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이는 인생이나,그 올레.."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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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이는 인생이나,그 올레.."④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7.05.29 0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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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제주올레 18코스, 삼양-조천구간 새로 발견한 비경

 

 

 

 

복기하듯..천천히 제주올레 하프코스를 걷고 있다.

하프코스의 좋은 점은 전 코스를 걸을 때 일부 지나쳤던 곳을 다시 들어가 찬찬히 볼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그리고..만나는 사람마다 안부를 전하듯 사진도 한 장씩 찍어 남길 수 있다는 점이 많이 다르다.

지난 27일은 지난주 걸었던 18코스 중간포스트에서 시작하는 삼양-조천까지의 구간..

9시20분경, 몰고 간 차는 삼양동공용주차장에 세우고 일단 걷기 시작했다.

 

 

 

삼양동 마을을 가다가 보니..아직 옛날 정취가 남아있는 집이 몇채 보였다.

또 하나 반가웠던 것은 지난주에는 시간이 늦어 보지 못했던 장터.

삼양해수욕장 앞에 만들어진 이 장터는 토요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열리는 생산자와 주민이 직접 만나 흥정을 하는 작은 마을장터였다.

지난주에는 시간이 맞지 않아 보지 못했지만 이날 가 보니 농산물과 반찬가게 그리고 염색제품 등 다양한 제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시간이 이른 탓인지 사람은 많이 없어도 아주 유용한 장터로 운영돼 갈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었다.

 

 

이곳을 지나 중간스탬프 포스트로 향해 가는데 할머니 한 분이 집밖 마당에 앉아 지나는 길손을 바라다보시는 모습이 보여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고 했더니 흔쾌히 찍으라고 하신다.

올해 97세나 되셨다는 이분은 19세에 삼양으로 들어와 평생을 그곳에서만 사셨다고 했다.

다시 인사를 하고 지나쳐 중간스탬프를 찍은 시간은 09시35분.

옆으로 보니 남자어르신이 또 홀로 앉아계셔서 “이곳에 사시냐”고 물었더니 동네분이라고 하셔서 또 사진을 찍었다.

성함은 물어보지 못했지만 올해 85세나 되셨단다.

장수하시는 할머니 한분,할아버지 한분..예부터 물이 좋은 이곳은 장수마을인 것 같다.

이제 드디어 종점을 향해 출발..

 

하지만 출발하자마자 이곳 삼양해변에는 괭생이모자반이 가득 해변을 덮고 있었다.

중국에서 흘러들어오는 이 괭생이모자반은 해류를 따라 흘러들어오면서 자라기까지 한다고 하니 제주도로서는 당분간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날 걷는 중 여러 해변에서 괭생이모자반의 습격이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모습이 많이 목격됐다.

사실 치울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이건 괭생이모자반의 반란같은 대규모 습격이었다.

돌위에 쌓여있는 이 모자반은 조천항 쪽에서는 배를 둘러싸고 있어 어선들이 조업을 나가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바닷쪽에는 이 모자반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 광경도 상당수 보여 이 모자반으로 인한 피해는 당분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지난 60년대에 만들어져 보호가 필요하다는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지적한 삼양동 끝쪽 작은 포구를 지나 원당봉으로 오르는 길..

더운 날씨에 햇볕까지 쪼여 팔이 시커멓게 변할 것 같은 두려움 속에 길을 따라 걸었다.

원당봉 오르는 길에 보시의 길이라는 안내판이 하나 서 있었다.

 

 

 

 

 

 

'참나를 찾아 떠나는 길 보시의 길

탐라국 시대부터 제주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보시의 길은 척박한 자연환경을 부처님께 의지하며 살아왔던 제주민초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길이다' 라는 설명이 안내판에 쓰여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원당사 불탑사 문강사 등 절도 참 많았다.

길을 따라 원당사로 들어가 전에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이곳 분위기를 즐겼다.

예전에는 정문으로 들어섰던 것 같은데..이날 보니 정문은 문이 잠겨있고 옆문으로 들어가도록 돼 있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나와 바로 앞 불탑사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느낌상으로는 종탑을 만드는 공사인 것 같았는데 안을 모두 막아놓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언제 봐도 편안한 절이다.

이제 길은 아주 작은 밭과 밭을 잇는 샛길을 따라 걷는 길이다.

이 길은 사람이 하나 겨우 걸어서 갈 정도로 좁은 길이지만 운치가 넘친다.
신촌바다가 보이는 ..그리고 예전에 제사 먹으러 다녔다던 옛길로 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을 거의 다 나왔는데..어디선가 들리는 소리..

뻐꾹..뻐꾹..
뻐꾸기가 울고 있었다.

나무숲이 있는 높은 나무 위에서 뻐꾸기가 뻐꾹소리를 계속 냈다.

제주도에도 뻐꾹이가 있었나..?
너무나 반가웠다.

꿩이 우는 소리는 자주 들었고 희한한 아름답기만한 방울 굴리는 새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뻐꾸기소리는 많이 들어보지는 못한 것 같다.

그 뻐꾸기소리를 음미하며 걸었다.

뻐꾸기는 신촌으로 다 나와 바닷가로 난 길을 따라 걸을 때까지 계속 울었다.

길은 삼양에서 신촌으로 나가는 좁은 찻길을 따라가다 다시 바닷가로 이어진다.

 

이 길은 예전에 바닷가에 비석 하나가 서 있는데..미처 가보지 못한 곳이 있는 곳이다.

비석 위에 십자가가 그려진 이 비석은 시인 채바다 씨가 만들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추모비였다.

추모시가 하나 써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를 좋아하던 이야
바다를 밤낮없이 새색시처럼 껴안고 살던 이야
바다를 끛밭처럼 거닐더니
바다를 그림처럼 아끼더니
이제 바다를 실컷 말할수 있게 되었구나
물속을 마음껏 노래할 수 있게 되었구나..“

이곳은 낚시 포인트인 듯 낚시를 하는 사람 곁으로 지나다 보니 해안이 모자반으로 가득이다.

심각한 해변의 모습이었다.

이 길은 닭머루가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길인데..
닭머루쪽으로 걸어가 보니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해안을 다 뒤덮을 기세였다.

이 닭머루도 예전에는 가까이 가 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아주 가까이 가서 볼 수 있었다.

닭머루는 달랑 하나 밖에 볼 것이 없는 듯 보이지만 이날 정자에 올라 바닷가 해안절벽을 보니..

별의 별 모양의 닭으로 가득 했다.

 

 

 

닭이어도 좋고 다른 동물이어도 좋을..
바다표범과 새끼가 함께 놀고 있는 모습으로도 보이는..어미닭과 병아리 같이 보이는 천혜의 절경이 그곳에 숨어서 빛나고 있었다.

기기묘묘한 비경이 거기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이 닭머루를 나오니..
들판 한 공간에 예전에 가득 쌓아놓았던 쓰레기가 모두 다 치워져 있었다.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다만 1% 부족한 것은 해안가 쓰레기를 모아놓고 방치한 것만 작은 흠이었다.

두어군데 그것만 치웠다면 완전 1백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된 사항에 대해 이를 시행하는 그 노력만큼은 상을 받을만한 일이다.

 

 

이 길을 따라 동네로 들어서니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았던지..
시골에는 사실 아이들 보기가 어렵지 않은가..
나는 “너희들 노는 게 참 보기 좋다..사진 한번 찍자”고 했더니 3명이 포즈를 취해줬다.

나는 “나중에 제주환경일보에 사진 나올거야..꼭 봐라..”하고 지나쳤다.

이 마을에는 환해장성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라 나는 이 돌담을 참 좋아한다.
집이 환해장성 바로 옆으로 있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듯 황폐해진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신촌포구로 나왔다.

바다색깔이 참 고왔다.

이곳에는 아직 다행스럽게도 모자반이 들어오지 않아 깨끗했다.

이제 길은 철새도래지가 있는 대섬쪽으로 이어진다.
입구에 들어서자 이곳은 또 파래 공습지역이다.

덕지덕지 해안을 따라 붙어있는 썩어서 하얗게 변해 버린 파래가 분위기를 망친다.

 

 

 

대섬이 있는 쪽 바다로 나오니 돌탑이 몇 개 서 있었다.
한라산이 우뚝 바다호수와 어우러져 멀리 보였다.
신촌마을에는 유독 벽화가 많았다.
그 모두가 대작들이었다.

해녀모습을 상징하는 그림들로 가득이다.

이제 조천진성이 있는 연북정으로 가는 길..

 

 
 

이곳 해안도 포구도 모자반으로 가득이었다.
바다와 함께 보이는 한라산이 그림같았다.

조천포구 끝에는 17km지점 표시가 있었다.
이제 1km만 더 걸으면 되는 거리다.

 

 

 

길을 나와 조천연대로 올라가 봤다.
예전에는 올라가 보지 못햇던 곳..
그곳에서 보이는 동네도 바다도 한라산도 평온하기만 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종점으로 향하는 길은 흐드러진 꽃들이 길에 가득했다.

 

드디어..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길을 걸어 종점에 도착했다.
12시57분..

3시간30분 정도가 걸렸다.

나는 이곳 어머니몸국집에서 몸국을 한 그릇 먹고 오후 2시부터 동문로터리에서 열리는 청소년어울림마당 취재약속이 있어 서둘렀다.

삼양으로 버스를 타고 가 차를 몰고 행사현장에 내리니 13시58분..정확히 시간에 맞춰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세 번째로 소개한 사람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한 프란시스 베이컨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런던에서 궁정대신 니콜라이 베이컨과 그의 둘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식욕이 왕성했고 매우 조숙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를 ‘어린 궁정대신’이라 부르며 귀여워했다.


베이컨은 열두살 때 형과 함께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했으나 거기서 스콜라 철학을 공부하도록 요구받자 불만을 품고 3년후 자퇴하고 말았다.
...
자신을 이끌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자 그는 스스로 변호사가 되어 출세하기로 결심하고 그레이즈 법률학원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스물 한 살에 변호사자격을 취득하고 2년후 그는 젊은 나이로 타운톤시의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그후 선거때마다 출마하여 승리하였다.


비록 웅변술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의 연설은 간결하고 명쾌하고 장중했다.
심지어 어떤 청중은 그의 연설이 일찍 끝내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할 정도였다.

베이컨은 서른 여섯 살에 ‘수상록’을 출간하여 문필가로서의 명성도 굳혔다.

하지만 그는 마흔 다섯이 되어서야 참사원의 딸과 결혼했는데 사치스런 생활 때문에 몇 년 못가서 부인이 가져온 지참금까지 다 써버리고 빚에 쪼들려 채권자들을 피해다녀야만 했다.
그러다 엘리자베스여왕이 죽고 제임스1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또 다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명예욕과 거침없는 활동적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검사장과 검찰총장이 되더니 1616년에는 추밀원 고문관 이듬해에는 궁정대신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왕 다음의 관직인 대법관까지,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였다.


이것은 돈을 비료처럼 뿌려대는 그의 처세가 주효한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 1621년 베이컨은 오직사건에 연루되어 공직을 박탈 당하고 런던탑에 감금되었다가 4일 후에 왕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고향에 내려가 조용히 연구와 저술에만 열중하였다.


그리고 그는 세속적 영달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흔히 츨세를 한다는 것은 추잡한 일로 여겨지고 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품위없는 방법으로 영예를 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종국에는 그 영예가 몰락의 길이 되고 만다”


(중략)..많은 비난과 존경, 우여곡절 속에서도 그의 귀납적 학문방법은 근대사상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와 함께 근세철학의 비조로 불린다.
또 칸트가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을 그에게 바친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경험주의 철학을 창시하고 죽은 사람답게 묘비에도 다음과 같은 그의 유명한 말이 새겨졌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알지 못하면 와형만 보일 뿐 내면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이든 철학이든 신앙이든 마찬가지이다. 예수나 부처를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삶 자체가 틀려진다.


그런 의미에서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의 묘비명 ‘아는 것이 힘이다’는 오늘날에도 역시 힘이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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