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제주도의 오현(五賢)을 말하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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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제주도의 오현(五賢)을 말하다"(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5.1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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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처음으로(?) 총정리한 오현

 

 

5. 오현에 제주 출신은 왜 없는가?


제주에 서원을 만들면서 왜 제주 출신 학자를 한 사람도 배향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은 제주의 귤림서원은 엄밀히 말해 조선시대 육지에서 만들어졌던 서원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귤림서원을 만든 주체가 사림(=私立)이 아니라 국가(=官立)였기 때문이다.


원래 서원이 번창하려면 몇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는 서원을 운영할 만한 경제적 기반이다. 어느 개인 또는 집단이 상당한 규모의 재정적 뒷받침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제주도에는 그럴 만한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둘째는 학문적으로 성숙된 사림집단이 있어야 한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에 대항해서 ‘우리 고장에도 너만큼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는 자존심을 세울 수 있을 만한 학자들이 있어야 하는데 제주도에는 사림이라 부를 만한 학자 집단이 없었다. 다만, 제주도에서는 고득종, 김진용 등 훌륭한 학자(또는 관리)로 추앙되는 인물을 향현이라 하여 향현사에 모셨다.


지방의 이름난 학자, 충신 등의 공적과 덕행(德行)을 추모하기 위하여 집을 세우고 제사지내는 사당(祠堂)으로 향현사가 있었다. 중종 이후로는 서원과 같이 붕당 조직의 발생지로 변하여 폐단을 일으켰으므로 인종, 효종 때는 함부로 세우지 못하도록 하였다.


제주 향현사는 憲宗9년(1843)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가 건립하여 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 선생을 배향하여 제사 지내게 했다. 純祖31년(1831) 목사 이예연(李禮延)이 김진용(金晋鎔) 선생을 영혜사(永惠祠)에 배향하였다가, 憲宗15년(1849)에 목사 장인식(張寅植)이 김진용 선생을 향현사로 옮겨 병향(竝享)하였다.

고종8년(1871) 대원군이 서원·사우(書院祠宇) 대동철폐령에 의하여 철사된 후 제주 유생들이 두 분 선생의 덕행과 공적이 후세에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향현사 유허비를 세우고 임시로 제향하였었다. 2007년 3월 제주시가 장수당(藏修堂)과 향현사를 복원하였다.

 

6. 오현 관련 유적

 

 

① 이도1동 오현단(제주도 기념물 제1호)

오현단 조두석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421번지
1871년 전국의 서원을 철폐할 때 귤림서원도 철폐되었으나 고종29년(1892) 김희정(金羲正) 등 제주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기리고자 조두석(俎豆石)을 세우고 제단을 축조하여 제사를 지내었다. 그래서 오현단에는 지금도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높이 43-45cm, 너비 21-23cm, 두께 14-16cm)이 각자(刻字)없이 배열되어 있다.

 


② 이도1동 冲菴金先生謫廬遺墟碑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21-1 오현단 안

충암김선생적려유허비
조선 중기 제주에 유배되었던 김정(金淨)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충암 김선생 적려유허비는 김정의 사후 3백여 년 뒤인 1852년에 세운 것으로, 제주에서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는 귤림서원 묘정비(1850)가 세워진 뒤이다.


충암 김선생 적려유허비는 비신이 동강나서 아래쪽은 유실된 상태이다. 이 때문에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지만, 전면의 너비가 73㎝, 두께가 23㎝인 점을 고려하면 전체 높이는 200㎝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각은 오래 전에 사라졌고, 지금은 비신마저 훼손되어 그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비명도 하부의 것은 알 수 없게 되었다.


전면에는 '충암김선생적려유허비(冲菴金先生謫廬遺墟碑)'라고 쓰여 있고, 후면에는 유실된 글자가 많아 정확한 뜻을 해독하기는 어려우나, 당시 목사로 재직하던 백희수가 1852년 11월에 김정이 살았던 집터에 유허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글을 쓴 사람은 판관 임백연이다. (城東南隅 嘉樂川之邊 有井曰判書井 卽(先生) 謫居之遺墟也 井則有碣 墟則無碑 歲月(玆久 廬)有遺躅之湮沒 命院儒姜埼奭幹事 伐石(而竪 連)閣而庇 以寓慕賢之意 噫 先生之名德(事實 畧) 載於萬曆[代]戊寅立廟[記] 今不贅擧云爾 上之三年壬子十一月日 牧使白希洙識 判官任百淵書)


적려유허비를 세운 경위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79년 9월 26일 제주도에서 새로 세운 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이 비는 충암 선생이 적거했던 제주시 일도2동 가락천 동쪽에 세웠던 것으로, 그 후 비신 하부가 파손된 상태로 1백여 미터 거리인 이곳에 옮겼던 것을, 이번 선생의 16대 종손 김원식(金元植), 13대손 김병모(金秉模)와 김기봉(金基鳳) 등 여러 후손의 추진으로 다시 복원하여 세우게 된 것이다. 1979년 9월 26일, 제주도”


그가 배향된 건 선조11년(1578) 제주판관 조인후에 의해서였다. 여기서 선조 때라는 점이 주목된다. 서원은 사림이 처음 중앙정계에 진출하던 중종 때부터 건립되기 시작해서 그들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던 선조 때에 와서 본격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오현 중 첫 번째 인물인 김정의 사당이 만들어진 게 바로 그 때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이영권)

 

③ 보성리 동계정온유허비
위치 : 대정읍 보성리 1629-1번지(대정읍 추사로55번길6-1)


정온이 유배되었던 제주도 대정현은 조선왕조가 절도유배지(絶島流配地)로 지정한 6개 지역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었다. 광해군4년(1612) 기사를 보면 제주, 정의, 대정, 진도, 거제, 남해가 절도유배지로 이용되고 있음을 밝히고 이외에는 절도유배지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정온의 유배생활에 대해서는 그가 남긴 ‘대정현 동문 안에 위리된 내력을 적은 기문(大靜縣東門內圍籬記)’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라산 한 줄기가 남쪽으로 1백여 리를 뻗어가서 둘로 나뉘어 동·서의 양 산록이 되었는데, 동쪽에는 산방악과 파고미악이 있고, 서쪽에는 가시악과 모슬포악이 있다. 곧장 남쪽으로 가서 바다에 이르면 송악산, 가파도, 마라도가 늘어서 있는데 모두 우뚝 솟아 매우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파고가 용의 형상이라면 가시는 호랑이 형상이다. 황모가 들에 가득하고 바다에서 10리쯤 떨어진 거리에 외딴 성으로 둘러싸인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대정현이다.”


정온은 제주도 대정현에서 거처했던 곳의 위치와 위리안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동계정선생적려유허비


“현에는 객사가 있고 그 객사의 동쪽이자 성의 동문 안에서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수십 보쯤 떨어진 위치에 울타리를 둘러친 데가 바로 내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곳은 전에는 민가였는데,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태수가 이 집을 비워 두도록 했다가 나를 거처하게 한 것이다.

북쪽, 동쪽, 남쪽 3면은 모두 처마에 닿아서 하늘을 전혀 볼 수가 없고 서쪽에서만 볼 수 있으니, 마치 우물 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울타리 안에 동쪽과 서쪽은 항상 한 자 남짓 여유가 있고 남쪽과 북쪽은 3분의 2가 되는데 남쪽을 향해 판자문을 만들어 놓았다.

서쪽 옆에는 작은 구멍을 만들어 두었는데 음식을 넣어 주기 위한 것이다. 둘러쳐 놓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올 때에 금오랑이 관대를 갖추고 교상에 기대어 문밖에 앉아서 나장으로 하여금 나를 잡아서 안으로 들여 넣게 하고 그 문을 닫아 봉함하였다. 울타리 서쪽에 작은 사립문을 만들었는데, 대개 그 전례가 그러하다.”


이 비는 1842년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가 정온의 적소였던 막은골에 세운 것이다. 동계 정온이 제주를 다녀간 지 약 200년 후 제주에 유배되었던 추사 김정희는 병자호란 당시 정온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비를 세울 것을 당시 자신과 친분을 유지했던 제주목사 이원조에게 건의하는 형식으로 동계정온비를 건립하게 한 것이다. 다음 해에는 송죽사(松竹祠)를 건립하여 정온의 넋을 기렸다. 송죽사의 현판은 추사가 썼다고 한다.(카페 경산유림문화연구소, 제주일보 110726 양진건 글)


전면에는 '桐溪鄭先生遺墟碑'(동계정선생유허비)라 새겨져 있으며 비신의 높이는 120cm, 너비 61cm, 두께 18cm이다. 좌측면에는 '看役接生 姜瑞瑚 柳宗儉'(간역접생 강서호 유종검), 뒷면에는 '先生謫廬遺墟在大靜之東城夫知縣宗仁因其址闢書齋 居儒士夫土人爲政而知所先後可嘉也余 州首謁 先生于橘林祠修邑誌得 先生一律詩一跋文表而載之又命工竪石於其墟鳴呼先生德義名節與天地竝立齋之謫生能知愛護玆石於爲士也無愧余於 先生外裔也慕 先生公耳何敢私 崇禎後四壬寅星州李源祚 謹書' 우측면에는 '監董 前 同知 李仁觀 別監 金鼎洽'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숙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현종9년(1668)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배향하였으며, 이외에도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1963년 대정 지역 칠성계가 중심이 되어 정온의 비석을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에 있는 보성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겼다가, 1977년에는 보성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옮겼다. 정온의 생가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산리 50-1번지에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고, 유품은 중요민속자료 제218호로 지정되어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양진건, 제주일보 110726 양진건 글)

 

 

④ 이도1동 송시열유허비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421번지.


나이 83세에 제주도로 유배된 송시열은 약 100여 일 동안 산짓골 윤계득(尹繼得)의 집을 적소로 정하여 생활하였다. 지금의 일도1동 1317번지이다.


유허비는 작은 해서체로 뒷면 가득 써 있었겠지만 40% 정도의 글자는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마멸되었다. 원래 비문은 다음과 같다.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
尤庵宋先生謫廬遺墟碑


嗚呼惟此濟州東城內山底洞卽尤庵宋先生荐棘遺墟也先生以己巳三月入來纔踰月被逮而去受後命於中途遺墟始以州吏金煥心之家火于甲辰今已煙廢爲田辛卯春權公震癒疎陳先生志事安置大靜旣蒙宥從州人士訪遺墟而得之歎曰已先生盛德大業未及百年遺躅己難尋豈非士林之羞乎遂議于三邑章甫立短碑以識之牧使梁候世絢助成焉故老相傳先生存棘中無所事惟取州校經籍以讀嘗出行槖果脯具酒爲文使其疇錫祭橘林祠一日扶杖而循庭手自種薑於隙地此皆可備故事故附記焉崇禎三壬辰二月日後學金亮行識李克生書


오호라, 제주의 동쪽 성안 산지골은 우암선생께서 귀양살이하던 옛터이다. 선생께서는 기사년(숙종 15 ; 1689) 3월에 오셔서 달을 넘겨 체포되어 가는 도중 다음의 어명을 받았다. 이 터는 고을 아전인 김환심(金煥心)의 집이었는데 갑진년에 불에 타고 지금은 밭이 되어 있다. 신묘년 봄에 권진유(權震癒)공이 선생에 대한 일을 상소하였다가 대정현에 안치되었다. 귀양이 풀린 다음 고을 선비들과 옛터를 찾아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선생의 성대한 도덕과 위대한 업적으로써도 백년이 채 못 되어 그 자취를 찾기가 어려우니 사림의 부끄러움이 아닌가 하므로 삼읍의 선비들이 의논하여 짧은 비석을 세워 표시함에 목사 양세현 사도가 도움을 주었다. 옛어른들이 이르기를 선생께서 귀양살이를 할 때다른 일은 별로 없었고, 고을 향교의 경적을 가져다 읽었다. 떠나올 때에 과일․포․술을 갖추어 와서 축문을 지어 손자인 주석(疇錫)을 시켜 귤림사에 제사를 올렸다. 하루는 지팡이를 들고 (귤림서원의) 뜰을 둘러보고 빈 땅에 손수 생강을 심었다. 이 모두가 옛일을 갖추려 한 일이므로 부기한다. 숭정기원뒤 3번째 임진년(영조48, 1772) 2월 일 후학 김량행이 짓고 이극생이 쓰다.(제주향교지 581〜582)

 


⑤ 이도1동 증주벽립마애명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421-3번지(오현길 61) 오현단 경내


오현단 조두석 서쪽에 암벽이 있고 그 암벽에 曾朱壁立이란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왼쪽에는 작은 글자로 後學蔡東健 後學洪敬燮 崇禎四丙辰 摹刻이라고 새겼다. '曾朱壁立은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는 것처럼 내가 학습을 해야 한다' 또는 '증자와 주자의 사상을 벽에 새겨 세운다' 등의 뜻이다. 채동건은 당시 제주목사이고 홍경섭은 제주판관이다.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데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조선 선비들은 청나라 연호를 기피하고 숭정 후 몇 甲子라는 식으로 명나라 연호를 쓰려고 하였다. 명나라는 중화이고 청나라는 오랑캐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숭정 후에 네 번째 돌아온 병진년이라는 뜻이므로 1856년이다. 마지막 글자 摹刻은 본떠서 새겼다는 뜻이다.

 

증주벽립

원래 송시열이 쓴 증주벽립 마애는 서울 명륜동1가 2-22의 골목길(성균관로 17길)에 있다. 성균관대학교 인근 우암 송시열이 살았던 집터로서 통칭 송시열 경저(京邸)였던 곳이다. 송시열은 충청도 옥천 출생으로 뒤에 회덕 등에서 살았고 만년에는 괴산 화양동에 머물렀다. 따라서 서울에는 오래 거주하지 않았는데 임금의 부름을 받거나 벼슬살이를 할 때에는 서울 흥덕동 성균관 부근인 숭교방(崇敎坊)에 거처하였다. 『漢京識略』(한경지략)과 『東國輿地備考』(동국여지비고)에는 〈우암의 옛집이 송동에 있는데 석벽에 우암 글씨로 曾朱壁立(증부벽립)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 있는 글자를 제주 출신 변성우(邊聖雨)가 1786년 성균관 직강((成均直講)으로 있을 때 탁본해 온 것을 채동건 목사와 홍경섭 판관 때인 철종7년(1856) 오현단 서쪽 암벽에 옮겨 새겼다.

 

 

⑥ 장수당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421-3번지(오현길 61) 오현단 경내


장수당은 현종1년(1660) 제주목사 이괴가 진사 김진용의 건의로 세종 때 한성관윤을 지낸 고득종의 옛 터에 세웠던 10칸의 강당이다. 이괴 목사의 장수당기나 대제학 조경의 장수당기에는 목재를 구하고 역부를 고용하는 것까지 일체의 공사를 말아 장수당을 지은 김진용의 업적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제주장수당기(濟州藏修堂記) ; 현종2년(1661)에 제주목사 이괴(李襘)의 부탁으로 조경(趙絅)이 쓴 것이다.
〈탐라는 남쪽 바다에 있는데 땅이 사방 4백 리이고 예속된 현이 둘이니, 하나의 작은 제후국이라 할 만하다. 우리 헌묘(獻廟 태종(太宗)) 때에 성주(星主)가 참람된 작호를 고치고 국내에 편입되기를 청한 일로 인해 마침내 강등하여 주(州)로 삼고 관리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관할하는 지역이 넓은 것이나 주거하는 백성이 많은 것이나 땅과 바다의 물산이 풍부한 것이나 체통이 존귀한 것이 다른 주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다만 거대한 파도가 치는 수천 리의 험난한 길을 무릅써야 하기 때문에 그 곳의 목사가 된 자들은 모두 실망하고 두려워하며 조심하고 위축되어 마치 살아날 수 없을 듯이 여긴다. 그러다 임지에 도착해서는 연회를 벌이고 오락을 즐기지 않으면 가렴주구를 일삼으니, 이 때문에 제주의 백성이 문명의 교화를 입지 못한 지 오래이다.


효종 9년(1658)에 연성(延城) 이후(李侯)가 제주 목사가 되었다. 이후는 아침에 명을 받고 저녁에 출발하면서 난색을 표하는 기미가 없었다. 이때 이후는 막 전직에서 해임되어 돌아온 터라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지도 않았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훌륭하게 여기며,
“동서남북 어디든 오직 명을 좇는다고 하였는데, 이후가 바로 그 사람이구나!”
하였다. 이후가 바다를 건넌 지 3년이 넘어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했다.


“제가 비록 노둔한 사람이지만 서울을 떠나던 날에 삼가 성상의 하교를 읽어 보니 학교를 일으키는 것이 가장 으뜸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그 말씀을 깊이 새기고 있었습니다. 처음 정무를 볼 때에 문무 속관과 두 현의 현감과 교수와 원로들과 선비들이 모두 자리에 있었는데, 제가 마침내 말하기를, ‘학교는 왕정의 근본이다.

내가 왕명을 받아 이 땅을 다스리는데, 만일 정사의 근본을 생각하여 진작하지 않는다면 그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내가 보니 이 주의 백성들은 치아가 가지런하고 광대뼈가 나왔으며 입술이 두툼하고 흰 피부에 키가 큰 것이 서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드문데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은 어찌 그리 적은가. 어업과 상업의 이익을 취하는 데에 빠져서 진작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발로 쇠뇌를 당기고 손으로 활을 당기는 무술에 종사하여 빨리 이루고 학문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주를 다스리는 자가 과거에 힘쓰도록 널리 장려하는 도리를 잃은 것인가.’ 하였습니다.


좌중에 진사 김진용(金晉鎔)이 일어나 대답하기를, ‘합하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저는 꺼리거나 피할 줄 모르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주가 비록 궁벽하지만 한라산이 진산(鎭山)으로 자리하고 옥빛 바다에 둘러싸여 오색구름과 상서로운 기운의 다섯 가지 색채가 어우러집니다. 여기서 생산되는 단사(丹砂), 석영(石英), 귤, 유자, 진귀한 나무와 준마 등 어느 한 가지도 다른 주에서 당해낼 수 없는데, 유독 인재를 배출하는 것만 특산물만 못하단 말입니까.

옛날 고씨(高氏) 부자와 형제는 여러 대에 걸쳐 문학으로 이름과 지위가 빛났습니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이유의(李由義)와 최산해(崔山海)가 학교를 세우고 학풍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도지개 옆에는 굽은 나무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후에는 그렇지 않아서 수령들은 대부분 억세고 가혹한 무관들이었고, 열에 하나 문관이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제주 사람들을 경시하여 무(武)를 우선할 뿐 문(文)을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천행으로 은혜로이 합하께서 탄식하며 학문을 일으키려 하시니 참으로 개미들이 쉼 없이 배울 때입니다.

하지만 선비를 기르고자 하면 학사(學舍)가 없어서는 안 되고, 학사를 세우고자 하면 좋은 장소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향교 서쪽 과수원 동쪽에 땅이 있는데 고(故) 판윤 고득종(高得宗)의 유지(遺址)입니다. 고씨 종족은 영달한 기회를 이용하여 모두 꾀꼬리처럼 높은 나무로 옮겨가고 그 터는 빈터가 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저는 기뻐서 마침내 김진용을 데리고서 그 터에 갔습니다. 그 터는 한라산의 정맥을 차지하고 있는데 지대가 높고 건조하며 넓고 밝았습니다. 그윽한 곳에 자리잡았지만 지세가 높고, 성에 이웃해 있지만 경내가 고요하며, 북쪽으로는 큰 골짜기를 마주하였는데 물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습니다. 학자가 물결을 관찰한다면 이곳을 놔두고 어디로 가겠으며, 동재와 서재를 짓는다면 어느 곳이 이보다 낫겠습니까.


그리하여 학사의 건축을 계획하고 김진용에게 그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재목은 산림을 벌목하고 바다에 띄워 가져다 썼고, 기와는 이지러지지 않는 것을 사용하였으며, 일꾼은 일이 없는 사람을 고용해서 썼고, 흙벽을 바르는 일은 미장이들이 자기 일처럼 와주었습니다.

공사가 한 달을 넘기지 않아 대들보며 용마루며 지도리며 말뚝 등이 각각 제자리를 찾아 건물이 우뚝하게 눈앞에 세워져 시원스레 공부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공사가 끝나고서 나는 외람되이 학사의 이름을 ‘장수당(藏修堂)’이라고 지었습니다. 이것은 《예기》의 ‘생각하고 익히고 놀고 쉰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제주의 인사들이 학생과 선비를 막론하고 아래로 이장과 노인과 농민들까지 모두 감탄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들이 백 년 동안 들어보지 못한 성대한 일입니다. 아마도 위에서 성인이 나와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교화를 안팎의 구분 없이 넓히자 우리 사또께서 계승하여 베푸셨기 때문인가 봅니다.’ 하였습니다. 저는 제주 사람들이 성인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또 강회(講會) 자리를 열어 세 읍의 향교 유생들에게 책을 들고 강에 응하게 하여 그 중 뛰어난 사람을 뽑아 스무 명을 얻었고, 또 가르칠 만한 어린 학생을 열여섯 명을 선발하였습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제가 반드시 의관을 차려 입고 유생들의 강연을 듣고서 잘하는지 잘못하는지 가늠하여 권면하니, 사람들은 각자 스스로 면려하고 노력하여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 년이 되지 않아 경서를 배송(背誦)하는 자들이 열 중 예닐곱이 되었습니다. 제가 또 사서삼경, 《소학》과 《통감》 책을 혹은 열 질, 혹은 아홉 질, 혹은 네 질을 마련하니 독서하는 자들이 책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또 공부하는 사람들이 닷 되의 밥을 먹으며 오래 굶주리면서도 만족했던 윤문(尹文)처럼 할 수 없는 것이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전(本錢)인 늠미(廩米)를 마련하기로 의논하여 관에 저장된 수백 섬의 곡식을 떼어 공부하는 양식으로 충당하고, 거룻배 큰 것 1척을 빼내서 학사(學舍)로 이적하여 이를 운용하여 부족분을 메우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또 이것이 오랫동안 이어나가기를 도모하기에 부족할까 염려하여 쓰지 않는 군량 3백 곡(斛)을 나누어 공부하는 학생들을 넉넉하게 해줄 것을 건의하였는데 상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얼마 후 임기가 만료되어 제주를 떠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김진용 등이 제가 일을 하고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떠난다고 생각해서 모두 입을 모아 말하기를, ‘문옹(文翁)이 촉(蜀) 지역을 유학의 교화로 다스리자 촉 땅이 변하여 문헌의 고장이 되었다고 하고, 유자후(柳子厚)가 유주(柳州)의 자사(刺史)가 되어 손가락으로 써가며 문장을 가르치자 형양(衡陽)과 상수(湘水) 지역에서 진사에 합격한 사람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능히 지방의 풍속을 변화시켰다는 명성은 지금까지 사적에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사또께서는 학교를 세워 학문을 진작시키고 돈과 곡식을 넉넉히 하여 한미한 선비를 길렀습니다. 그밖의 정사는 사또를 앞에 두고 이루 다 칭송할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사양하며 감히 칭찬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내 정사가 어찌 옛 사람에게 미치겠는가.’ 하니, 김진용 등이 또 말하기를, ‘장수당의 현판을 어찌 글도 없이 지금 사람과 후세 사람에게 보이겠습니까. 합하께서 한 말씀 남겨주시면 매우 좋겠습니다.

만일 친부가 자식의 중매가 되는 것과 같은 일이라 혐의쩍어 하신다면 서울에 사람을 보내 옛것을 독실하게 좋아하고 문장을 잘하시는 분에게 부탁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감히 여러 사람의 뜻을 꺾을 수 없어 편지를 보내 집사를 번거롭게 하니, 집사께서는 저와 평소에 알고 지낸 사이이고, 또 이 일이 어찌 개인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실로 바닷가 먼 지방에 성상의 교화를 펴는 것이니 군자가 말하기 즐거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집사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오.”


아, 나는 손에서 글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백성을 교화하고 좋은 풍속을 이루었다는 말에 감격하였다. 언제나 가슴속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기에 마침내 보잘것없는 말로 다음과 같이 부탁에 답한다.


젊었을 적에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를 읽었는데, 제주의 풍속이 순박하고 검소하며 예의와 겸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예의와 겸양은 참으로 유가의 도와 일맥상통하며, 검소함은 단릉씨(丹陵氏 요(堯) 임금)의 유풍이 아닌가. 제주가 특별히 바다 밖에 있어 아득히 세상과 서로 소통하지 않아 혼돈(混沌)이 아직 열리지 않고 소박함이 흩어지지 않아 그러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누가 ‘기자(箕子)의 어진 교화가 다만 서쪽에만 입혀지고 동쪽으로 전해지지 않았다.’고 하였던가.

더구나 우리나라 성스러운 임금들께서 계승한 덕이 해외까지 미친 것이 지금까지 거의 삼백 년이다. 제주의 백성 중에 한 명이라도 교화에 복종하지 않은 자가 있는가. 부리기 쉬운 백성이라고 이를 만하니, 지금 사또께서 제주를 다스린 것은 진실로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다. 제주의 유생이 눈과 귀를 한 번 새롭게 하여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얻은 것처럼 시서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는 일은 사또께서 학교를 중시하신 데서 시작되리니, 그 공이 어찌 백성을 기르고 풍속을 변화시키는 정도에 그치겠는가.


사또의 이름은 회(禬)이고 자는 자정(子正)으로, 삼사(三司)를 거치고 지방관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는데 모두 반드시 치적을 세웠다. 김진용은 조덕(趙德)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 도리상 이름을 써주는 것이 마땅하다. 숭정대부원임 행이조판서겸 대제학(崇政大夫原任 行吏曹判書兼大提學) 한양 조경(漢陽 趙絅〉(龍洲遺稿)


조경(趙絅)은 이 글에서 이괴를 한유(韓愈)에 김진용(金晋鎔)을 조덕(趙德)에 비유하여 기리고 있으며, 후에 조경은 정온(鄭蘊)의 묘지명(墓地銘)도 썼다.


이괴 목사가 쓴 장수당기도 전한다.


〈지난 무술년(효종9년=1658) 봄 제주목이 비자 효종대왕께서는 해외의 창생이 조정의 은택을 입지 못할 것을 깊이 염려하시고, 대신들에게 문관 중에서 택하여 천거하라고 명하시자 대신들은 신(臣) 괴(襘)에게 명을 받도록 하였다.


나는 같은 해 4월에 고을에 도착하여 성화(聖化)를 선양하려면 흥학(興學)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우선 3읍의 교생을 모아 고강(考講)하였다. 손수 농사를 짓는 여가를 틈타 사서(四書)와 소학(小學)을 배워서 음독과 훈석에 통하는 자가 많았는데 그 글 읽는 소리가 맑고 명랑하여 기질이 밝고 뛰어난 자 20명을 뽑아 관에서 책과 양식을 지급하고, 향교 곁에 초가 6칸을 지어서 이들이 머물도록 하였다. 또 일찍이 경서를 읽은 잘르 선발하여 훈장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였다. 나 또한 매월 삭망(朔望)에 직접 그들과 강론하고 그 능부(能否)를 상벌(賞罰)하였더니,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분기하여 위태로운 흉년에도 대단한 병고(病故)가 없으면 감히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이와 같이 한 지 2년이 되자 20명 가운데 혹자는 사서일경을 읽고, 혹자는 사서이경을 읽는가 하면, 혹자는 사서삼경을 익히 암송하니, 비록 양남(경상도와 전라도)의 선비로서 평소 문학에 종사한 자라 하더라도 이들보다 더 잘할 것이 없었다. 토민인 진사 김진용은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식년시(式年試)에 경전(經典)을 강론하여 연획(連劃)을 받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기꺼이 벼슬하지 않고 병을 핑계로 스스로 세상을 물리치며 산야에 숨어사는 자이다. 그는 옛사람들의 글을 많이 읽었으므로 임명하여 좌수(座首)로 삼았다.


내 임기가 만료되어갈 때 김진용이 내게 일러주기를 ‘사또께서는 부임한 이래로 재생(齋生)을 불러모아 공부를 권함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셨으며 제생(諸生)들 또한 좇아 교화되어 힘써 배워서 문학이 크게 변했으니 덕을 입음이 큽니다. 그러나 단지 이와 같이 해 놓기만 하고 떠나 버리신다면 제생들은 다시 의지할 곳이 없어 모두가 배움을 포기하고 돌아가 농사를 짓게 될 것이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자 진용이 말하기를 ‘성 남쪽에 폐허가 된 집터 하나가 있는데 곧 옛 판윤 고득종이 살던 터입니다. 고판윤의 두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헌달하였기에 평소 명당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만약 이곳에 몇 칸의 집을 지어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고 얼마간의 책과 양식을 마련해 주면 영세불후의 성대한 일이 될 것입니다’고 일러 주었다. 마침내 진용과 함께 가서 살펴보니, 한라산의 정맥이 넘고 빗기며 북으로 달리다가 엉기어 하나의 언덕을 이루었는데 앞에는 대해(大海)를 맞아 좌우로 품고 있어 명당이라 일컫는 것도 과연 빈말이 아니었다.

이에 장인을 부르고 재목을 모아 학사 11칸을 짓고 장수지당(藏修之堂)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동몽 15인을 더 뽑아서 앞서의 20명에 더하니 35명이 되었다.


또 본주에는 적곡 3분모가 있는 외에 또 300곡의 모곡을 모아 기록하는 일이 있으니 다른 고을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 연유를 갖추어 감해 줄 것을 계문(啓聞)하여 거학(巨學)하는 양식으로 삼았다. 또 부족할 것이 염려되어 콩 150곡, 밭벼 50곡, 보리 50곡, 목면 2동을 변통하여 지급하고, 배 1척을 정기적으로 지급하여 육지에 나아가 계속하여 양식을 사 옮기게 하되 유사 2명을 뽑아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창시의 본말을 간략하게 기록한다. 경자년(현종1년=1660) 4월 목사 이괴가 기록하다.(연안이씨삼척공파 보학교실 카페)

 

장수당과 오현오각비

그리고 진사(進士) 김진용을 교수로 삼고 떠났다. 이후 이괴는 귤림서원 곁에 이약동 목사와 함께 1669년(현종 10)에 목사 이인이 창건한 영혜사(永惠祠)에 배향되었다. 이후 영혜사에는 순조19년(1819)에 목사 조의진이 유림의 장계에 의하여 이형상ㆍ김정(金)을 뒤이어 배향하고, 순조31년(1831)에 목사 이예연이 유림의 장계에 의하여 김진용(金晋鎔)을 추가 배향하였다.


한편 영혜사는 처음에는 편액이 없다가 헌종7년(1841)에 목사 이원조가 상현(象賢)이라 이름을 붙였고, 헌조14년(1848)에 목사 장인식이 영혜(永惠)라 이름을 고쳐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영혜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제액하였다고 전한다. 후에 이예연 임형수를 추가 배향하였다가 고종8년(1871)에 철폐되었다.(제이누리 2013.01.21.)


장수당은 제주의 사재(四齋)중 하나로 그 중 으뜸이었으며, 귤림서원의 학관으로서 300년 동안 제주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이 장수당의 옛터에 고종12년(1875) 이희충(李熙忠)목사가 경신재(敬信齋)를 지었는데, 1910년 제주농업학교가 설립되면서 헐렸다.(오현고등학교총동창회) 현재 장수당은 2003년 면적 77.8㎡로 새로 지은 것이다.

 

⑦ 봉개동 김진용유허비(明道菴先生遺墟碑)


위치 ; 제주시 봉개동 산2번지(오름 전체가 산2번지임). 명도암마을 안세미오름 북쪽 기슭. 명도암 마을에서 남쪽으로 명도암휴게소 100m 못 미쳐 오른쪽의 농로를 따라 80m 정도를 가면 기슭에 샘이 있고, 샘 뒤쪽으로 50m쯤 돌아 들어간 곳.
크기 ; 높이 200㎝, 너비 71㎝, 두께 39㎝

 

명도암선생유허비
건립시기 ; 1965년


조선 중기 김진용(金晋龍)의 교육 진흥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다. 본관이 광산(光山)이며 제주 입도조(入島祖) 김윤조(金胤祖)의 8세손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 김귀천(金貴泉)의 현손이고, 아버지는 김경봉(金景鳳)이다. 자는 진숙(晉叔), 호는 명도암(明道菴)이며, 선조38년(1605) 구좌읍 한동리에서 태어나 처가인 봉개리의 명도암으로 옮겨 살았다.


김진용은 광해군10년(1618년)에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 귀양온 간옹 이익(李翊, 1629~1690)에게 수학하여 경서에 밝고 행실이 정결(淨潔)하였다. 간옹 이익은 광해군 7년(1615년)에 대북파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강화도에서 죽게 한 것과 인목대비를 폐비하는 것에 반대하는 극언극간의 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샀던 인물이다. 김진용은 고홍진 문영후 등과 더불어 이익이 배출한 걸출한 제자들 중 한 사람이다.


김진용은 이익에게서 수학하여 인조13년(1635)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고, 상경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진학하고, 인조21년(1643)에 경학전강에 급제하여 숙녕전(肅寧殿)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사퇴하고 귀향하여 제주에 머무르며 훈학에 힘썼다.


효종9년(1658)에 제주로 부임한 이괴 목사는 남달리 학문을 중시하여 김진용으로 하여금 인재를 육성하게 하였고, 학문의 작흥(作興)과 조례규범(條例規範)을 오직 그에게 자의(諮議)하였으며, 1659년에 그와 더불어 고득종(高得宗)의 옛 집터(현 오현단)에 제주 교육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장수당이라는 학사를 창건하였다.

장수당은 후일 귤림서원의 효시가 되기 때문에 제주에서는 최초의 사학으로 자리매김된다.
장수당은 12칸으로, 35명의 학생이 수학하였으며, 김진용은 장수당에 은거하면서 삼읍(三邑: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학생들을 훈학하는 데 힘썼다. 그로 인해 제주의 유학이 왕성해지고, 풍속이나 교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후인들은 김진용이 살았던 곳의 이름을 빌어 명도암이라 칭하였다.


김진용은 후학 양성에 매진하다 현종4년(1663)에 생을 마감했는데, 그로부터 약 170년이 지난 순조31년(1831)에 유림의 건의로 이예연 목사가 김진용의 업적을 기려 그의 위폐를 영혜사(永惠祠)에 모셨다. 그러다가 헌종15년(1849)에 장인식(張寅植)목사 때 위패를 향현사로 옮겨, 고득종과 더불어 향사하고 향현으로 받들어 왔다.


그의 묘는 이 오름 기슭에 있었는데 20여 년 뒤에 그 자리가 나쁘다 하여 서귀포시 동홍리 대교동 해좌(亥坐)로 이묘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명도암(明道庵)은 후학들이 김진용을 가리켜 '길을 밝힌 사람'이란 의미로 붙인 호인데, 나중에는 그가 생활했던 이곳의 마을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서는 '후인들이 김진용이 살았던 곳의 이름을 빌어 명도암이라 칭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김진용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65년 10월 명도암 선생 탄신 6회갑 기념으로 이숭녕(李崇寧)의 명문으로 된 명도암김진용선생유허비(明道菴金晉鎔先生遺墟碑)가 명도암오름 산기슭에 세워졌다. 장태욱의 글에는 '김진용의 후손들인 광산김씨 대교동파에서 그가 기거하던 곳에 유허비를 세웠다'고 했는데 필자는 이곳이 그가 살았던 곳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집터라고 보기는 어려운 곳이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오마이뉴스 장태욱 글, 광산김씨홈피)
유허비의 앞쪽에는 “명도암선생유허비(明道菴先生遺墟碑)”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남명(南溟)의 령봉(靈峰)인 한라산의 저정(儲精)이 뻗어 그 동북 기슭 육십여리(六十餘里)에 명도암올음(明道菴兀音)을 이루었으니 수석(水石)이 유수(幽邃)하고 령기(靈氣) 감도는데 담천(淡泉)을 사이에 둔 이곳 안태전(安胎田)은 바로 선생이 거처를 복(卜)하여 권덕상지(眷德尙志)하신 유허(遺墟)이니라.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휘(諱)는 진용(晉鎔)이요, 자(字)는 진숙(晉叔)이며, 선생이 명도암에 은거 수도(隱居修道)하시매 세인(世人)이 경모(敬慕)하여 명도암 선생이라 일컬었다.


선생은 광산김씨(光山金氏)로서 려조문하시중(麗朝門下侍中) 휘(諱) 태현(台鉉)을 중시조(中始祖)로 도염령도정(都染領同正) 휘(諱) 일(逸)을 입해시조(入海始祖)로 모시니 이로써 탐라의 문물교화(文物敎化) 자못 쇄신(刷新)된 바 있더니 선생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유가(儒家)로서 일찍이 뜻을 성현(聖賢)의 학(學)을 두고 연학상지(硏學尙志)로 능히 황무(荒蕪)를 기제(旣除)하니 남방의 교화 울연(蔚然)히 이룩되어 드디어 남인 숭앙(崇仰)의 유종(儒宗)이 되시니라.


선생은 이씨 조선(李氏朝鮮) 선조(宣祖) 을사(乙巳)에 강생(講生)하시니 천성(天性)이 고명하고 재질(才質)이 특출하여 유시(幼時)에 적거 중인 간옹이익선생(艮翁李瀷先生)에게 수학(受學)하시다 인조(仁祖) 을각(乙亥)에 사마(司馬)에 오르셔 판관에 출유(出遊)하시고 숙녕전참봉(肅寧殿參奉)에 서(敍)함을 입자 사(辭)하고 귀향(歸鄕)하니 본지사환(本志仕宦)에 있음이 아니러라.


이래준재(爾來俊才)를 모아 성현(聖賢)의 길을 강(講)하며 육영(育英)에 힘써 오시더니 효종(孝宗) 무술(戊戌)에 만오이공회(晩悟李公禬) 목사로 도임하자 우선(于先) 흥학(興學)을 첫 사업으로 삼고자 선생께 조규방략(條規方略)을 자방(諮訪)하매 선생이 더불어 경론(經論)하여 학사창검(學舍創建)에 이르니 이것이 장수당(藏修堂)으로 오늘의 오현단이 바로 그 유적지요 탐라상교(耽羅庠校)의 효시(嚆矢)라.


이로 말미암아 교학(敎學)이 흥륭(興隆)하고 인재 배출(人才輩出)이 이루 헤아릴 바 아니니 선생의 공은 청사(靑史)에 길이 전할지어다. 계묘(癸卯)에 서거(逝去)하시니 향년오십구(享年五十九)라.


순조(純祖) 임진(壬辰)에 목사이공례연(牧使李公禮延)이 선생의 유덕(遺德)을 흠앙(欽仰)하고 사림의 요망(要望)도 있어 영혜사(永蕙祠)에 종향(從享)하고 헌종(憲宗) 계묘(癸卯)에 지주 이공원조(李公源祚)가 따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고령곡득종(高靈谷得宗)과 배향(拜享)하여 왔으나 고종(高宗)의 신미(辛未)에 대동(大同) 철향(撤享)되더니 계사(癸巳)에 사림이 모여 향현사유허비(鄕賢祠遺墟碑)를 건립하였도다.
 

이제 또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서 유허비를 세워 선생의 유덕(遺德)을 현양(顯揚)코자 하니 참으로 감격할지어다 희(噫)라 선생은 일찍이 산림에 은거하면서 연학(硏學)과 육영(育英)으로 생애를 마치신 분으로 탐라의 해황(海荒)을 깨치시고 향토에 헌신하여 그 교화는 부유(婦孺)에게까지 미치게 되니 참으로 거룩하시도다.


길이 그 유지를 계승하여 선생의 유업(遺業)을 보람 있게 할지니라.
문학박사(文學博士) 연안(延安) 이숭녕 찬 (李崇寧撰) 안동(安東) 김충현(金忠顯) 서(書) 선생악강지육주(先生嶽降之育周) 을사(乙巳) 십월(十月) 일(日) 립(立)〉
이 비석은 2015년 3월 9일 향토유산으로 지정되었다.

 

⑧ 이도1동 향현사유허비(遺墟碑)
鄕賢祠遺墟碑 향현사가 있었던 곳을 기념하는 비

복원된 향현사


향현사는 조선 세종 때에 한성판윤을 지낸 영곡 고득종을 追享하기 위해 헌종9년(1843)에 李源祚 목사가 귤림서원 옆에 세웠으며, 헌종15년(1849)에는 참봉 김진용을 영혜사에서 옮겨 함께 추향하다가 고종8년(1871) 서원철폐령에 따라 三姓祠, 귤림서원, 영혜사, 松竹祠 등과 함께 철폐되었다. 이 비는 李奎遠 목사 때인 고종30년(1893) 정월에 그 유허지에 세운 것이다.(제주시비석일람 43쪽)


비문 내용


靈谷 高先生 諱得宗 字子傳 文科重試 判漢城府事
영곡 고선생은 휘가 득종이고 자는 자전이며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판한성부사를 지냈고


明道巖 金先生 諱晉鎔 字晉叔 進士參奉 贊建藏修堂
명도암 김선생은 휘가 진용이고 자가 진숙이니 진사참봉으로 장수당을 창건하였다.


兩先生 德行功業 沒世不忘
양선생의 덕행과 공업은 세상을 몰하여도 잊지 못하네.


立祠並享 辛未撤祠
사당을 세워 나란히 배향하였으나 신미년에 사당이 철거되었네.


後癸巳竪 短牲寓感慕焉 銘曰
그 후 계사년에 비석을 세우고 소박한 제물을 올리며 느낀 바 흠모하여 명에 말하기를


漢嶽之靈 한라산의 신령스러움이여
公寔踵英 공(고득종)이 진실로 이어받아 뛰어났도다.


平章賢雲 평장(平章)에 어진이가 구름 같음이여
功在斯文 공(김진용)이 斯文에 있도다.


爰銘牲系 이에 제사의 실마리를 새기니
於千萬歲 오호라 천만년 이어질지어다.


鄕校 掌議 玄商休 幼學 李基瑢 謹書
癸巳元月日 後學 前 宗府正 高景晙 謹竪


敬信齋 接首 李基恒 有司 金奉河
이곳에는 1970년대에 지어진 오각정이 있었으나 이를 철거하고, 2007년 8월 팔작지붕 단층 구조의 향현사를 복원했다.


 

용연 암벽에 있는 이괴의 마애석각(磨崖石刻)
 


⑨ 용담2동 이괴마애명
위치 : 용담2동 용연 서쪽 암벽


용연 서쪽 암벽에 선유담(仙遊潭)이란 대자(大字) 제액(題額)과 함께 그 아래로 판관 김우(金雨) 士人 최필(崔佖), 군관 양우표(梁宇標) 김〇건(金〇建) 이상(李裳) 안효증(安孝曾) 들과 1658년 가을 이곳에 나들이 갔던 사실을 새겨놓았다.(제이누리 130121 백종진 글)

 

 

⑩ 오현오각비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421-3번지(오현길61) 오현단 경내

오각형 방부 위에 세운 오각기둥 모양의 빗돌에 오현 선생의 호와 이름을 크게 새기고 아래에는 제주에 왔던 시기, 제주에 왔을 때의 신분, 최종 벼슬, 시호를 작은 글씨로 적었다.


빗돌 위에는 오모지붕 모양의 화강암 가첨석을 덮었다. 둘레에는 화강암으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현대에 만든 것이다.


충암 김정 선생 ; 중종15년(1520) 제주 유배. 형조판서. 시호 문정
규암 송인수 선생 ; 중종29년(1534) 제주목사. 대사헌. 시호 문충
청음 김상헌 선생 ; 선조3년(1601) 안무어사. 좌의정. 시호 문정
동계 정온 선생 ; 광해군6년(1614) 대정 유배. 이조참판. 시호 문간
우암 송시열 선생 ; 숙종15년(1689) 제주 유배. 좌의정. 시호 문정

 

 

 

 

 

 

⑩ 오현 詩碑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421-3번지(오현길61) 오현단 경내
성벽 가까이에 띄엄띄엄 5개의 사각형 비석에 오현의 대표적인 시를 새겼다. 시의 주제는 모두 제주와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현대에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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