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를 반씩 나눠 또 걷습니다..②"
상태바
"올레를 반씩 나눠 또 걷습니다..②"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7.05.17 0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발행인편지)17코스를 거꾸로..광령리사무소에서 도두항까지

 

 

하프코스 올레걷기 이튿날..

지난 13일 중앙로 간세라운지 17코스 시작점에서 시작한 제주올레 하프걷기는 14일(일요일) 화창한 날씨속에 시작됐습니다.

도두봉으로 가기 위해 용두암 해안도로를 들어섰는데..갑자기 바닷가쪽에 하얀 해무가 끼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바라보니..사라봉이 구름속에 머리만 쏙 올라와 있었습니다.

 

차를 일단 세우고 정말 보기 드문 이날 해무현상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육지쪽은 해무가 없는데..유독 바다에만 하얗게 앞을 가득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같은 현상은 도두까지 가는 동안 앞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해무로 가득 했습니다.

제주공항 쪽은 잠시 해무가 끼더니 곧 사라져 비행기 이착륙에는 문제가 없어보였지만 바다를 떠가는 선박들이 잠시 걱정됐습니다..그러나 그 현상은 곧 사라졌습니다.

나는 이날 하프코스는 이어 걷는 것이 아닌, 다시 거꾸로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도두항에서 광령리사무소로 가는 것 보다 광령리에서 출발하여 도두항까지 오는 코스를 선택한 것입니다.

 

 

광령리사무소쪽으로 달려갔지요.
스탬프를 찍은 시간은 9시 20분경..

그런데..광령리사무소 바로 옆 조그만 우물에 자라 두 마리가 작은 돌 위에 꼼짝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꼼짝도 하지 않기에 작은 조형물인가 했습니다.

유심히 살펴보니 눈을 깜빡였습니다.

살아있는 자라였습니다.

이 대로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무수천이라는 엄청난 계곡이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사실 두 번째 올레길을 걸으며 도움이 되는 일은, 더 이상 길을 찾지 못해 헤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17코스를 걸으면서 외도 월대까지 이어진 이 계곡은 많이 기억에 남는 곳이고..가다보면 계곡 옆으로 젊은 대학생들이 써놓은 예쁜 글도 보았던 곳이지요.

이날도 천천히 걸으면서 보니..겨울에 그렇게 보기싫게 놓여 있었던 계곡 옆 지난 태풍의 흔적들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어서 얼마나 반가웠던지..

또 내려오다 보니 이 계곡에는 암벽등반을 연습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계곡은 그런 저런 재미와 흥미를 주나 봅니다.

언젠가 한번 그 안으로 내려가 봐야 하겠습니다.

외도를 바라보며 걷는동안 길가에는 보리탈이라는 딸기도 길에 먹음직스럽게 달려 있어 가끔 이 보리탈을 따 먹으며 걸으니..봄이 걷기에 참 좋다 하는 느낌도 들었지요.

외도로 내려가는 길 초입에서 만난 돌하르방이 미완성인지..작품인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더군요.
반가웠습니다.

 

그곳을 지나니 전에 엄청난 공사판을 벌이고 있던 외도동 제2 축구장은 마당이 이미 다 만들어져 있었고 마지막 공사에 피치를 올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월대..

월대천 변에는 이름 모를 예쁜 새들이 10여마리 이상 높은 돌 위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며칠전 어느 하천에서인가 숭어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이 생각 났습니다.

 

이곳에 있는 새들도 물이 더러워져서 물 가까이 가는 게 싫은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했지요.

그곳을 내려와 월대 소나무군락을 다시 찾았습니다.

250년생이라고 안내판이 붙어있었지만..아마 거의 300년은 된 듯 보일 정도로 우람하고 신령스런 모습이었습니다.

 

 

또 물속에는 숭어새끼들이 얼마나 많은지..떼를 지어 물려다니는 모습도 오랜만에 봤습니다.

17코스는 이 길을 따라 p턴을 해서 외도교 다리를 건너면 내도동 알작지로 안내합니다.

알작지가 유명해지니..그곳에 해안도로를 낸다며 길을 내고 있는 그 공사판 아래에는 집이 몇 채 바다를 끼고 앉아 있는데 이날도 보기에 참 안쓰럽고 딱했습니다.

집벽에는 차를 파는 곳이라는 글자가 조그맣게 쓰여져 있는데..그곳을 내려가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알작지에는  김도경 씨라는 분이 서울에서 제주에 살러 내려와 식당을 열었다는 대해수라는  일종의 퓨전일식 식당이 있습니다.

전에 걸을 때 이곳에 들러 맛있게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남아 다시 들어 갔습니다.
메뉴도 전처럼 세트음식(우동 돈가스 초밥)을 시켰지요.

그리고 전에 찍었던 사진과 함께 기사를 보여주었더니..
이 식당 사장은 "자기도 올레를 걸으면서 여유롭게 살기 위해 제주에 왔는데.."하며 매우 부럽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식당 주방장은 "나도 올레 걸을래.."하며 곧 올레걷기에 나설 심산처럼 부러워 했습니다.

나는 올레를 전부 걷기보다 반씩 걸어보라고 얘기해 주고 두 분의 기념사진과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나왔습니다.

 

 

 

알작지를 보기 위해 바다쪽 자갈밭을 걷기로 했습니다.
알작지의 그 아름다운 소리는 이미 다 사라졌지요.

알작지가 유명하다 한들 작은 자갈돌이 구르며 들려주던 그 소리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그 알작지를 지나쳐 가버리면 그 마을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만..해안도로를 만든다고 알작지의 그 아름다운 소리를 없애 버린 것은 두고두고 후회할 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알작지에는 또 하나 옛날 천연포구가 있습니다.
암맥군이라 불리우는 이곳은 보기에도 엄청난 용암맥이 이어진 곳입니다만 이 위로 이호까지 이어지는 다리가 놓여졌습니다.

이곳을 흐른 용암의 흔적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의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그 웅장한 암맥군과 알작지 소리만 해도 자연이 준 천혜의 자연인데..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이제 길은 한라산을 배경으로 보리밭이 흐드러진 길을 따라 올레는 이호태우해변으로 이어집니다.

 
 

마침 이날 이호태우해변에는 작은 요트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이호해수욕장은 배우는 사람 타는 사람 등 요트와 사람으로 가득 하지요.

그리고..

해변에는 벌써부터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 소리가 떠들썩 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아마 이곳 해변에는 또 수많은 사람들이 여름을 즐기겠지요.

이호태우해변은 화장실을 끼고 모래밭을 걷도록 안내합니다.
걷기는 힘들지만 모래를 한번 밟아보는 것도 사실 특별한 경험이지요.

 

모래밭을 힘겹게 걸어나오니 빨간색과 하얀색 등대가 보기 좋은 매립지입니다.

이곳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우뭇가사리를 말리고 있었습니다.

제주에서는 이 해조류로 우무를 만들어 여름별미로 보리가루에 타서 후루룩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도두봉이 코앞에 보입니다.

한 코스를 다 걷는 순간이지요.

잠시 앉아 쉬고 해변을 따라 걸었습니다.

 

 

추억의 거리가 나오고..굴렁쇠 모형, 공기돌 놀이와 고무줄놀이를 하는 조각인형들이 진짜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마을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나는 이제 화장실이 급합니다.

밥을 먹고 힘차게 걸었더니 장건강이 좋아지는 모양입니다.

소화가 벌써 다 된 듯..서둘러 걸었습니다.

드디어 출발한 곳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이틀동안 17코스 한 코스를 다시 마쳤습니다.

시간은 14시9분이었습니다.

올레걷기의 처음과 다른 점은 일단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나..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그저 걷는 즐거움과 여유를 마음껏 부릴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올레를 걷는 것이겠지요.

시간을 보니.. 4시간 이상을 걸았습니다만..힘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는 점이 참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더욱이 올레코스도 내가 맘대로 정해 아무 곳이나 찾아가는 것이지요.
올레걷기는 그런 점에서 여러모로 ..환희를 맛보게 합니다.

이렇듯 아마 기분좋게 올레 하프코스를 계속 걷게될 것 같습니다.
벌써 같이 걷고 싶어하는 분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예고해 드린 대로..'인생열전'(박영만 저)에서 처음 소개한 인물은 ‘유토피아’를 저술한 토마스 모어입니다.

 

“토마스 모어는 영국의 정치인이자 인문학자이다. 영국의 극작가 로버트 볼트는 모어를 ‘전천후 인간’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처럼 그는 실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그는 판사 중의 판사였고, 법률가중의 법률가였으며 외교관중의 외교관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성공적이었다. 모어는 옥스퍼드 대학과 캠브리지 대학의 총장직을 맡아 그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한편 리처드3세에 관한 역사서를 저술하여 세익스피어에게 영향을 주었고 프랑스와 스페인간의 평화협상을 주선하는 특사로 임명되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작위를 수여받은 다음 마침내 왕 바로 아래의 고위직인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모어는 왕에게 충성하였다. 그러나 첫 번째 왕비 캐더린과 이혼하고 싶어하는 왕 헨리8세에게 이러한 정직한 충성은 오히려 걸림돌이었다.


..모어에게 있어 왕의 이러한 결정은 양심의 문제였다.
여러 대학들과 의회와 심지어 성직자들까지도 왕의 입장에 찬성을 표시했다.
그러나 모어만은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뜻으로 대법관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타협을 원하지 않았고 인가를 꾀하지도 않았다.
결국 모어는 큰 어려움에 빠졌다. 그는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집에는 돈이 없었다. 주교가 국가에 봉사한 그의 노고를 인정하여 35만 파운드라는 많은 돈을 주었지만, 그는 양심의 이름으로 그것을 거절했다.


세명의 주교가 관직복귀를 권하는 뜻으로 그를 새 왕비 앤 블린의 즉위식에 초대했지만 모어는 그것마저 거절했다.

이제 왕의 가슴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모어는 왕국 제2인자의 자리를 버리고 양심이라는 이름 아래 공개적으로 성직자들을 경멸하는 인물일 뿐이었다.

결국 대법관이었던 그가 피고의 신분으로 법정에 섰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이 평생 추구해 온 고결성을 보여준다.

 

“나는 아무도 해치지 않았고, 해로운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나는 모든 사람들의 행운을 빈다. 정당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것 때문에 살 수 없다면 나는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법정은 모어에게 사형을 선고할 만한 충분한 구실을 찾아내지 못했다.


모어는 런던탑에 갇혀 있는 동안 명상과 기도로 시간을 보냈다.
법정은 드디어 ‘리차드 리’라는 인물을 내세워 모어가 반역을 꾀했다는 구실을 찾아냈다.


(중략)..이렇게 해서 토마스 모어는 결국 충성을 다한 자신의 군주에게 처형당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그러다가 400년이 지난 193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교황청은 그에게 성자의 칭호를 내렸고,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졌다.

“고결한 양심, 불멸의 영혼”


유토피아는 그리스어의 ou(=no)와 topos(=place)애서 유래한 말이다.

문자 그대로 하면 ‘아무 데도 없는 나라’라는 뜻이 된다.
토마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의 이상향은 재산의 공유와 교육의 평등, 종교의 관용, 그리고 고결한 양심이 살아있는 나라이다.


인간만이 양심을 위해 죽을 수 있고, 인간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양심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 그리고 강제적인 죽음을 맞이하여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초연히 육체를 버리고 고결한 양심과 영혼을 택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그렇기에 우리는 토마스 모어 경의 묘비명 앞에서 당당히 머리를 들 수가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