발해서 보내었는데, 부임한 지 겨우 수십 일 만에 병을 칭탁하고 정사(呈辭)하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행해야 될 직임을 피하려고 꾀하였으니, 이는 인신으로서 중임(重任)을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시종일관된 충절이 없는 것이다."〉


중종29년 7월 4일〈정원이 아뢰기를, "전라도 감사 남세웅(南世雄)의 서장(書狀)에 ‘제주 목사 송인수(宋麟壽)는 정사(呈辭=조선시대 관원이 사정으로 말미암아 국왕에게 사직·휴직·휴가 등을 청하는 문서)하고 점이(粘移=증거 서류 등을 첨부하여 공문을 발송함)한 뒤에 제멋대로 임소(任所)를 버리고 청주(淸州)에 갔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재계하시는 날인데, 서장에 피휘(避諱)해야 될 글자가 있으니 아뢰어서는 안 되나, 관방(關防)이 비게 된 일이라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송인수가 처음에 정사할 때 나 역시 그가 해외에 염증(厭症)을 내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차 추문(推問=어떤 사실을 일일이 따져 가며 꾸짖어 물음)하여 뒷날의 폐단을 막으려고 하였는데, 이제 들으니, 제멋대로 임소를 떠나 청주로 갔다 한다. 속히 추문하도록 하라.”〉


중종29년 7월 22일〈"송인수(宋麟壽)를 경상도 사천(泗川)에 유배시켰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송인수가 채무택(蔡無擇)과 결탁하여 김안로(金安老)에게 붙었다가 그 뒤에 사당(邪黨)임을 깨닫고 배반했다. 김안로가 심히 그를 미워하여 제주 목사로 임명해 쫓아내어 송인수가 그 고통을 참을 수 없어 고을을 버리고 올라왔다.

이 때문에 논죄했는데 해당된 율보다 엄한 율로 다스리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마음아파했다. 당초 김안로가 호오(好惡)의 뜻을 밖으로 내보이고 또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파산(罷散)된 사람들을 서용(敍用)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는데, 이는 실제로는 그의 본심은 아니었고, 이렇게 함으로써 사림(士林)들의 환심을 사려는 수작이었다. 송인수는 바로 이 술책에 넘어가 그에게 귀부(歸附)했던 것이었다.〉

중종32년(1537) 김안로의 실각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송인수는 성균대사성 등의 관직을 역임하며 성리학의 부흥에 힘쓰다 중종36년(1541) 언관의 최고 수장인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됨으로써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 후의 기록을 보면 중종33년 3월에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그해 5월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된다. 중종34년 2월 25일에 병조참판, 동월 28일에 예조참판이 되었다. 중종36년 7월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그해 11월에는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냈다.

 
   
그러나 그 즈음 대윤(大尹)과 소윤(小尹) 등 또 다른 척신세력이 대두하고 있었다. 대윤은 세자(인종)의 외숙인 윤임을 중심으로, 소윤은 경원대군(명종)의 외숙이며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일파였는데 양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왕위 계승 문제 등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송인수는 조정에서 이들 척신의 사치와 권력 다툼으로 인해 사회의 공도(公道)가 무너지고 사정(私情)이 횡행하게 되었음을 여러 차례 비판하다가 중종38년(1543) 또다시 전라도관찰사로 쫓겨 나갔다. 관찰사에 부임하여 형옥사건을 제때에 처리하고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 잡았으며,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특히 조정의 숭유정책을 받들어 영암에 기영정을 세우고 학술을 장려하였다. 형조참판 재임 중인 중종39년(1544)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인종1년(1545) 인종의 즉위로 대사헌에 복귀한 송인수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에 대한 상소를 올리면서 언론과 언관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동시에 척신에 대한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윤임이 형조참판에 임명되자 무식한 무인이 재상이 될 수 없다며 여러 날 동안 탄핵하였다.

또한 윤원형이 품계를 뛰어넘어 공조참판에 임명되자 부당한 인사라며 두 달 동안 강력히 탄핵하여 결국 물러나게 했다. 이 때 주위의 친구는 물론 매부인 성제원까지 윤원형의 세도를 두려워하여 그만둘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이런 사람을 어떻게 재상의 반열에 둘 수 있단 말인가” 하며 탄핵을 감행하였다.


8개월 만에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의 세상이 오자 한성부좌윤에 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여 청주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을사사화의 여진이 채 가시기도 전인 명종2년(1547) 9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났다.

이는 양재역에 붙어있던 벽서의 내용〈女主執政于上 奸臣李芑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을 구실로, 을사사화의 가해자였던 윤원형일파가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을사사화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청주에 내려와 있던 송인수는 이로 인해 경박한 무리들의 영수라는 죄목으로 이약빙과 함께 사사되었다.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도 불린 이 벽서사건으로 이언적(李彦迪)ㆍ정자(鄭磁)ㆍ노수신(盧守愼)ㆍ정황(丁熿) 등 30여 명이 유배당하고,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鳳城君岏)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그후 1565년 소윤 일파가 몰락함으로써 노수신·유희춘·백인걸 등이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으며, 선조가 즉위하고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를 장악한 뒤로는 벽서사건 자체가 무고로 공인되는 한편, 연루된 인물들에 대한 신원과 포장이 여러 단계에 걸쳐 행해졌다. 이 사건은 익명으로 쓰여진 것을 문제삼았다는 절차상의 잘못이 많이 지적되기도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금부 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오던 날은 마침 그의 생일이었다.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친척과 제자들은 대신 그의 죽음을 보아야만 했다. 목욕하고 의관을 단정히 한 송인수는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하여 큰 글씨로 “하늘과 땅이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고 써서 사촌동생인 송기수에게 주고 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사약을 받았다.


“내가 화를 당하였다고 해서 의기소침하지 말고 부지런히 독서하고 술과 여자를 경계하라. 내가 죽으면 상례는 검소하게 지내고 예에 어긋나지 않게 하라.” 49세의 나이로 죽을 때 송인수가 아들에게 당부한 삶은 그가 실천하며 살아온 삶이기도 했다.

죽음에 앞서 아들에게
與其負愧而生( 부끄러움을 안고 살기보다는) 不如無愧而死( 부끄러움 없이 죽는 것이 났다.)는 글을 남겼다.


성리학에 밝았고 성리학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제주의 귤림서원에 제향되었다. 청주의 신항서원, 청원의 노봉서원, 대전의 숭현서원, 전주의 화산서원 등에도 배향되었다. 1567년에(선조 즉위년)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이다.


저술에 시문집 『규암집(圭庵集)』이 있는데 4권 2책으로 된 활자본이다. 기묘사화 때 사망하였기 때문에 흩어져 있던 유고를 한말에 13대손 송태헌(宋台憲) 등이 수집하고 송병선(秉瑄)이 편집, 정리하여 1907년에 간행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동아일보』 2001.4.19.) 2014년 제주교육박물관에서 규암선생문집(역주본)을 발간하였다.

규암집

 

 


청음 김상헌 (淸陰 金尙憲,1570∼1652)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청음(淸陰), 서간노인(西磵老人)·석실산인(石室山人). 시호는 문정(文正). 아버지는 돈녕부 도정(都正)이었던 김극효(金克孝)이며, 우의정 김상용(金常容)의 동생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김대효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소학(小學)》 공부에 힘썼으며 성혼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


선조23년(1590)에 진사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중인 선조29년(1596)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부수찬(副修撰), 좌랑(佐郞), 부교리(副校理)를 지냈다.


제주에서 선조34년(1601) 9월 역적 길운절(吉雲節), 소덕유(蘇德裕) 등의 모반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제주어사로 파견되어 1602년 1월 말에 떠났는데 민정을 위유하고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길운절, 소덕유 사건이란 선조22년(1589) 정여립의 모반을 계기로 서인들이 동인을 몰아낸 기축옥사가 배경이 된다.

소덕유는 기축옥사를 일으킨 정여립의 첩의 사촌이라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승장이 되어 선산 지역에서 산성을 쌓을 때 길운절과 사귀게 되었다. 소덕유는 제주도는 벽지이며 외부와 차단되어 역모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말을 사들인다는 핑계로 청포를 가지고 제주도로 들어왔다.

 

 

소덕유는 승려 혜수 등을 통해 길운절을 불러들였다. 소덕유와 길운절은 제주목사 성윤문이 민심을 잃은 틈을 타 제주도의 문충기·홍경원 등의 토호 세력과 결탁하여 성윤문과 서울에서 내려온 관리를 죽이고 경성을 침범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601년 6월 4일 토호 세력들과 함께 무리를 모아 거사를 모의하려던 중 이들의 말을 엿들은 기생 구생이 협박하였다.

한편 길운절은 정황이 불리한 데다, 역모에 성공하더라도 제주도의 병권이 문충기 무리에게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여 밀고를 하였다. 제주목사 성윤문은 판관 안극효, 서울서 온 점마별감 정덕규 및 정의현감 이연경 등과 함께 성문을 폐쇄하고 군사를 풀어 역모를 꾀한 18명을 체포한 뒤 형틀에 묶어 경성으로 올려 보냈다.

육지에 있던 역모자들은 성윤문이 병사 안위와 체찰부사 한준겸에게 관문(關文)을 보내 즉시 덮치도록 하여 해남에 살던 강유정, 영암에 살던 한희수 등이 잡혔다. 1601년 8월 3일 길운절·소덕유·문충기·홍경원·김정걸·혜수·김종·최구익·이지·김대정·강유정 등이 모두 능지처사(凌遲處死)당하여 사방에 전시(傳屍)되었으며, 가산을 몰수당하고 법에 따라 연좌되었다. 길운절은 처음 밀고한 것이 인정되어 본인이 죽는 데 그쳤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선조 때 제주목사였던 이경록(李慶祿, 1533~1599)은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당시 방어에 많은 공적을 남겼는데, 우도에 숨어 있는 왜구와 접전을 벌이려고 수산방호소를 성산으로 옮겨 외성을 축조할 때였다. 마침 1601년에 제주어사 김상헌이 부임하여 이를 보고 󰡒성산은 제주의 한 군더더기 땅인데 외적에게 오히려 포위될 위험이 있어 계략치고는 졸작이다.󰡓라고 혹평하였는데, 선조35년(1602) 제주목사 성윤문(成允文)이 부임하여 다시 수산 쪽으로 방호소를 환원하였다.


선조35년(1602)에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 등을 비판할 때 연루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고산찰방(高山察訪)·경성도호부판관(鏡城判官) 등을 지냈다.


선조41년(1608)에는 다시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한 후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광해군3년(1611) 승지로 있으면서 이황·이언적 등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을 놓고 정인홍 등이 이언적과 이황을 배척하려고 상소를 올려 격렬히 비난하자 정인홍을 탄핵하였다. 정인홍의 차자는 선현을 모함한 사특한 글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사람은 저마다의 소견이 있는 법이니, 굳이 몰아세워 억지로 자기에게 부화뇌동하게 할 것은 아니다”라며 자신의 정치적 세력 기반인 대북파의 정인홍 편을 들어 상소를 못마땅해 했고, 김상헌은 이를 알고 광주부사로 좌천되었다가 사직했다.(재상열전) 그 외에도 교리, 직제학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인목대비 폐모론이 나오자, 그는 폐모론에 반대하였다.

 


광해군7년(1615)에 지은 글〈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 恭聖王后冊封誥命謝恩箋文〉(전문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사륙체의 글을 이르던 말. 광해가 그의 생모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책봉하는 고명(誥命)을 지으라는 명을 받은 김상헌은 '허물을 보면 어질고 어질지 않은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뜻을 풍자한 관과(觀過)라는 낱말을 사용하다고 하며, ‘어머니가 자식으로 말미암아 귀해짐을 생각한다.’는 구절이 있다고 함. 내용 미상. 이 전문은 파기되었다고 함.

관과지인[觀過知仁] 군자의 과오는 그의 성품이 후한 데에서 오고 소인의 과오는 그의 성품이 박덕한 데에서 빚어진다는 뜻으로, 과오를 저지른 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는데, 인조반정 후 재등용되어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김상헌은 김류, 최명길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조반정에도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군주를 폐출하고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서인은 인조반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서(功西)와 참여하지 않은 청서로 나누어졌다. 김상헌은 청서파의 영수격이었다. 공서와 청서의 대립은 인조7년을 전후해 김류의 노서(老西)와 최명길의 소서(少西)로 나누어졌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다시 조정 신료들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어졌으며, 김상헌은 대표적인 척화파였다.(재상열전)


인조2년(1624)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 등이 거병하여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인조에게 누차 상소를 올려, 붕당·파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정 이후에도 강직한 성격으로 누차 시사를 비판하다가,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하였다.

이후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姜弘立)의 관작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3년 사헌부대사헌에 기용되었는데, 이후 2년간 5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한 언론활동을 벌이다가 여러 고관들과 충돌, 출사와 사퇴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인조14년(1636)에는 예조판서 재임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펴다가 최명길 등이 기초하던 국서(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했다. 그 죄로 이듬해 벼슬을 잃었다. 항복이 정해지자 식음을 전폐하고 교수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는데, 최명길은 이를 두고 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살을 시도해서 죽을 수나 있겠냐며 쇼를 한 것이라 비난했다.
 

정축하성(소위 삼전도 굴욕) 때 인조를 따라가지 않고 남한산성 뒷문으로 나가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갔다.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안동 소산으로 은퇴하였다.


인조16년(1638) 사헌부 장령 유석(柳碩) 등으로부터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며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라는 내용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고 곧 조정에 다시 들어오라는 명을 내렸으나,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을 듣고 의연히 반대하였다.


인조17년(1639)에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인조18년(1640) 11월에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청의 장수 용골대(龍骨大)는 김상헌이라는 인물이 관작도 받지 않고 청의 연호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고, 조정에서는 그를 심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지은 시조가 유명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12월에 그가 도성을 지날 때 인조는 어찰(御札)을 내려 위로했다.

 

경은 선조(先朝)의 옛 신하로서 나를 따라 함께한 지 역시 여러 해가 되었다. 의리로는 군신 사이지만 정리로는 부자와 같다. 뜻밖에 화란이 터져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참으로 내가 현명하지 못한 소치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서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껄끄러운 사정이 있어 그렇게 못했다. 경은 모쪼록 잘 대답해 저들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바란다.

김상헌은 “소신이 형편없이 못난 탓에 끝내 성상의 은혜에 우러러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모자랍니다”라고 화답했다. 그를 만나고 온 신하들은 행동이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선양(瀋陽)에 잡혀 있을 때, 여진족은 수시로 회유하였으나, 그는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타협 요구를 거절하고 끝내 조금도 굽히지 않아, 청나라 사람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라고 했다.

[캡션-김상헌의 설고시첩]

설고시첩은 그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볼모 생활을 하는 동안에 지은 한문 기행 시첩이다. 심양에 함께 잡혀갔던 조한영(曺漢英, 1601~1637년)이 편찬했다.


인조20년(1642)에 의주로 돌아왔으나 명나라와 밀무역을 하다 청나라에 잡혀간 이계가 조선이 명나라를 숭배하고 청을 배척한다고 고해 바쳐 최명길 등과 함께 다시 심양에 잡혀갔다.


인조23년(1645)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하였지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대학자로 존경을 받는 가운데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수차례 거절하며 은퇴의 뜻을 밝히고 효종에게 인재를 기르고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김육이 추진하던 대동법의 시행을 김집 등과 함께 강력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돈령부사로 있다가 효종1년(1650) 5월 28일 녹봉을 수령하지 않았다 하여 효종이 녹봉을 내려 승지가 달구지에 싣고 갔으나 업무를 보지 않았으니 받지 못한다며 도로 실어가게 하였다. 그해 8월 다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효종은 불허하였다.


효종2년(1651) 5월 28일 영돈녕부사직 등 모든 직함을 사직하였으나 불허하였고, 11월 13일 병이 나자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고 약물을 하사하였다. 1652년 4월 다시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거부되었고, 영돈령부사로 재직 중 사망하였다. 효종4년(1653) 특명으로 의정부영의정이 증직되었다.


죽은 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현종2년(1661)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 등에 제향되었다.

 

김상헌은 서인 청서파의 영수로서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의 화의를 배척하는 주전론을 강력히 주장, 의기와 간박(懇迫)한 충정에 앞장섰다. 그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 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왕비 3명과,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세도가문인 안동김씨는 실질적으로 김상헌에서 출발했다.

남사록 교명필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저술에는『조천록(朝天錄)』․『남 사록(南槎錄)』․『청평록(淸平錄)』․『설교집(雪窖集)』․『남한기략(南漢紀略)』 등으로 구성된 『청음집』 40권과 『야인담록(野人談錄)』․『독례수초(讀禮隨抄)』 등이 있다. 『청음집』은 40권 14책으로 된 목판본이며, 현종12년(1671)경 김상헌이 직접 편집한 초고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또한 100여 편에 달하는 묘도문자(墓道文字)를 제작하였으며, 서독은 별로 많지 않으나 인조1년(1623)에 쓴 「여북저김판서서(與北渚金判書書)」가 있고,「김충암묘문(金沖庵廟文)」이 전한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6번지(석실 안동김씨분산)에 있으며 1987년 2월에 경기도기념물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조정에서는 숙종8년(1682)에 당시 예랑이었던 안건지(安健之)를 제주에 보내어 귤림서원(橘林書院)을 사액하고 김정(金淨), 송인수(宋麟壽), 정온(鄭蘊)과 함께 김상헌을 제주의 사현(四賢)으로 봉향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재상열전, 다음백과, 위키백과,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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