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무등이왓..동광리 큰넓궤(피난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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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무등이왓..동광리 큰넓궤(피난생활)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5.1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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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학살에 대한 분노보다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입 다물어..


동광리 큰넓궤(피난생활)


동광리 큰넓궤
위치 ; 안덕면 동광리 마을 북쪽 공동목장 지역 내. 목장 문으로 들어가서 시멘트길을 따라 끝까지 간 후 풀밭길을 따라 왼쪽으로 300m쯤 가면 철조망이 나오는데 철조망을 넘으면 다시 왼쪽 50m 지점
시대 ; 대한민국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동광리는 안덕면 서북쪽 해발 300m에 위치한 산간 마을로 옛날에는 '무등이왓'이라 불렀다.

동광리 마을은 무등이왓, 삼밧구석, 간장동, 조수궤 등의 자연마을들로 이루어졌다. 300여년 전에 관의 침탈로 쫓겨온 화전민들이 마을을 이루고 화전과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마을을 번성시켰다.

조선 말기 관의 침탈에 항거하여 수 차례 농민 봉기를 일으킨 진원지이기도 한 이 마을은 1948년까지만 해도 200여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해방은 공출없는 세상'이라고 믿었던 무등이왓 사람들은 1946년 미군정의 곡물 수집 정책에 주민 모두가 항의하여 보리 공출 반대 운동을 벌인 적도 있었다. 이후로 군경의 탄압이 가해지기 시작하여 마을 청장년 대부분은 산으로 피신하게 된다.


1948년 10월부터 마을 분위기가 살벌해졌고, 잡혀가서 초죽음이 되어 돌아오는 사람, 곶자왈로 피하는 사람, 해안마을로 미리 내려가는 사람들로 어느 길이 사는 길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무장대의 근거지에 가까웠던 지리적 조건 때문에 무장대의 왕래가 빈번한 이 마을에서 1948년 11월 14일 마을 유지 9명이 학살된 것을 비롯하여 11월 21일 소개시 무차별 학살과 방화로 주민 상당수가 죽고 마을도 잿더미로 변한다.

극심한 공포에 질려 있던 마을사람들은 해안마을로 내려가는 것이 더 무서웠다. 살 길은 산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다. 토벌대의 집요한 토벌과 학살을 피해 돌아다녔으나 그 해 겨울 동안 추위와 굶주림과 총탄에 의해 거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동광리에서는 공식적인 소개 통보가 없었던 것 같다. 토벌대가 마을 이장에게 소개 통보를 전해 주었어야 했는데 접근이 힘든 유격대 활동 지역이어서 제대로 전달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토벌대로서는 유격대의 근거지와 가까웠던 동광리 주민들을 전부 토벌 대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중산간 마을의 경우는 군인들에 의한 공식적인 소개령이 떨어진 며칠 후에 토벌군이 마을에 들어가 대대적인 방화와 집단학살을 자행했으나, 동광리는 직접적인 소개 명령 없이 1948년 11월 15일 집단학살을 시작으로 무차별 학살과 방화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형태를 띠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시간이 지나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해안 마을로 내려가지 않은 것이다. 낮에는 토벌군의 공격을 피해서 마을 근처 숲이나 굴 속에 숨어 지내다가 밤이 되면 식량을 장만하러 또는 돼지 것(먹이) 주러 집으로 내려오곤 하면서 피난생활이 빨리 끝나기를 가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식량을 구하러 집에 갔던 4가족 16명(젊은 남자는 없고 할머니와 어린 아이들이었음)이 잠복해 있던 토벌대에 붙잡혔다. 토벌대는 이들을 한 곳에 모여 앉게 하고 짚더미와 멍석 등을 쌓아 그대로 불을 질렀다. 생화장을 시킨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바람에 불려 널부러진 빨래처럼 이곳저곳에 쓰러진 시체들을 보면서 잔인한 학살에 대한 분노보다는 언젠가는 자신들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때 살아난 할머니는 지금도 고래(맷돌) 갈 때마다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잘잘 흘려. '나는 돝집에서 살아수다. 살려줍서 살려줍서 허는 애기 놔 두고 나만 혼자 살아수다.'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이 시신들을 대강 흙으로 덮어 두고 돌아갔다. 이 때 굶주린 채 마을을 돌아다니던 어미돼지가 시신들을 뜯어먹었다. 뼈만 남아 이리저리 섞이고 뒹굴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친척이고 뭐고 없어. 우선 자기가 살아야지. 숨어다니다가 동네 사람을 만나면 혹시 날 잡으러 온 게 아닌가 하고 서로를 의심하고 무서워하는 처지였어. 낯익은 동네 분이라도 만나면 '그간 어떻게 살아 있었구나.' 하는 게 인사라. 그렇게 다니다가 왜정 때 폭탄에도 끄떡하지 않은 안전한 큰 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게 됐지."(동광리 신○숙)


큰넓궤('궤'는 동굴이라는 뜻의 제주 사투리)라는 이 동굴은 동광리에서 서북쪽으로 2.5Km쯤 되는 곳에 위치한 천연동굴로 4.3 당시 토벌을 피해 무등이왓 사람 120여명이 50-60일 동안 숨어 살았던 곳이다.


주민들이 큰넓궤로 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해안으로 내려간 사람들이 대부분 처형당했기 때문이었다. 해안 마을로 가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이곳저곳으로 숨어 다닐 수밖에 없었고 숨어 다니는 동안에도 크고작은 학살을 보고 들으면서 더욱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헤맨 끝에 큰넓궤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굴에는 이미 동광리 하동(아랫마을)에서 온 사람들이 숨어 지내고 있었다. 두려움 속에서 숨어 지내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게 되자 서로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큰넓궤는 입구가 매우 좁아 몸을 엎드려야 들어갈 수 있고, 입구에서 5m 정도에서 수직으로 3m쯤 내려가야 넓은 곳이 있고 그 넓은 곳을 지나면 다시 '낮은포복'으로 지나야 하는 곳을 지나야 넓은 공간이 나오기 때문에 토벌대에게 발견될 위험도 적었고 발견된다 해도 쉽게 목숨을 잃지는 않을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절벽을 내려가서 넓은 곳 10m쯤을 지나서 다시 좁아지기 시작하는 곳에는 돌담을 쌓아서 총탄을 엄폐할 수 있게 하였으니 발각되었을 때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한 셈이다. 굴 입구 주변에는 150cm 정도 높이의 돌탑 비슷한 시설이 5곳 있는데 이는 전투에 대비한 엄폐물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굴이 발각될 때까지 ‘큰넙궤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보초 서기, 식량준비하기, 물 길어 오기 등의 역할들이 각자에게 주어졌다. 그렇게 큰넙궤에서 120여 명이 50일 동안 살았다. 굴은 이층으로 처음 온 사람들은 1층, 나중에 온 사람들은 2층에 자리 잡고 살았다.


"밥은 굴 안에서 하지 않고 근처에 많이 있는 작은 굴에서 주로 해서 차롱(대나무로 짠 뚜껑 달린 작은 바구니)에 담아 며칠에 한 번씩 지어다가 먹었고, 물은 '삼밭구석'(마전동)에서 소 먹이던 물을 항아리에 길어서 날라다가 먹었어. 밖에 다닐 때는 발자국이 나지 않게 돌만 디디고 다니거나 마른 고사리를 꺾어다가 발 디딘 곳에 꽂아두면서 다녔지.

똥도 밖에 나가서 누지 못했어. 한쪽 굴을 변 보는 데로 정해서 거기에다 변을 보도록 했지. 하동 사람들은 밑에 굴에 살았고 상동 사람들은 주로 윗굴에 살았는데, 윗굴에서는 변소가 있는 굴까지 가기 힘드니까 항아리에 누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버리곤 했지."(동광리 신○숙)


나중에 이 곳은 토벌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즉 굴 밖에서 보초를 서던 사람이 토벌대에게 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안내하라는 강요에 못 이겨 토벌대를 데리고 큰넓궤까지 갔다. 그러나 굴이 복잡하고 험했기 때문에 굴에 익숙한 그는 토벌대를 따돌리고 굴 속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토벌대가 쏘는 총에 허벅지를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고 토벌대에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노인과 어린 아이들을 일단 안으로 피신시키고 이불들을 굴 입구 쪽에 모아놓고 고춧가루를 뿌리면서 불을 질렀다. 푸는체(키)를 사용하여 연기가 밖으로 나가도록 열심히 부쳤다. 토벌대는 굴 속에서 나오는 매운 연기 때문에 더 이상 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만 총을 쏘아댔다. 밤이 가까워지자 토벌대는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굴 입구에 돌을 쌓아 막아놓고 철수하였다.


근처 도노미오름에서 망을 보던 마을 청년들과 유격대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토벌대가 완전 철수한 것을 확인하고 내려와 돌을 전부 치워내고 마을 사람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단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주민들 대부분이 15Km쯤 떨어진 한라산 영실 근처 볼래오름까지 피신했다. 볼래오름은 유격대의 활동 근거지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유격대들과는 약간 떨어진 볼래오름 근처 초기(표고버섯)밭에서 주로 살았고 피난민이라고 따로 취급받았다. 여기서 약 보름 후에 토벌대의 추격을 받아 모두 잡힌 것이다.(제주신문 1989년 4월 3일 '4·3의 증언') 이들은 그 해 음력 12월 24일 정방폭포 근처에서 모조리 총살되었다.


"무자년 섣달 스무나흘날이야. 서귀포 정방폭포 웃녘편에서 다 죽었는데 뒷해 섣달이 되어서야 겨우 시체를 찾으러 갈 수 있었어. 시체가 다 썩어서 네 것 나 것도 몰라. 총 쏘아서 쓰러지니까 그냥 흙만 덮어 내버렸던 거지. 시체들이 바다로 떠내려가는 바람에 시신을 찾지 못한 유족들도 많아. 시신을 찾지 못한 유족들은 나중에 칠성판을 만들고 옷 지어다가 무당을 청하여 정방폭포에서 원혼을 불러다 영장을 치렀지."(동광리 김○수) (제주4·3연구소 편 「4·3長征 3」 15∼19쪽)


이렇게 해서 마을 근처에 봉분만 만들어 놓은 헛산(헛묘)이 생겼다. 동광 6거리 근처에는 시신 없는 무덤이 9기나 된다 이들 중 2기는 부부합묘이다. 이러한 헛묘는 이 마을뿐 아니라 다른 마을에도 있다.

다음은 김원유(여·80) 할머니께서 하루 하루를 죽음의 공포속에서 살았던 해안 마을에서의 소개 시절 회상이다.


"소개를 화순으로 내려갔는데 가서 보니까 사람 사는 꼴이 말이 아니랐수다. 우린 밖에 잘 나다니지 못하니까 소식으로만 들었는데, 전날에 총소리가 팡팡 나서 그 다음날에 들어보면은, 오늘은 스물 아홉명이 죽었져, 뭐했져, 매일….그 때는 아기들에게도 이렇게 얘기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늘 저녁이라도 잔뜩 먹으라. 내일되면 죽어질지도 모를 일" (한라일보 2008년 2월 19일)

4.3 진압과정에서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고 살아남은 10여 가호 정도의 사람들이 1956년경에 마을을 재건하러 올라왔다가 번성했던 마을에 함께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에 무등이왓을 버리고 현재의 동광리 하동으로 내려와 마을을 재건하여 살고 있다.

위 사진은 동굴 입구 주변에 설치된 엄폐물이고, 아래 사진은 동굴 내부 엄폐물이다.

《작성 041024, 수정보완 1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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