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영국 선박 연안측량..귀덕1리 환해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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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영국 선박 연안측량..귀덕1리 환해장성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9.18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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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직 목사 그 해 겨울 도민을 총동원 환해장성 크게 수축'


귀덕1리 환해장성

 
귀덕리 환해장성(環海長城)
위치 ; 한림읍 귀덕1리 바닷가
유형 ; 방어유적(환해장성)
시대 ; 고려-조선

 
 

제주도는 예로부터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아 괴로움을 당하였으므로 이를 막고자 해안에 성을 쌓아 방비하였다.

환해장성은 고려 장군 김수와 고여림이 쌓도록 했다는 기록과 삼별초가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장성이 김수, 고여림이 제주에서 생존한 기간(1270년 9월 입도, 11월 삼별초 이문경 명월포로 상륙, 금덕전투에서 김수 전사, 송담천전투에서 고여림 전사)으로 보면 고려 때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 헌종 11년(1845) 6월에 영국 선박 1척이 우도 앞바다에 1개월이나 정박하여 삼읍의 연안을 측량하고 돌을 모아 회를 칠하여 방위를 표시하므로 목사 권직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에 대비하였다.

이 때 대정현 사계리 사람 유명록이


"저 양이와 힘으로써 정면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싸우지 않고 파괴할 수는 있습니다. 소인에게 화약을 주시면 배에 몰래 싣고 접근하여 화약에 불을 놓아 양이와 함께 죽겠습니다."


하니 권직 목사가 그 충의심에 감탄하여 우대하고 화약을 준비하고 날을 정하여 시행하려던 중 영국 배는 홀연히 돛을 달아 동북쪽으로 떠나가 버렸다.(제주통사 181-182쪽)

권직 목사는 그 해 겨울 도민을 총동원하여 환해장성을 크게 수축하였다 한다. 지금 해안에 남아 있는 자취는 바로 이 때의 것이다.

귀덕리 환해장성은 해안도로변에 약500m 정도가 남아 있는데, 성 위의 폭은 1m쯤 되며, 성 안쪽에는 폭 1.5-2m, 높이 1m 정도의 회곽도(군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가 남아 있어 환해장성의 축조 양식을 알아볼 수 있다. 특히 이곳에는 배수구가 있는 것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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