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펴기칼럼]두뇌의 발달과 감정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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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펴기칼럼]두뇌의 발달과 감정의 탄생
  • 이범
  • 승인 2017.06.12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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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의 자식에 대한 절절한 정이 가족의 기초가 되는 것


두뇌의 발달과 감정의 탄생/이범의 몸펴기칼럼 


 

 


이 글은 다음에 낼 책에 들어갈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글까지 실으면 책의 부피가 너무 커질 것 같아 여기에 칼럼으로 싣는다.

아직 완성도가 좀 떨어지지만, 사람의 '몸'과 '마음에 대해 함께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인간은 동물 중에서도 가장 감정이 풍부한 존재이다. 이 풍부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어떤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이렇게 행동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똑같은 상황을 맞아도 다르게 반응한다. 왜 그런 것일까?

이런 질문은 우매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쉽게 대답한다. 사람마다 다르니까 그렇다고. 그렇다면 왜 사람마다 다른 것일까? 필자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 왜 사람마다 다른 것일까? 그리고 사람마다 다른 원인은 무엇일까?

 

인간은 지구상에서 현존하는 생명체 중에서는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개념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뜻이나 내용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식물’과 ‘동물’로 구분한 것은 인간의 개념적 사고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도 보완되게 되었다. 진화의 역사를 연구하다 보니 식물과 동물은 모두 진핵세균에 속하는 존재이고, 세균에는 진핵세균 외에도 이 세균의 탄생 이전에 원핵세균과 고세균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개념적 사고이다. 어떤 사물에 접했을 때 그 사물 각각에 대해 개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고 이를 ‘개념’으로 정리하는 것이 개념적 사고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 언어를 갖게 됨으로써 가능해졌다. 소위 말하는 이성적 사고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의 칼럼에서 여러 번 썼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인간이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것, 즉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인간의 겉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감정이 속 알맹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전에 감정적 존재이다. 그 이유는 인간도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로서 진화한 결과 지금의 인간이 형성되었고, 진화의 과정에서 생긴 생명체의 특성은 현재의 인간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인간을 생명체로 보지 않으면 인간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주장 중에 감성은 걷지 못하는 절름발이, 즉 이성을 업고 가는 힘이라는 요지의 말에 ‘일단 동의’한다. 니체는 더 나아가 사람이라는 것은 권력을 추구하는 강한 의지를 가진 존재, 즉 ‘권력에의 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정의했다. 이 주장에도 ‘일단 동의’한다. ‘일단 동의’한다고 한 것은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쇼펜하우어나 니체가 살던 시대는 철학계에서 ‘이성의 지배’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계의 철학은 칸트를 절정으로 해서 관념론이 지배를 하고 있었다. 그 후계자가 헤겔이었고, 또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스스로 유물론자라고 표방했던 마르크스는 실제로는 헤겔의 제자였다고 할 수 있다. 또 그 제자가 레닌이었다. 레닌은 관념론자의 정점인 헤겔 철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와 니체, 특히 니체의 철학은 이후 유럽에서 ‘근대철학’, 즉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즉 ’현대철학‘(이런 표현이 적합한지는 모르겠다)으로 경향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그래서인지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하는 사람 중에는 니체를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니체는 생명체의 여러 현상 중 극히 일부를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생명체에게는 ’권력에의 의지‘도 강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복종에의 의지‘도 강하다.

 

유럽 근대의 시기, 아직 쇼펜하우어나 니체가 살던 시기에는 인간의 인식을 ‘이성’과 ‘감성’의 영역으로 나누어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의 지적 영역이 많이 확장되었다. 동물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이런 구분법으로는 다른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이해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다른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도 생명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악어는 진화의 과정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갖게 된 존재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진화의 과정에서 그 이전 단계에도 알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알이 부화되도록 하고, 알이 부화되고 나면 자기 생명을 다하는 동물의 종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일 뿐이었다.

알이 부화되고 나면 그 이후에는 어미가 일체 새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 어미의 역할은 여기까지일 뿐이었고, 나머지 세상을 헤쳐 나가면서 살아남는 것은 새끼들의 몫이었다. 새끼가 부화되자마자 어미들에게 새끼는 관심 밖의 존재였다.

 

그러나 나일 악어 등 악어들은 이와 달랐다. 모래밭 속에 알을 낳고 어미는 먹이도 먹지 않고 포식자들이 자기 알을 훔쳐 먹지 않도록 지켜 준다. 이런 역할을 하는 동물은 어류나 양서류 중에도 많이 있다. 그러나 악어는 이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이 포식자들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입으로 물어서 물속으로 옮겨 주고 3개월 정도 포식자의 공격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해 준다. 현재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진화의 과정에서 그 어떤 동물도 보여주지 않던 모습이다. 공룡도 악어처럼 부화한 새끼를 보호했을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있지만, 이를 확증하는 데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현재 이런 사실에 대해 확증할 수 있는 것은 악어일 뿐이다.

 

악어의 이런 습성에 대해 쓰는 것은 이런 행위가 갖는 중요성 때문이다. 이후 파충류로부터 진화한 조류나 포유류는 모두 어미가 새끼를 부화시키거나 직접 낳고, 그리고는 새끼가 성인 개체가 되어 독립하여 살 수 있을 때까지 먹여 주고 천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교육)까지 시켜 준다. 어미들의 이런 행위가 없었다면 조류나 포유류는 멸종되고 말았을 것이다. 새끼가 생존하지 못하면 그 종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화의 과정을 잘 살펴보면 척추동물의 경우 더 진화한 종일수록 어미가 낳는 알이나 새끼의 수가 줄어들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앞으로 연구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미가 낳는 알이나 새끼의 수가 줄어들수록 어미의 새끼에 대한 보살핌은 더 극진해진다는 것이다.

어미의 보살핌이 더 극진해질수록 새끼는 어미에게 더 매달리게 되고, 따라서 어미와 새끼의 유대감은 더 돈독해진다. 물론 새끼가 성인 개체가 되어 어미 곁을 떠나게 되면 이런 유대감은 극도로 약화되거나 사라지게 되지만.

 

필자는 이런 과정을 가족의 기원, 더 나아가면 사회의 기원, 그리고 감정의 기원이라고 보고 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쌍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우선 가족의 기원이라고 보는 것은 어미가 새끼에게, 그리고 새끼가 어미에게 유대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끼가 알에서 부화만 되면 새끼가 알아서 생존하도록 내팽개치던 때와 달리 파충류인 악어는 새끼가 부화하고 나서도 일정 기간 천적의 공격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해 주는데, 조류나 포유류로 진화하면 악어와 같이 천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먹여서 살릴 뿐만 아니라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의 기술을 가르쳐 주기까지 한다.

 

이런 사실이 뭐 그리 중요할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지금 진화의 정점에 올라와 있는 사람 사는 사회를 보아도 그 모습은 크게 다르지가 않기 때문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형성된 가족의 형태를 이어받아 어미와 자식이 가족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현재로서는 아직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에 책임을 지는 아비가 일종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이런 현상도 점차 무너져 가고 있다. 자식이 죽으면 어미는 죽을 때까지 천추의 한이 돼 가슴에 묻고 살지만, 아비는 몇 번 눈물을 흘리고 시간이 지나면 자식의 죽음을 잊고 살게 된다. 어미의 자식에 대한 절절한 정이 가족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여자와 아줌마는 다르다고 한다. 애를 낳기 이전의 여자는 눈물을 잘 흘리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애를 낳고 나서 애를 키우면서 엄마가 되면 강한 존재로 변해 버린다. 자기 아이를 정상적인 성인으로 키우기 위해 악착같이 분투하는 엄마가 되는 것이다. 어미에게 자식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이다.

 

사회는 어미와 새끼 사이의 유대감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악어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미와 새끼의 유대감에서 최초의 사회, 즉 가족이 형성됐다. 이후 진화의 과정에서 더 많은 동종의 동물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이 최초의 가장 단순한 사회는 복잡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가족의 변종도 많이 생기게 되었다. 어미가 혼자 자신의 새끼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한 가족 전체가 가족의 자식을 돌보는 하이에나나 사자, 들개처럼.

 

이제 감정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이는 참으로 복잡한 문제이다. 어떤 것이 본능이고, 어떤 것이 감정인가? 이를 구분하기는 참으로 쉽지가 않다. 예를 들어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의 행위는 보호본능 때문이라고 한다. 새끼들이 장난을 치면서 노는 것은 유희본능이라고 한다. 새끼를 가르치는 것을 교육본능이라 칭하기도 한다. 이런 행위가 없었다면 조류나 포유류는 종 자체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본능은 진화의 과정에서 애초부터 주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진화의 과정에서 점차 생겨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가지고 있던 본능처럼 확실하게 지켜서 행동한다. 그러면 고등생물들의 이러한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모든 생명체에게 공통된 것은 생존본능과 번식본능이라고 한다. 이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를 주로 DNA의 작용 때문인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백 프로 바른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해석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선 살아남으려는 강한 본능이 없는 DNA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는 천적의 공격에 대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설사 이런 생명체가 운이 좋아 살아남았더라도 그 종이 강한 번식본능으로 후대를 낳고 자라나게 하는 틀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생명체는 멸종하고 말았을 것이다. 후대가 사라지는데 어찌 멸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살아남아 있는 생명체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본능에 적합한 DNA 구조를 가지고 있다. 35억 년이라는 기나긴 지구의 역사 속에서 지구의 생명체는 그 탄생 이래 지구 전체가 수억 년간 어름으로 뒤덮이는 절체절명의 시기, 시베리아 거의 전체에서 분출되는 마그마로 인해 지구가 너무 뜨거워져 지구 생명체의 95%가 멸종되는 위기의 시기, 공룡이 멸종되게 하는 소행성과의 충돌 등 여러 차례 대량 멸종의 위기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기를 넘어 이 지구상에 참으로 화려한 생명의 꽃을 피워 왔다. 그것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본능에 적합한 DNA 구조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만이 이 지구상에서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DNA는 이 지구상에서 생존과 번식에 적합하도록 진화해 왔다. 그런 DNA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생명체는 바로 도태되고 말았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DNA가 그 DNA를 가진 생명체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게 아니다. DNA는 수십억 년 동안 진화의 과정에서 생명체가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구조화된 산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필자의 이런 설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DNA의 역할을 너무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DNA가 생명체에게 모든 것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DNA는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고 또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그렇게 진화해 왔을 뿐이다. 그런 DNA를 가진 생명체가 더 진화한 생명체이든 덜 진화한 생명체이든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고등동물들의 경우 본능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은 행동을 많이 한다. 그것도 본능처럼 확실하게 행동을 한다. 예를 들어 포유류 중에서도 진화가 더 진전된 동물일수록 감정은 더 복잡해진다. 감정이 더 복잡해진다는 것은 여러 가지 감정을 더 깊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새끼가 죽었을 때 어떤 긴꼬리원숭이 어미가 느끼는 슬픔은 처절했다. 죽은 새끼를 업고 3일간을 돌아다니는 장면을 ‘내셔널 지아그래픽 채널’(NGC)에서 본 적이 있다. 이런 행위는 진화가 덜 된 다른 포유류에게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아프리카 들소의 경우 자기 새끼가 죽었을 때 새끼를 살려 보려고 계속 혀로 핥아 준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새끼가 일어나지 못하면 몇 시간 내에 포기하고 자리를 떠나고 만다. 이런 차이는 좀 더 진화한 동물과 좀 덜 진화한 동물의 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원래 모든 생명체에게 공통된 본능은 생존본능과 번식본능이다. 그러나 이런 원숭이나 들소의 행동은 생존이나 번식과는 직접 관련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죽은 새끼에 대해 아무리 관심을 갖는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생존이나 종의 번식에 도움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등동물들의 이러한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필자는 파생(派生: 사물이나 현상이 어떤 근원으로부터 갈려 나와 생기는 현상을 일컫는 말)본능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진화의 과정에서 그 이전에 없던 본능이 줄기에서 뻗어 나가는 나뭇가지처럼 파생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파생본능은 번식본능과 관계된 것이 많다. 어미는 단순하게 알에서 새끼를 부화시키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되게 되었다.

진화가 이루어지면서 수많은 알을 낳아서 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번식을 이룰 수 없는 종이 탄생했다. 조류나 포유류는 한 번에 새끼를 부화시키거나 낳을 수 있는 숫자가 대단히 줄어들었다. 이는 동시에 줄어든 새끼를 보호해야 멸종되지 않는 자연이 법칙에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어미와 새끼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어미는 새끼를 지극정성으로 돌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어미와 새끼의 유대관계는 돈독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필자는 이것이 감정의 진화를 가져오게 된 근본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어미가 새끼한테 느끼는 강한 유대적인 감정이 없다면, 즉 파생적인 강한 본능이 없다면 어미는 새끼를 먹이고 보호하고, 더 나아가서는 새끼 혼자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의 지혜와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다. 어미가 새끼에게 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그 종은 이미 멸종돼 버렸을 것이다. 아직 살아남아 있는 조류나 포유류는 이런 어미와 새끼 사이의 강한 유대감, 즉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복잡한 운동이 가능해질수록 두뇌도 발달하게 되는데, 그럴수록 감정의 종류는 더 많아진다. 감정이 더 풍부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감정이 지속되는 시간도 더 길어진다. 사람의 어미는 자식이 죽었을 때 이를 평생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산다고 한다. 이는 어미의 자식에 대한 유대감이 극도로 강화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식물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필자는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본능에 따른 결과라고 본다. 본능과 감정은 구별되어야 한다. 본능은 두뇌의 작용과는 상관없이 보이는 반응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고 하는데, 이는 지렁이의 본능이 작용한 것일 뿐 감정이 작용한 것은 아니다. 감정은 본능이 두뇌라는 필터를 거쳐서 반응하면서 보이는 기제이다. 식물이나 지렁이에게는 두뇌가 없다. 따라서 식물이나 지렁이가 보이는 반응은 감정이 아니라 본능에 따라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피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은 현재로서는 진화의 최고 정점에 서 있다. ‘현재로서는’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앞으로 수억 년이 지나면서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이나 다른 동물에게 어떤 변화가 올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얘기만은 분명하게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인간이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두뇌가 발달해 있고, 따라서 감정도 가장 풍부한 존재라고.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앞에서 얘기한 파생본능에서 발생한 감정을 넘어 감정 자체가 사람을 지배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두뇌가 덜 발달한 동물은 기억력도 약하기 때문에 잘 잊어버린다. 따라서 하나의 감정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사람도 시간이 지나가면서 한때 가졌던 감정이 누그러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강한 인상이 박혀 있는 감정은 오래 지속된다. 앞에서 얘기한, 자식의 죽음을 평생 가슴에 묻어 두고 산다는 어미의 감정은 한편으로는 강한 유대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뇌의 발달로 인해 한때 가졌던 감정이 계속 기억되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 신경계통의 질환으로 분류되고 있는 병 중에는 신경계 질환이 아닌 것이 너무 많다. 우울증, 조울증, 불면증, 화병 등 상당히 많은 병이 신경계 질환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이들 병은 신경계통에 이상이 생겨서 생기는 병이 아니라 몸에서 생긴 이상이 두뇌에 영향을 미쳐 생겨난 질환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몸의 이상이 해결되면 이런 질환이 사라진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충분히 보아 왔기 때문에 자신 있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가슴, 등, 어깨, 목 쪽의 근육이 풀리면 신경계 질환으로 분류되는 이런 병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이런 병을 신경계의 질환으로 보고 약을 먹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통해 몸을 펴고, 그럼으로써 굳어 있던 근육을 풀게 하는 것이 이런 병에 대한 해법으로서 정답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글의 큰 줄기에서 벗어나 여기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지나가는 것은 이런 병은 ‘몸’의 이상이 ‘두뇌’에 영향을 미쳐 ‘감정’에 큰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감정은 두뇌라는 필터를 거쳐 생겨나지만 기본적으로는 몸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몸이 좋으면 기분도 좋고 몸이 나쁘면 기분도 좋지 않다.

 

앞에서 제기한 감정의 본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인간은 원래의 본능과 그 본능에서 파생한 본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 또 두뇌가 발달하면서 이로부터 유래된 복잡하고 풍부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 유럽 근대의 시기에는 인간을 이성 중심으로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을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감정에 의해 행동하는 존재로 보게 되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감성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감성에 ‘어필’하지 못하는 상품은 팔리지를 않으니까. 그래서 기업체들은 소비자들의 감성에 어필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서로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보다는 좀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몸에서 바라는 것이 두뇌에 반영되고, 이것이 두뇌에서 각종 작용을 거쳐 몸에 지시를 내리면 그것이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는 ‘감성의 시대’라기보다는 ‘몸의 시대’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양자 사이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감성이라는 것은 감각적인 것을 말한다. 그 당시의 문화적 흐름에 따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숭배하는 것에 크게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장기적으로 보면 불교국가였던 고려와 유교국가였던 조선에 살던 사람들은 좋아하는 게 달랐다. 종교에도 큰 변천이 있었지만, 이와 함께 문화에도 큰 변천이 있었다. 도자기 하나만 보더라도 청자에서 백자로 선호하는 게 달라졌다. 한말에 서양 문화가 침투해 들어오면서 양반들이 보물처럼 지켜 오던 상투를 잘라내고, 또 한복 대신 양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단기적으로 보면 ‘유행’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지금처럼 세상이 빠르게 바뀌는 시대에는 하루가 다르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달라진다. 기업체는 계속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다른 기업체와 경쟁을 한다. 이 경쟁에서 지면 그 기업체는 몰락한다. 때문에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진다. 소비자의 감성, 즉 감각에 더 접근하는 제품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생명체의 역사에서 ‘몸’이 중심이 되지 않은 시기는 없었다. 생명체는 모두 우선 자신이 살고 동시에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 생명체로서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자신이 살고 동시에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 살고 번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도 벌였고 또 살고 번식하기 위해 전쟁을 그만두는 평화의 시기도 있었다. 이런 문제를 이 글에서 제대로 다루기는 어려운 것 같다. 진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인간 이전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다양한 감정, 예를 들어 권력욕, 명예욕, 질투심 같은 것까지도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어떤 종교를 믿든 어떤 사상을 갖든 그것은 별 상관이 없다. 종교와 사상은 두뇌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두뇌에서 처음에 신경세포가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종교와 사상은 달라질 수 있다.

기독교이든 이슬람교이든 불교이든 힌두교이든 처음에 만들어진 신경세포의 경로가 한번 정해지고 나면 사람들은 그렇게 믿게 되어 있다. 더구나 그 사람이 사는 생활의 영역 주변에는 일정한 종교나 사상이라는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거기에 습관이 들어 한번 먹은 생각, 그것이 종교이든 사상이든 상관없이 죽을 때까지 쉽게 변하지 않게 되어 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서로 종교나 사상의 차이를 가지고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종교나 사상이 절대 진리라고 믿고 이를 전파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행위를 말릴 수도 없다. 필자는 종교를 부정하지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종교의 세계’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무신론’도 일종의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무신론자는 자기가 믿고 있는 무신론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타고난 숙명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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