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용수리 절부암..고산1리 강사철부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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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용수리 절부암..고산1리 강사철부부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8.16 21:5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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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비로 두 시신 합장..고씨 목맨 절벽을 절부암으로 명명


고산1리 강사철부부묘


고산1리 강사철부부묘 業武康士喆妻高氏表節碑
시대 ; 조선 후기
유형 ; 무덤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위치 ; 한경면 고산1리 당산봉 앞

 

▲ 고산리_강사철부부묘

용수리 절부암의 주인공 節婦 고씨의 묘비가 당산봉 앞에 있다. 높이 132㎝, 너비 45㎝, 두께15㎝인 이 비석은 1867년에 세워졌다.

전면에 〈業武康士喆妻高氏表節碑〉라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氏耽羅業武高應秋之女 生于道光乙未 咸豊癸丑嫁于康士喆 甘與食貧 同年十一月十三日 其夫刈竹於遮歸島 半洋 沒 屍沈不見 氏巡海號哭逐波落泳 曠日絶粒 同月十五日乘夜 自經於沿樹後三日厥夫之屍 果至於其下 誠己感天 死卽同穴 以若村婦能盡殉節 誠一代所無 無千古 而罕有營府題意已多嘉尙繡道 宗文尤用 激雅力然 旌門之於請事係關重 而旣無子女 終鮮親戚 卓絶風聲 幾將泯滅于斯 矣常慨貶 乃此勒石 敢題黃絹之辭用來玄冥之節〉 좌측면에는 〈看役有司 金應河書〉 우측면에는 〈同治六年仲夏 知州 愼栽佑識〉이라고 새겨져 있다.(북제주군 비석총람 796쪽)

필자의 해석(형편 없음) ; 씨는 탐라업무 고응추의 딸이다. 도광을미년(1835)에 태어났으며 함풍계축(1853)년에 강사철에게 시집갔다.

甘與食貧(가난하였다?) 그 해 11월 13일 남편이 대를 베러 차귀도에 갔다. 바다에 빠져 죽었으나 시신이 가라앉아 찾을 수 없었다.

고씨는 울며 바닷가를 돌아다니고 逐波落泳(?) 曠日絶粒(?) 같은 달 15일 밤을 틈타 스스로 바닷가 나무에 목을 매었는데 3일 후에 남편의 시체가 그 아래 떠올랐다.

誠己感天 死卽同穴(정성은 하늘을 감동시키고 죽어서는 같이 묻히었다?) 또한 시골 부녀자로서 능히 순절을 다하였으니 천고에 다시 없을 일이다.

而罕有營府題意已多嘉尙繡道(영부에서 그 정숙한 도를 가상히 여겨 글을 써 주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宗文尤用 激雅力然 旌門之於請事係關重(?)

그러나 자녀와 친족이 없으니 뛰어난 절개에 대한 높은 이름이 장차 사라지고 기개가 떨어질까 걱정되어 이 돌에 … 새긴다?)

고종4년(1867) 대정판관 신재우(愼哉佑)는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알리고 관비로 두 시신을 합장하여 장례를 치뤄 줬으며, 고씨가 목맨 절벽을 절부암이라 명명하고 마애명을 새겼다.

또한 제사 비용 충당을 위해 제전(祭田)을 마련해 준 뒤 매년 1회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용수리민들은 지금도 해마다 음력 3월 보름이면 고씨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당산봉 밑에 있는 이들 부부의 묘도 매년 벌초하고 있다.(제주신문 4328년 5월 21일, 제민일보 1465호, 북제주군의 문화유적Ⅰ 155쪽)

용수리 절부암을 참조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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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홍 2023-11-29 09:53:52
고산 1리 당산봉 앞에 ‘업무(業武) 강사철 아내 고씨의 절개를 드러내는 비’의 뒷면에, 1867년 지주(知州, 주의 일을 결정하여 처리함, 제주 판관 시절임) 신재우가 절부의 행적이 없어지지 않도록 열부의 행적을 적어 놓았다(제주문화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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