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위리안치..감산리 서재임선생(임징하)적려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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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위리안치..감산리 서재임선생(임징하)적려유허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5.10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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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걸어 독서에 더욱 부지런히 게으름 없게 하라'


감산리 서재임선생(임징하)적려유허비 西齋任先生謫廬遺墟碑


감산리 서재임선생적려유허비 西齋任先生謫廬遺墟碑
위치 ; 안덕면 감산리마을회관 마당
시대 ; 조선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서재유허비는 맨처음에는 속칭 '묵은터' 고제영의 집 앞에 세웠다가, 그 후손이 옮겨서 감산리 마을회관 북쪽으로 300m쯤 돌아간 곳 274번지 개인 집 입구에 비석이 서 있었는데, 1997∼1998년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비신의 높이는 145cm이고 갓돌이 있다.

서재 임징하 선생은 숙종-영조(1686-1730) 때의 인물로서 1713년 27세에 사마양시 갑오 문과에 합격하였다. 김진구의 사위이다.

노론이 집권하자 장령(掌令)으로 등용되어 6개조의 상소문을 올려 탕평책을 반대하며 소론의 제거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순안에 유배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집권하자 대정현 감산리로 위리안치되었다.

임징하는 영조 3년(1727년) 별도포(현재 제주시 화북포구)를 통해 제주에 온 후 대정현 감산리(현재 안덕면 감산리)에서 가시울타리를 치고 위리안치됐다.(제민일보 100803)


1728년 유배지에서 연행, 투옥된 뒤 고문을 받다가 1730년 7월 옥사하였다.(남제주군의 문화유적 157쪽) 그가 제주를 떠날 때 제자들에게 남겼다는 시는 다음과 같다.

讀聖賢書所學何事

성현의 책을 읽어 배우는 게 무엇이랴?


要使此心俯仰無愧

이 마음으로 하여 천지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것이로다.


從古以來人誰不死

옛부터 어느 누가 죽지 않았으리오마는


橘林在傍百世可侯

귤림이 곁에 있으니 백세를 기다려 보세.


嗟 小子母以我戒

아아, 제자들이여. 나를 계감으로 삼지 말고


閉門讀書益勤無怠

문 걸어 독서에 더욱 부지런히 게으름 없게 하라.(제주통사 147쪽)

 

제주도에 귀양와서는 감산리 고제영(高濟英) 댁에 적려하면서 인근의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글을 쓰곤 하였다. 사후에 정조가 즉위하면서 그의 죄는 면해졌고 1809년(순조 9) 이조참판에 특증되었다.

서재 선생의 5대손인 임헌대(任憲大)가 제주목사로 부임하였을 당시인 1862년(서재 사망후 130여년)에 5대 종손인 임헌회가 비문을 짓고 임헌대가 비기를 써서 건립한 비이다.(제주도의 문화유산 161쪽) 그런데 뒤의 비문을 보면 임헌대가 종손이고 임헌회는 임징하의 형제의 후손인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嗚呼此濟州之大靜縣柑山村者卽我五代叔祖西齋先生謫廬遺址也 先生姓任氏諱徵夏字聖能西河人西齋其號也 肅廟丁卯生癸巳司馬兩試甲午文科 英廟丙午以掌令 陳辛壬義理辨 聖誣討亂賊爲凶黨所構 順安丁未 棘于此其屋主高濟英也 戊申逮王府備經毒楚竟以庚戌七月二十四日卒 正廟丙申伸雪丹書 純廟己巳特贈吏曹參判 嗚呼先生精忠大節當與天壤同其不 而惟此地乃在絶海中易致久而迷所 先生沒後百三十餘年五代孫憲大爲本州牧爲是之懼建碑而表之屬憲晦識其顚末 嗚呼始先生之被合手也 有詩曰讀聖賢書所也要使此心俯仰無愧從古以來人誰不死橘林在傍百世可俟斯足以知先生因幷記之百世之下過此者尙有感慕而致敬者矣 崇禎四壬戌四月日 從五代孫經 官憲晦謹述 五代孫通政大夫行濟州牧使憲大謹書

임헌회는 임징하의 생전의 글을 모아 '서재집'을 간행하였는데 『서재집』 총 8권 중 권2의 「남천록(南遷錄)」, 「감산록(柑山錄)」은 제주도 귀양 당시 쓴 시로 70여 수에 이른다.

특히 「제주잡시」 20수는 귀양객의 눈에 비친 제주도의 다양한 풍속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誰家環髻女 赤脫向秋天 土俗使男坐 方言須譯傳 打柴供夜績 負盎汲新泉 終歲任勤苦 小裙無半邊(“어느 집안 여인인지 머리는 올렸는데/ 옷은 못 입고 가을을 사네/ 지방 풍속에 남자는 일을 안 하고/ 사투리는 꼭 번역을 해야 말이 통하네/ 땔감 장만하고 밤은 길쌈으로 보내고/ 허벅 지고 샘에 가서 맑은 물을 긷네/ 일 년 내내 부지런히 힘들게 일해도/ 짧은 치마는 몸 반도 못 가리네)


여기에서는 가난하지만 부지런한 제주 여인의 성격이 드러나 있으며, 육지에서 온 사람 귀에 생소한 방언에 대해 잘 나타나 있다.


권6 잡저 중 「수안록(隨雁錄)」은 순안에서 제주도의 대정으로 오는 동안의 일기이다. 대정에 도착한 것으로 끝이 나기 때문에 제주도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길에서 말떼를 만났는데 적은 것은 수십 마리이고 많은 것은 몇 백이나 되지만 한 목동이 그 뒤를 따라 쫓는데 채찍을 쓰지 않고 다만 한 번 휘파람 소리를 내니 말떼들이 곧 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나갔다”는 기사는 제주의 풍속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제주는 바다 밖 수천 리 먼 곳에 있어서 왕화가 적셔지지 못하는 곳이어서 관리된 자들이 거리낄 것 없이 마음대로 착취를 하여, 제도에 없는 명분으로 백성에게 취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수많은 백성들은 이 때문에 살아갈 수가 없어서 간혹 스스로 바다에 가서 죽는 사람들도 있다”는 등 주목할 만한 기록이 많이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김상조)

비문을 쓴 임헌회(任憲晦) 는 순조11(1811)~고종13(1876). 조선 말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 아버지는 천모(天模)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익화(益和)의 딸이다.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 등의 문인이다.


1858년(철종 9)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다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전라도사․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고종1년(1864) 장령․집의․장악정(掌樂正)이 되었고,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때 만동묘(萬東廟)의 제향을 폐지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절대 부당함을 재삼 상소하여 다시 제향하게 하였다. 1874년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헌․좨주 등에 임명되었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의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연기의 숭덕사(崇德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전재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작성 041026, 보완 1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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