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이경록..광해왕과 김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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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이경록..광해왕과 김만일.."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7.08.16 10:57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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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임진왜란과 함께 한 제주도의 영웅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우리가 기억하는 인물은 이순신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란을 극복하고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경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동 시대의 무장인 이순신(1545-1598)과 이경록(1543-1599)의 관계는 선조9년(1576년) 둘 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나란히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이가 두 살 차이가 나는 이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같은 곳에서 함께 근무하며 동고동락했다.

역사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오르게 된 첫 번째 계기는 1587년 가을에 발생한 녹둔도사건 때문이었다.

함경도 경흥부에 있는 녹둔도는 두만강 하구에 있는 하중도인데, 이곳에 군사들의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하기 위해 개간한 논밭, 즉 둔전이 설치됐다.


조선만호인 이순신은 녹둔도의 둔전관 직책까지 맡아 농사를 관리했다.
가을걷이를 하게 되자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녹둔도로 들어가 추수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인근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갑자기 쳐들어 오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순신과 이경록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여진족을 물리쳤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조선군 11명도 희생됐다.
이때 함경도 북병영 방위의 총책임자인 종2품 병마절도사 이일은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이순신의 병력지원 요청을 묵살했다.


그런데 조선군 희생자가 발생하자 이일은 자신에게 닥칠지 모를 책임을 모면하고자 이순신의 목을 베려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사건 당시 군사가 부족해 지원병을 요청했을 때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에 관한 문서도 있다“고 항변했다.


선조는 “장형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하라”고 명령했다.

이경록과 이순신은 부하들 앞에서 곤장을 맞는 수모를 겪은 후 관직을 박탈당한 채 전쟁터에 따라나서는 백의종군을 하게 됐다.


이순신은 이후 임진왜란 때에도 모함을 받아 백의종군 했는데 첫 백의종군을 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녹둔도사건 발생 이듬해인 1588년 여진족이 다시 침입해 왔을 때 이경록과 이순신이 큰 전과를 올린 덕분에 사면을 받게 된다.


이후 이경록을 나주목사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했다.


임진왜란때 이순신이 세운 전공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경록이 나주목사 재직시 임진왜란이 벌어져 왕이 피난하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의병장 김천일과 함께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올린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선조는 이후 1592년 7월13일 이경록을 제주목사로 임명했다.


역사적으로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패한 것은 제주를 선점하지 못한 것이 최고의 실책이었다는 평가를 한다.
만약 일본이 본토가 아닌 제주를 먼저 점령하고 전쟁을 길게 끌고갔다면 제주까지 사수할 능력이 당시 조선에는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 군사적 배려 차원에서 이경록을 제주목사로 임명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경록은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고 정사를 잘 돌보아 늘 인사고과에서 높은 점수를 얻어 승진을 거듭했다.


이경록 제주목사 임명은 전략적 요충지인 제주도를 일본에게 빼앗겨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과 제주로부터 전쟁에 필요한 말을 들여올 수 있기를 바라는 선조의 전략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3개월 가량 지났을 무렵인 1592년 7월 중순경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경록은 제주의 방어시설들을 정비하는 한편 제주에 있는 군사들을 훈련시켜 바다를 건너가 왜적과 싸을 생각에 몰두했다.
 

김만일(1550년생)은 이경록(1543년생)보다 일곱 살 아래인데 이때 김만일은 제주에서 안주하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전쟁터에 나서겠다는 이경록의 의지를 보면서 헌마를 결심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헌마는 ‘대가없이 자발적으로 나라에 말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경록 목사 이전이나 이후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사람들은 사리사욕을 위해 민간의 말을 빼앗았다가 나중에 그 비리가 드러나 파직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경록 목사에 대해서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

임진왜란 발발 3개월만인 1592년 7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경록은 전쟁이 끝난후까지 계속 재임함으로써 최장기간 제주목사 직을 수행하는 기록을 남겼다.


제주를 귀양살이처럼 생각하는 제주목사들 중 극소수만이 3년 가량 재임했고 대부분은 2년 이하를 근무했지만 이경록은 1599년 제주에서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7년 가량 제주목사직을 수행, 임진왜란 내내 제주와 운명을 같이 한 것이다.


이경록은 제주성 바깥에 도랑을 파고 성 위에 제승정을 짓는 등 방어시설을 정비했고 또 나무로 만든 성인 명월진성을 돌로 쌓아 개축했다.


임진왜란 종전 무렵엔 성산포에 산성을 쌓던 중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1599년초 병으로 사망했다.

이경록이 죽자마자 제주에는 지난 7년간 없었던 해괴하고 불미스러운 일들이 잇따라 벌어졌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제주판관 이계선은 그곳 목사 이경록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경록이 죽자 혼자서 기뻐하고 다행스럽게 여긴 나머지 풍악을 울리고 술잔치를 벌이기까지 하여 상여가 곁에 있는데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 마음 씀씀이가 지극히 형편없습니다..”


선조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들여 이계선을 파직시켰다.


이계선의 뒤를 이어 온 이정생 판관은 성윤문 목사와 치정사건을 벌여 파직되기도 했다.


“둘은 본토 기생을 간통하고 서로 다투기까지 하여 위 아래로 관계가 어긋나는 일이 많고 인심이 매우 놀라워하고 있다..”(선조실록)

 

광해왕과 제주의 헌마공신 김만일..

 

 
이경록 목사가 사망한 후 피해는 고스란히 김만일에게 다가왔다.

나라를 위한 목마를 지원해준 이경록과 달리 김만일의 말을 개인의 뇌물이나 부의 축적수단으로 빠앗아가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김만일의 눈물나는 이야기는 종마를 지키기 위해 눈을 못보게 만들거나 귀를 찢거나 하는 등의 그의 행위에서 잘 나타난다.

하도 많은 피해를 당하던 김만일은 1천필의 말중 5백필을 끌고 직접 한양으로 올라가 광해왕에게 헌마해 버렸다.

광해왕은 누구인가..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지 15년만에 인조의 무력정변으로 쫓겨나 비록 폐주가 되었지만 조선왕조 역사상 보기드문 현명한 군주였다.


명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사망하자 방계혈통으로 얼떨결에 왕이 된 선조와 달리 광해군은 준비된 왕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18세에 불과했지만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하며 임진왜란을 진두지휘했다.


선조가 압록강변 의주로 향했을 때 선조는 광해군에게 함께 피난하지 말고 본국에 남아 국정을 수행하라고 명령하면서 조정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이끄는 조정을 분조라고 불렀다.
광해군은 전쟁에 임하는 장수들과 의병장들에게 상을 내리며 격려했고 관리의 임면활동도 하는 등 실질적으로 나라를 운영했다.


광해군은 준비된 왕이자 외적의 침략을 받았을 때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는 ‘전쟁수행능력을 검증받은 왕’이었다.


김만일(金萬鎰)은 경주 김씨 입도조(入島祖)인 김검룡(金儉龍)의 7세손으로, 남원읍 의귀리 출신이다.

김만일은 조선 선조 시기 전국 최대의 목장 지대였던 제주도에서 임진왜란 발발 당시 가장 많은 말을 소유하고 기르던 부자였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선조 27) 조정에서는 전마(戰馬)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전쟁의 피해로 전국 대부분의 목장이 제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정부가 김만일에게 전마를 요청하자, 김만일은 기꺼이 500필을 바쳤다.

그 공로로 김만일은 높은 관직과 포상을 받았는데, 1618년(광해군 10) 종2품 가선대부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제수받았고, 그 뒤 다시 정2품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세 번째로 말을 바쳤던 1629년(인조 6)에는 다시 직급을 높여 종1품 숭정대부를 제수받았다. 김만일은 역대 제주인으로는 가장 높은 벼슬을 받게 되었다.

남원읍 의귀리(衣貴里)는 마을 이름이 붙게 된 까닭은 그 마을에 살던 김만일이 높은 관직과 함께 관복을 왕으로부터 받아 돌아왔기 때문이다.

제주도 목장의 하나인 산마장(山馬場)을 감독하는 감목관 직책을 특별히 정하여 경주 김씨 집안에서 대대로 세습하도록 특혜를 베풀었다.

당시 관영 목장인 관둔(官屯)을 관리하는 직책인 감목관은 판관과 현감이 겸임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10소장의 관둔은 3수령이 겸임하지만, 산마장만은 김만일 집안의 감목관에게 감독권을 주도록 예외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대체로 좋은 말 한 필이 노비 3명, 또는 포목 50동(同)에 해당할 정도로 높은 값이었다.

게다가 “제주 말은 그 값이 원래 비싼 데다가 나주(羅州)에 오게 되면 이미 한 곱이 되고, 다른 도에 가면 또 한 곱을 더하므로, 사람들이 사기 어렵다”[『문종실록』 권7 문종 1년 5월 기해]는 지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주 높은 상품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말을 빼돌려 부를 축적하려는 목사와 현감, 또는 군관들의 횡포가 대단했었다. 목사들 중에는 민간에서 빼앗은 말을 중앙 고관들에게 뇌물로 바치는 자들도 많았다.

때때로 중앙에서 국영 목장의 관리 실태를 확인하라고 관리들이 파견되었는데, 이들 역시도 민간이 기르는 말을 함부로 빼앗으려는 횡포가 지방 관리 못지않게 심했다.

이런 상황은 김만일에게도 위협적이었다.

제주섬에 귀양 왔던 이건(李健)은 “좋은 말이 있으면 삼읍의 원님들이 다투어 빼앗아 가므로, 만일은 종자가 끊어질까 걱정되어 일부러 눈에 상처를 내 봉사가 되게 하거나, 병신을 만들어 잘 보존해 종마로 삼았다”[『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고 적고 있다. 나름대로 자구책을 모색했던 것이다.

 

1618년(광해군 10) 점마(點馬)를 위해 파견한 경래관 양시헌(梁時獻)이 김만일과 아들 3명을 모두 잡아다가 형을 가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왕이 김만일 부자를 풀어 주고 오히려 양시헌을 처벌하였다.

적어도 조선 후기에 경주 김씨 집안만큼 높은 관직을 계속 이어 가며 수여받고 실제 업무를 수행한 집안은 제주도 내에서는 경주 김씨 말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김만일과 그의 후손들은 약 200여 년간 산마감목관을 역임하며 말 사육에 힘을 쏟아 제주마 육성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운의 왕 광해군과 김만일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치루는 동안 피폐해진 나라를 위해 걱정하는 왕을 위해 군마 5백필을 직접 왕에게 끌고가 기꺼이 헌마한 것으로 애국의 충정을 느끼게 한다.

제주에서는 굶어죽는 제주민을 위해 사재를 털어 구휼에 나선 의녀 김만덕과 함께, 헌마공신 김만일은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헌마공신 김만일의 평전을 보면 말을 지키려는 그의 눈물겨운 사투가 느껴질 정도로 인간의 숭고함마저 느끼게 만든다.

임진왜란의 영웅은 이순신이었지만 이경록도 광해왕도 김만일도 제주도의 영웅이었다.

그런 김만일을 위한 사업들이 드디어 제주에서 펼쳐진다.


(사)김만일기념사업회(이사장 김부일)와 한국마사회 제주지역본부(본부장 정형석)가 16일 오후 3시 한국마사회제주지역본부에서 ‘헌마공신 김만일기념사업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력을 맺는다.


이들 두 단체는 ‘헌마공신 김만일상' 제정과 성역화사업 및 말산업 발전과 전통 마보존을 위한 교류협력에 나서기로 했다.

제주도에 또하나의 의미있는 일들이 펼쳐질 전망이라 기대된다.
 

 

(본 칼럼 내용은 헌마공신 김만일 평전과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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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2017-08-17 10:37:07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주마 2017-08-17 09:26:29
네이버를 참조 했다고 하는데 네이버 지식백과에도 남원읍 의귀리 사람이라고 나오는데
표선면이라함은 어디서 나온 정보인가요??

제주마 2017-08-17 09:21:01
김만일은 표선면 의귀리가 아니라 남원읍 의귀리 사람입니다.
수정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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