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제주도의 오현(五賢)을 말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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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제주도의 오현(五賢)을 말하다"(3)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5.1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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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처음으로(?) 총정리한 오현

 

▲ 오현단

4. 동계 정온(桐溪 鄭蘊, 1569∼164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 자는 휘원, 호는 동계. 진사 유명의 아들.


정온은 선조2년(1569) 안음현 역동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학문에 입문하자, 처음에는 어눌하여 잘 외우지도 못하다가 하루 종일 괴로움을 참아가며 외우려고 노력하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학문의 이치를 터득하는 모습이 꼭 "새벽 창이 점점 밝아오는 것과 같다"고 하며 기특하게 여겼다.

정온은 15세에 아버지의 스승이자 광주목사를 지낸 갈천 임훈 선생을 처음 뵈었는데, 선생은 정온을 보고 "훗날 공을 이루는 것이 과거에 급제하는 정도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고 예견했다.


정온이 24세(1592)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버지와 함께 왜란에 대비할 상소를 즉각 올렸고,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 군대를 맞아 사민(士民)을 모아 위로하였다. 29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난중이라 아버지를 급히 선영에 묻었다.

왜구들이 점점 가까이 오자 이듬해 상복을 입은 채로 어머니를 모시고 영·호남의 산중으로 피신하였고, 그 와중에도 음식을 제때 잃은 적 없게 하였으며, 잠자리를 불편하게 해 드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2년 동안을 피난 생활하며 타관객지를 떠돌았지만 아무 탈 없이 어머니를 고향으로 모셔올 수 있었던 것은 효성이 지극한 까닭이다. 평시에도 늘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경사를 읽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제민일보 110722 김유정 글)

동계 정온 종택(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동1길 13)
 

선조34년(1601)에 진사가 되고 광해군2년(161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겸설서, 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임해군 옥사에 대해서 전은설을 주장하였고, 광해군6년(1614) 3월19일(음력 2월10일)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보통 갑인봉사(甲寅封事)라고 불리는 정온의 이 상소는 조정 내외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광해군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북파들은 정온의 상소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그들은 ‘영창대군은 난신적자(亂臣賊子)이므로 누구나 죽일 수 있다. 정온은 정인홍에게 배웠지만 정인홍의 도의는 배우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정온을 유배시키라고 촉구했다.

광해군도 분노하여 전반적인 조정의 분위기가 정온을 극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돌아가는 와중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우의정 정창연, 간관인 이언영 강대진, 호남유생 송흥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온을 국문했다. 그나마 이원익 등의 비호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되어 1614년 8월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 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정월 초하루 새벽에 「자경담」을 지었고, 「망북두시(望北斗詩)」와 「망백운가(望白雲歌)」를 통해서는 애군우국(愛君憂國)을 토로하였다. 중국 옛 성현들의 명언을 모은 '덕변록'을 지어 이것으로 자신을 뒤돌아보았다.

덕변록은 위로는 은나라 말기부터 아래로는 남송까지 경사에서 뽑고 전언에서 채록하여 그 기간의 성현 중에서 곤액(困厄)과 우환 속에서도 마음이 바르고 생각이 깊어 정도를 잃지 않았던 59인을 편집한 것이다. 해배 후에 『동계집(桐溪集)』을 남겼으며 덕유산에 은거하며 『속근사록(續近思錄)』을 찬집하려 하였으나 끝마치지 못했다.

▲ 정온-용천정사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되어 사간, 이조참의, 대사간, 대제학, 이조참판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으면서 반정공신들의 비리와 견제하였다.

병권장악을 공격하였고, 폐세자와 선조의 서자 인성군 공의 옥사에 대해서 전은설을 주장하여 공신들을
인조5년(1627)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로 왕을 호종하였고, 인조14년(1636)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 등의 화의 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하려하였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조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다.


숙종 때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허목, 조경 등 기호남인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 학통 수립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광주의 현절사, 제주의 귤림서원, 함양의 남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이다.

 

 

5.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철학자·정치가이자 시인·평론가로서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 아명은 성뢰. 자는 영보. 호는 우암 또는 우재.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갑조이며, 어머니는 선산곽씨로 봉사 자방의 딸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6세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나 후에는 회덕의 송촌, 비래동, 소제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송시열 초상
1651년 작, 작가 미상, 89.7×67.3cm

27세 때 생원시에서 '일음일양지위도'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낙향하여 10여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사헌부 장령 등의 관직을 주어 부르자 그는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그가 올린 '기축 봉사' 중에서 존주 대의와 복수 설치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동향을 밀고함으로써, 송시열을 포함한 신당 일파는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재야에 머물며 은둔생활을 하였으나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고, 9월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에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 송시열 집터 증주벽립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고, 1675년 정월 덕원으로 유배되고 후에 장기, 거제로 유배되었다가 잠시 복귀하였다.


1680년대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여론이 조성되었다. 노산군을 추복하는 근거로 노산군이 세조에게 양위하였고, 세조가 노산군을 상왕으로 모신 것이며 쫓아낸 것은 아니다.

또한 단종을 죽게 한 것도 세조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세조가 사육신을 “당대에는 난신(亂臣)이나 후세에는 충신(忠臣)”이라한 것 역시 단종 복위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결국 송시열의 그와 같은 노력으로 1691년 사육신은 충절의 상징으로 복권되고 숙종20년(1694) 갑술환국 직후에는 노산군이 대군으로 승격되었다가 곧 추복되었다. 노산군은 묘호를 단종(端宗)이라 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 송시열 암각시문

숙종15년(1689) 기사환국이 일어나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남인은 그를 한성부로 압송해 국문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남인 정승인 의정부 영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이 ‘굳이 국문할 필요가 없다’면서 ‘성상께서 참작해 처리하라’고 권하자 금부도사가 만나는 곳에서 사사하라고 명한 것이다.


6월 3일 육지에 도착하자 수많은 문도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송시열은 임종 때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손을 잡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곧이어 권상하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서적과 의복을 그에게 유품으로 물려주었다. 그는 죽림촌사에서 자손들과 질손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썼다. 아래는 그 유서 내용이다.

 
   


“주자(朱子)는 음양(陰陽)·의리(義利)·백흑(白黑)을 판단하는 데 있어 용감하고도 엄격하기가 마치 한 칼로 두 조각을 내듯 하여 감히 조금도 의위(依違 마음이 확정되지 않아 이럴까 저럴까하는 것)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대학(大學)》 성의장(誠意章)의 일이다.


이러했기 때문에 그가 끝내 아성(亞聖)의 지위에 이르러 만 길이나 되는 굳은 절벽과 같은 자세로 공(功)이 만세에 미쳤으니, 도리어 자사(子思)·맹자(孟子)보다도 더 훌륭한 점이 있다. 그러나 지성으로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함이 아니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이것이 바로 《대학》에서 격물(格物)·치지(致知)를 반드시 먼저 가르친 이유이다.


대체로 선·악의 사이에 의위(依違)하는 자는 끝내 반드시 음(陰)과 리(利)와 흑(黑)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대개 인정(人情)이 이를 편안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음과 양이 있고, 일에는 의[義]와 리[利]가 있으며, 물건에는 백과 흑이 있는데,(음-양, 흑-백은《논어論語》의‘자리가 바르지 못함[席不正]’과, 《소학小學》의‘사악한 맛[邪味]’을 가리킴) 이는 일상생활 속에 늘 서로 접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경계하여라.

 

엎어진 전철(前轍)을 가까이서 보면 두려운 마음이 더욱 깊은 법이니, 너희들은 이윤(尼尹; 윤선거)을 보지 않았느냐. 흑수(黑水; 윤휴)가 주자(朱子)를 공척(攻斥)할 때에, 윤선거가 처음에는 대체로 이리저리 망설이다가 끝내 그와 심신(心神)이 융회(融會)되어 겉으로는 배억(排抑)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그를 도와 세력을 이루어서 마침내는 큰 화(禍)가 하늘에 창일하고 가국(家國)이 패망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물리치되 죽도록 미워하기를 마치 원수처럼 여기는 데에 이르렀던 것이다. 처음에는 털끝만큼의 어긋난 것도 나중에는 천리 거리만큼 어긋나게 되는 것인데,

더구나 처음부터 크게 어긋난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그 사람[渠 윤선거]인들 종말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찌 알았겠느냐. 애석하기 그지없다.


나는 변변치 못한 하찮은 사람으로 망녕되이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배척한 일을 본받아,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누구든지 그를 죄줄 수 있다는 교훈을 독실히 믿은(篤信)한 소치로 결국 유배되는 참사(慘事)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대체로 흑수(黑水)는 ‘공자(孔子)의 이름도 못 부를 것(諱)이 없다.’ 하였고, 주자를 공척하는 것을 사업(事業)으로 삼았으며, "자식으로서도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있다" 하여 성모(聖母; 현종顯宗의 비妃이며 숙종肅宗의 어머니인 명성왕후明聖王后)를 헐뜯고 공격(侵毁)하였다.

그 여파가 서로 서로 이어져 마침내는 공자를 조롱하고 업신여긴[譏侮] 말을 시제(試題)로 삼아 대성전(大成殿) 아래 내거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효묘(孝廟)의 세실(世室)을 너무 빨리 작성했다고 칭탁하여 기의(譏議)를 하였고, 성모(聖母)도 재차 비방을 입어 선인(宣仁)의 화(禍)가 있게 되었으며, 양현(兩賢;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성무(聖廡; 문묘文廟)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은 성모를 높여 두둔하다가 끝내 죽임을 당하였고, 타우(打愚, 이상李翔)는, 흑수(黑水)가 윤이흠(尹以欽)의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 것을 분개하게 여기다가 방금 투옥(投獄)되었다.

그리고 광해군(光海君)의 폐모(廢母)를 극력 찬성했던 자는 은혜를 입어 방환(放還)되었고, 그리고 감히 말하지 못할 대사(大事)는 또한 차마 말할 수가 없다.

내가 진정 이때에 죽었더라면 이것이 욕(辱)이 될지, 당연한 일이었을지는 모르겠다. 주자가 선성(先聖, 공자)의 소상(塑像)이 허리가 끊기고,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도학(道學)이 금제(禁制)를 받는 때를 당했을 적에, 주자를 베 죽이자는 소장(疏章)이 끝내 한탁주(당시의 권력자, 주희를 탄압함)의 무리에게서 나왔고, 조자직(趙子直; 송宋의 재상 조여우趙汝愚)·여자약(呂子約; 여조검呂祖儉)·채계통(蔡季通, 채원정蔡元定; 이상 둘은 주희의 친구) 등 제현(諸賢)이 서로 이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도, 주자 문인(門人) 중에는 혹 안면(顔面)을 바꾸어 (한탁주 편에 붙어) 과거(科擧)를 보기도 하였다.

 

어떤 이가 주자에게 화를 당하지 말고 남몰래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우회적으로 충고(諷諫)하자, 주자가, "내가 만일 만 길이나 되는 절벽처럼 굳게 서 있다면 어찌 우리 도(道)를 빛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또 우돈장(遇遯章; 한탁주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문)을 지었는데, (길흉을 점쳐 보고, 죽을까 두려워) 비록 이 글을 상소하지는 못하였지만 오히려 (짓고 나니) "가슴 속이 후련하다." 하였으니, 결코 후회하지 않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대체로 주자의 학문은 이치를 궁구하고 심성(心性)을 존양(存養)하여 이를 몸으로 실천해서 확충(擴充)시키는 것을 주(主)로 삼고, 공경[敬]으로써 시종(始終)을 통관(通貫)하는 공(功)으로 삼았던바, 임종시(臨終時)에 이르러 문인(門人)에게 진결(眞訣)을 주었으니, 즉 "천지(天地)가 만물(萬物)을 내는 것과 성인(聖人)이 만사(萬事)에 대응하는 것은 곧음[直]뿐이다." 하였고, 다음날 문인이 또 청(請)했을 때는, "도리(道理)가 다만 이러할 뿐이니, 모름지기 괴로움을 극복하고 굳게 지켜야 한다."하였다.

대체로 공자는, "사람이 사는 것은 곧음뿐인데, 곧지 못하게 사는 것은 요행히 재앙을 면한 것일 뿐이다." 하였는데, 맹자가 호연(浩然)의 기(氣)를 기른 것도 다만 이 직(直) 한 글자뿐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자·맹자·주자 세 성인이 똑같은 법칙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글을 읽어서 이치에 밝지 못하면 곧지 못한 것을 곧게 여기는 자도 있는 것이다. 우리 사문(師門)의 교훈은 이러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 선덕(先德 조상의 덕)으로 말하자면, 유씨(柳氏) 할머니가 어린 시절 굳은 절행(節行)을 지킨 일과, 쌍청부군(雙淸府君, 송유宋愉)이 자취를 감추고 은둔한 일과, 서부부군(西阜府君, 송귀수宋龜壽)이 금조(禽鳥) 같은 미물을 감동시킨 효성과, 문충공(文忠公)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 선생이 목숨을 버리고 충성을 다한 것과, 이씨(李氏) 할머니가 얼첩(孽妾)을 사절한 일과, 습정(習靜, 송방조宋邦祚) 선생이 간흉(奸兇)한 무리를 척절(斥絶)하다가 비명횡사한 일과, 나의 선부군(先府君)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 선생이 몸을 돌보지 않고 절개를 세워 포전(褒典)이 빛난 것과, 충현공(忠顯公) 야은(野隱, 송시영宋時榮)이 대의(大義)를 부식(扶植)하여 백세를 용동시킨 일 등은 모두가 주문(朱門; 주자의 문하)의 정법(正法)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아, 너희들은 힘써야 한다. 법도(法度)를 가까운 데서 보면 공(功)을 거두기가 쉬운 것이니, 너희들이 모름지기 가까이는 선덕(先德)을 지키고 멀리는 주문(朱門)을 본받는다면, 나는 죽더라도 저승에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숭정(崇禎) 기사년(1689, 숙종15) 6월 3일에 선암(仙巖)의 죽림촌사(竹林村舍)에서 쓰다.


송시열은 역적이 아니라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명으로 사형을 당했고 그것도 국문을 당하기 위해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정읍에서 서둘러 사약을 내린 점이 상당히 특이한 죽음이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솔직담백하였고,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이후 5년만인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1694년 수원(水原), 정읍(井邑), 충주(忠州) 등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 뒤 문정(文正)의 시호를 내렸다. 1697년 송시열, 송상민, 권상하의 위패를 모신 남간사를 건립했다.

서인 정권 하에서 1744년 영조(英祖)에 의해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세손 시절부터 그를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효종(孝宗)의 묘정에 추향(追享)되었다.

또한 정조는 그를 공자, 맹자, 순자, 한비자, 주자에 버금가는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추대하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였다. 영조32년(1756) 2월 왕명으로 증(贈)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해 송준길과 함께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후일 송시열을 높이 평가한 정조가 친히 편찬한 앙현전심록에서 정조는 송시열을 마침내 주자에 비견될만한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송시열을 비난하는 것은 공자와 맹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못박아 그에 대한 비판을 금지했다.

1863년 이전까지 송시열의 주장에 공식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후 송시열의 제자와 문도들은 송시열을 송자(宋子)라 부르며 공식화했지만 영남의 남인들은 이의를 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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