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서귀포 횡단도로 언제 뚫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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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서귀포 횡단도로 언제 뚫렸을까"
  • 김태홍 기자
  • 승인 2017.09.17 19: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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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근 전 제주도 건설국장, 일주도로와 교량 건축사업 집대성한 ‘제주 건설사’ 발간

일주도로(181㎞)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는 김중근씨(왼쪽).
김중근 전 제주도 건설교통국장(76)이 공직생활 중 공사를 맡았던 도로와 교량 건축사업을 집대성한 ‘제주 건설사’를 발간했다.

그는 5·16도로는 1932년 13㎞만 개설됐고, 이후 17㎞를 연장해 속칭 배고픈 다리 36곳이 연결됐으며, 읍·면이 시행한 접속공사로 제주읍 6㎞와 서귀면 8㎞를 더해 총 44㎞의 도로가 1935년에야 완공됐다고 책자에서 밝혔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5·16도로를 통해 제주에서 서귀포로 가던 중 아들 지만군(당시 6세)이 성판악에서 소변을 보는 동안 도로포장 상태가 거친 이유를 지적한 일화도 소개됐다. 당시 도로포장은 아스콘공법이 도입되지 않아 작은 골재를 깔고 아스팔트원유를 뿌려 마감하면서 거칠 수밖에 없었다고 필자는 회고했다.

 
1962~1969년까지 8년간 진행된 일주도로 공사는 181㎞ 중 30%인 60㎞만 포장됐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순시 당시 권용식 도지사의 업무보고에서 1개월 사이 공사비가 7000만원이 증액된 것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도정이 발칵 뒤집어졌다고 책자에서 밝혔다.

예산부족으로 지지부진했던 일주도로 미포장 구간은 내무부 기획관리실장에서 도지사로 부임한 권용식 지사의 노력과 그의 부인 한신동씨가 육영수 여사에게 건의하면서 박 대통령이 특별교부세 2억원을 전격 지원하면서 활기를 띄었다는 것.

이 과정에서 도민들이 자원해 전체 노동력 중 25%를 보탰고, 골재를 기부하면서 일주도로 포장 대역사가 완성됐다.

 
 
그런데 책자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병역 미필자 등 ‘구악일소’ 차원에서 결성된 ‘국토건설단’이 5·16도로에 투입됐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토건설단은 어승생댐 건설을 위해 1968년 1진 171명이 부산에서 제주에 처음 도착했다”며 “이들은 나중에 1100도로 공사에 동원됐지만 5·16도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 전 국장은 “한라산 제1횡단도로는 1963년 2월 6일 국도로 지정되면서 ‘5·16도로’로 명명됐다”며 “제주에서 가장 먼저 개통된 국도이자, 역사성이 있는 도로로 선대들의 땀과 희생이 지금도 이 길에 남이 있다”고 말을 맺었다.

그는 또 제주도지의 도로 개황 부분에 1861년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6개 노선이 도로가 표시됐다고 기록했으나 대동여지도 상의 도로는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표시를 위해 직선으로 그려 놓은 것으로 사실상 도로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김중근 전 제주도 건설교통국장
그는 이어 조선시대 교량은 9곳이 있다고 기록됐지만 탐라지초본, 대동지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강역총도를 보면 최대 19개의 교량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도내에선 일제강점기인 1914년부터 광복되기 전까지 39개의 교량이 가설됐다. 현재 도내 교량은 총 390개소다.

그는 “많은 도로와 교량을 설계·감독·공사하면서도 현재 이용되고 있는 도로와 교량이 어떻게 형성됐고, 언제 개설됐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의문을 가지고 도서관을 출입하며 옛 문헌과 신문자료를 확인한 끝에 ‘제주 건설사’를 발간하게 됐다”고 말했다.

1941년 한림읍 대림리 출신인 저자 김중근씨는 1960년 한림공고를 졸업하고, 그 해 제주시 건설과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남제주군과 북제주군 건설과장, 제주시 도시과장, 제주도 건설과장, 건설교통국장을 역임하고 2000년 퇴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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