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는 혼자 걸어야 제맛..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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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는 혼자 걸어야 제맛..③"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7.05.22 06:3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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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제주올레18코스, 중앙로-삼양해수욕장까지

 

 

 

올레길이 북적인다.

지난 20일 하프올레를 걷기 위해 제주시 중앙로에 있는 간세라운지를 찾아 18코스 출발스탬프를 찍는 시간은 09시 20분..

입구에서부터 올레꾼이 많았다.
그리고..이날 수년에 걸쳐 시간이 될 때마다 제주올레를 걷기 위해 제주로 내려온다는 사람과도 만났고 특히 나이 많은 분들의 올레를 걷는 모습도 이날 참 많이 보였다.

가며 오며 만나거나 지나치는 올레꾼들의 모습을 보며 이제 올레의 시즌이 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제 제주올레는 여전히 누구에게나 한번은 걸어야 할 로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제주올레 파이팅..

 

 
   

18코스는 전에 걸을 때는 시내에서 한번 길을 잊은 적이 있지만 찍어놓은 사진을 자세히 보니 동문시장 쪽으로 작게 보이는 올레리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번에는 헤매지 않고 잘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탬프를 찍으려 걸어 내려온 길을 따라 먼저 중앙로를 다시 걸어 올라 오현단으로 향했다.

이날 천천히 자세히 이곳을 돌아보니..오현단은 고적한 작은 공원이었다.

쉴 수 있는 의자도 많았고 동산 위쪽에는 평상까지 놓여 있어 데이트하기에도 딱 좋은 조용한 산사처럼 느껴졌다.

이날은 걷기에 급급해 스쳐지나가지 않고 오현단 안쪽 곳곳을 두루 찾아 다녀 보았다.

그렇게 보니..시내에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오현단을 나오자 바로 문앞에 가락천터라는 사진그림과 함께 설명이 붙어있었다.

제줏말로 ‘가락쿳물’이 넘쳐흐르던 곳이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어 사라져버린 전설처럼 남은 곳이다.

 

가락천터

가락천은 예로부터 제주읍성 백성들에게 음용수를 공급했던 유서깊은 샘터로 산지천 중상류의 중요한 수원지였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맑은 물이 흘렀으나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췄다.
보통 4월에서 11월까지는 수량이 많아 물이 많이 흘렀고 12월에서 3월까지는 수량이 적었다.


산지물이 밀물 때 조수의 영향으로 짠물이 되어 이용에 불편을 주는데 반해 가락쿳물은 항상 급수원이 되어 성안 한짓골 동네를 중심으로한 이도동과 삼도동 주민들이 주로 애용하였으며 풍부한 수량으로 우기인 여름철에는 주민들이 목욕을 하거나 빨래를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가락천 동쪽에는 충암 김정이 우물을 판 판시물(판서정 직경이 약 4미터 정도 되었다)이 있어 더욱 유명해졌다.


‘가락이란 아름답고 늘 즐거워함을 이르는 말로 시경 가락편의 희락군자에서 따온 말’이다.

라는 설명이 함께 붙어 있어 이해하기 좋았다.

 

 

 

 

남수각 다리를 지나니 길이 아주 좁은 남수각 하늘길 벽화거리로 안내했다.

옛날 골목길이 그대로 남은 이 골목에는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어 특이했다.
하지만 전에 걸을 때는 대강 훑어보며 그냥 걸어 지나기만 했던 것 같다.

골목을 다 나오니 제주시동문공설시장이다.

여기에서 길을 잃고 무작정 사라봉만을 향해 걸어올랐던 추억이 떠오르는 곳.

나는 올레리본을 따라 여유롭게 동문시장을 향해 들어섰다.

동문시장 입구에는 호떡골목이 있다.
호떡만이 아닌 여러 가지 주전부리를 파는 곳이지만 나는 초입에 있는 80세는 훨씬 넘어보이는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는 그 호떡을 좋아한다.

 

 

예전에 홍윤진 실장과 점심식사를 하고나면 꼭 그곳에 들러 호떡을 먹었던 곳이다.
오늘은 문을 열었을까..하며 할머니께 가서 인사를 하니 “내가 첫손님..”이라며 “한 개는 안되고 두 개를 먹어야 한다”고 하신다.

천원(1개 500원)을 드리니 침을 탁 뱉고 머리에 붙이신 후 주머니에 넣으시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우신지..
나는 그곳에 앉아 호떡 2개로 아침요기를 할 수 있었다.

호떡을 먹고.. 전에 (구)중앙양과를 찾지 못해 헤맸던 동문로터리에 다다르자 중년 몇이 (구)중앙양과를 향해 갈 건지 말 것인지를 논의중(?)이었다.

내가 거들었다.

“(주)중앙양과를 찾으시는 거지요..?”
“네..어디로 가면 되지요..?”
“저쪽에 큰 건물이 보이는 곳에서 큰길 왼쪽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거기에 18코스 스탬프 찍는 곳이 있나요..?”
“네..거기가 시작점인데 오현단을 따라 이쪽으로 나오시면 되지요..”
“우리가 그쪽으로 가도 다시 이곳으로 와야 하는 것이지요..”
“네..이쪽으로 연결됩니다..”
그들은 18코스를 걸으면서 여러번 만났지만..잠시후 “어차피 이쪽으로 올 거면 바로 이곳에서 출발하자”고 하는 것 같았다.

인천에서 왔다는 분들이었다. 그들과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올레길에서 많이 만났다.

나는 아주 자세히 안내해주고 산지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지천에 다다르니 그 옛날 빨래터는 완전히 다 사라지고 무슨 조형물 하나가 놓였는데..
이건 완전히 향토문화 파괴의 현장(?)이었다.

산지교 바로 아래쪽은 주민들에게 쓰임새가 참 많은 곳이었다.
위쪽은 먹는 물로, 아래쪽은 빨래터로, 그리고 산지교 바로 밑에서는 여름철 공동목욕탕으로 사용됐었기 때문이다.


냉장고나 세탁기가 없던 시절, 이곳은 생명수를 공급하던 생명의 터전이었다.
이제 그런 모습은 전혀 없고 그냥 빨래터라는 표시만 하나 남아 아쉬움을 주었다.
그곳에 돌을 몇 개 갖다 놓아 빨래터 표시를 해두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동안도 여러번 모습을 바꿨던 곳이지만 이번 변화는 아예 흔적까지 없애버린 횡포처럼 느껴졌다.

환경이든 문화든..없앨 때는 이렇게 확실히 제거해버리는 그 마음이 참 무섭다.

 

산지천변에 앉아 잠시 쉬는데..아까 중년 4명이 걸어내려오며 묻는다.

“김만덕은 누구인가요..?”
“정조시대때 제주도에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죽어갈 때 사재를 털어 제주도민을 살린 사람..”이라고 했더니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 분이 있었어요..?..참 훌륭한 분이네요..”


그리고 객주터에 도착하자 관심 깊게 그곳을 둘러보기도 했다.
나는 주정공장터가 있는 곳에서 잠시 사진으로 남기고 올레리본을 따라 계단으로 올라갔다.

 

주정공장터

일제의 경제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1940년부터 설립한 대규모 주정공장(연간 14,940kl생산)터다. 고구마를 원료로 주정을 생산, 일본 병참본부에 항공연료로 납품하고 제주에 주둔한 일본군 자동차 연료로 공급했다.도민들은 이를 술로 만들어 음용했다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계단을 다 오르니 그곳은 공원이었지만..바다를 향해 지금은 사라봉으로 옮겨진 칠머리당굿터라는 표시가 남아 있었다.

 

칠머리당 터


선주와 어부, 해녀들이 해신에게 무사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던 곳이다. 해마다 음력 2월 초하루에 영등신을 맞이하고 14일에는 영등신을 보내는 송별제를 지낸다.

칠머리당은 항만공사로 장소를 전전하다 지금은 사라봉에 신석을 모시고 굿은 문화재전수관에서 치르고 있다는 설명과 칠머리당은 원래 건입포 칠머리에 있었다.옛 주정공장 부지 조성으로 절벽이 깎이며 제2터로 이전했다. 현재 칠머리동산 위에는 현대아파트가 들어 서 있다.


제2터는 현 항만청 부근, ‘돈물나는 디’ 절벽위에 있었으나 산지항 부지 확장공사로 절벽이 깎이면서 현재사라봉 기슭으로 옮겼다는
안내문이 나란히 서 있었다.


다시 길을 따라 사라봉으로 향하는데..사라봉 위쪽에 거대한 공사판이 벌어져 있었다.

아마 무너질 때에 대비하여 정지작업을 하는 모양이지만..참으로 거대한 난공사가 시행되고 있었다.

보기에도 아찔할 정도였다.

 

그곳 사진을 찍으려는데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전화를 했다.

“지금 좌가연대인데 길을 찾지 못하겠다”며 “올레를 걸었던 곳이니 길을 알려달라”는 거였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찾아보고 연락을 해주겠다”고 하고 길거리에 앉아 기사를 찾아 보았다.
거꾸로 들어왔다면 나가는 길은 길이 아주 협소한 숲속길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고 회장 얘기는 30여명이 단체로 걷고 있어 과연 그 길을 따라 나가면 해안도로로 이어지느냐는 걱정이었다.

올레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그 길로 나가면 해안도로로 이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이를 그대로 전해줬다.

길을 찾고 전화를 몇 번이나 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레를 걸고난 후..올레길에 관한 문의가 많아지고 있다.
한 30여분 그렇게 그곳에 앉아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전화를 하고 나니 벌써 11시가 돼 버렸다.

 

 

그곳은 마침 제주환상자전거길이라는 표시가 있는 곳인데..계단으로 이어져 있는 자전거길이라는 것도 참 특이하게 보였다.

사라봉 공사판길을 따라 가다보니..아주 예쁘게 꾸며진 밭 하나가 나타났다.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가 살고 있는 듯..

비파열매가 가득 달려있었다.

 

 

이제 사라봉으로 오르는 길..

사라봉을 오르다보면 중간에 군대식 휴게터가 나오는데..너무 허전해 보였다.

무슨 예쁜 글이라도 기둥에 써 있었으면 걷는데 도움이라도 되련만..하는 아쉬움이 생기는 곳이다.

사라봉은 여전히 산책객들로 가득이다.
길을 걷는데..백윤철법무사가 부인과 함께 사라봉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눈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이제 길은 칠머리당 신석이 있는 별도봉 입구로 들어선다.

별도봉은 예전에 매일 밤마다 걸었던 곳이다.

허리가 아파서도 걸었고 산책삼아 걷기도 했다.

이 길을 따라 애기업은 돌을 향해 가는데..아까 만났던 나보다 훨씬 앞서가야 할 인천에서 온 중년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시 사진을 찍어주고 내 사진도 찍어주겠다는 청을 물리치고 길을 서둘렀다.

별도봉 들판을 따라 바닷쪽 곤을동으로 향했다.

그 평상에서 봤던 고기를 잡던 새가 기억이 나서..조금 쉬어 볼 요량이었지만..이미 그곳은 나이 든 어르신들이 넓게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조금 더 걸어가 작은 의자에 앉아 차를 한잔 하고 있었는데..아까 그 인천분들이 또 지나가면서 인사를 했다.

곤을동마을터를 지나 화북으로 향하는 길..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바다는 좋았지만..날씨는 더웠다.

포구를 따라가며 화북이라는 마을을 느껴보려고 노력했다.

 

 

해신당이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가 보니..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멀리 사진만 찍었다.

이곳 포구에는 마을에서 만든 듯한 올레쉽터가 있었지만..이곳도 문이 잠겨 있었다.

문을 열고..무인카페라도 운영하면 좋으련만..

올레길은 다시 포구길을 따라 바다쪽 환해장성이 있는 곳으로 이어졌다.

 

 

 

 

별도연대가 우뚝 서 있는 곳..
전에는 비를 맞으며 걸었던 곳이다.

비가 내리니 올레리본이 펄럭이지 않아 숨어있는 리본을 겨우 찾았던 곳..

이 길만 지나면 목적지인 삼양해수욕장에 당도한다.

꽃이 예쁘게 핀 들길을 따라 가다 보니..마을벽 담에 예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삼양해수욕장 입구 한 정자에 도착하자..아까 만났던 인천 올레꾼들이 쉬고 있다가 나를 보자 걸어 나오면서 묻는다.

“여기서 식사는 어디서 해야 하나요..?”
“맛있는 곳이 있기는 한데..요즘 물회철이니 자리물회나 한치물회를 시켜 먹어보라”고 권유하고..주변에 있는 식당을 가리키며 “저런 식당은 동네식당이니 잘해 줄 것 같다”고 얘기해 줬다.

그는 내게도 “점심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끝나고 하겠다”며 스치듯 지나쳤다.

삼양해수욕장에 도착해서 나는 갖고간 커피는 따뜻하니..아주 찬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어서 편의점에 앉아 차를 한잔 하고 코앞에 있는 이날의 종점을 향했다.

 

시간이 날때마다 제주에 내려와 혼자 올레를 걷고 있는 나유석씨

드디어 오늘 하프코스 종점인 삼양해수욕장 포스트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시간은 13시26분..
쉬고 전화받고 하는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3시간 30분 정도는 걸은 셈이다.

그곳에는 한 젊은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인사를 건네니 나유석 씨(47세)였다.
“서유석과 이름이 비슷하다”며 농담을 건네며 명함을 주자 반가운 얼굴로 얘기를 나누게 됐다.

지난 2014년부터 올레를 걷기 시작했다는 나유석씨는 “서울에서 통신일을 하고 있다”며 “그동안 좋은 곳 먼저 다 돌고 이제 육지는 3개 코스 정도 남았으며 이후 섬 올레를 가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올레는 혼자 걸어야 제맛”이라며 “처음에는 같이 걷기도 했으나 불편해서 시간이 날때마다 내려와 혼자 걷는중”이라고 했다.

그와 참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


그는 “오늘 18코스를 모두 꿑내고 내일은 미뤄놨던 7-1코스를 걸어야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기념사진을 찍고 걸어갔다.

나는 다시 큰 길을 향해 걸어 올라 가 각제기국으로 늦은 점심을 했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에서 두 번째로 소개한 인물은 엘리자베스 1세다.

 

“나는 영예로운 여왕에 끌린 것이 아니라 신의 진리와 영광을 지키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이 말은 영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든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신의 왕위에 대하여 한말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빛나는 치적과 함께 끝까지 품위와 권위를 잃지 않은 여왕이다.
그래서 세실경은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부인하면 왕국의 누구도 여섯 단어 이상을 써서 주장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여섯 명의 왕비를 맞은 것으로 유명한 헨리8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앤 블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략)..어머니 앤 블랜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후, 엘리자베스 공주도 한때 왕의 계승권을 박탈당했으나 가까스로 25세에 이복언니 메리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녀가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이다.


부왕의 파행적 결혼생활과 모후의 비운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는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그녀의 치세기간 중 영국 절대왕정은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그리고 그녀는 여러번 결혼할 기회가 있었으나 정치적, 종교적,개인적 이유로 끝까지 독신으로 지냈다.
중상주의 정책을 펴기도 한 그녀는 ..(중략)..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시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영국이 일개 섬나라에서 세계적인 해상제국으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문화면에 있어서도 영국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국민문학의 황금시대가 도래하여 세익스피어, 베이컨 등이 배츨되는가 하면 그녀는 국민들로부터 ‘훌륭한 여왕’이라 불리며 존경을 한몸에 받아 영국 영광의 상징이 되었다.


1602년 여왕은 69세의 나이에도 승마를 즐긴 후 사냥을 나갈 만큼 활동적이었다.
다음해인 1603년 여왕은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어린 시절의 끔찍한 시련을 극복하고 45년이라는 긴 재위기간 중 빛나는 치적으로 전성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아온 훌륭한 여왕이기에, 마땅히 그에 걸맞는 묘비명이 남아 있어야 하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묘비에는 다만 그녀의 뜻에 따라 다음과 같은 짤막하지만 의미심장한 말이 새겨졌다.
“오직 한 순간 동안만 나의 것이었던 모든 것들!”

인생사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처럼, 인간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그 손으로 무얼 했으냐의 흔적만을 남긴 채..


모든 것을 소유하려 했던 진시황은 긴 오명을 남긴고 빈손으로 떠났지만, 오직 한 순간 동안 만 모든 것을 소유하려 했던 엘리자베스 1세는 긴 선명을 남기고 역사에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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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joon Ko 2017-05-23 08:15:33
말씀 드린 대로 일정을 소화하셨네요.
그날 반가웠습니다.
다음에 내려 오시면 또 연락 주세요.
저는 주말마다 올레를 걷고 있으니 또 어디에선가 만날 날이 있을 것 같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나유석 2017-05-22 21:41:19
기사 잘읽었어요! 그날 짧은 만남의대화 였지만 옛제주도에 대해 알게되어 여행하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어요...
맛집소개해준 골막국수집에서 고기국수 맛나게 먹는걸 끝으로 18코스를 마무리했어요~
다음날 7-1 코스 걸었는데 말씀데로 넘 좋은거있죠!! 곳곳에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자연환경이 훼손되는걸 보고
올레꾼 1인으로 마음이 속상했구요.. ㅠㅠ
앞으로 계속 환경에도 관심가져주시고 좋은글 많이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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