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명의..동명리 문수동 월계진좌수(진국태)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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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명의..동명리 문수동 월계진좌수(진국태)의 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9.2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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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사절..의술 진국태,풍모 양유성,풍수 고홍진,점술 문영후


동명리 문수동 월계진좌수(진국태)의 묘


동명리 문수동 진국태의 묘

위치 ; 한림읍 동명리 문수동 마을에서 500m쯤 남쪽으로 간 곳의 오르막길 동쪽 경작지 안에 있다. 길가에서 물탱크가 보이는 곳이 진좌수 묘가 있는 밭이다.
시대 ; 조선
유형 ; 무덤

 

 

 

진국태는 조선 후기 제주의 명의(名醫)이다. 자는 중서(仲舒), 호는 순암(順菴)·월계(月溪). 일명 진좌수라고도 한다. 제주도 입도조 진계백(秦季伯)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진정적(秦廷績)이다.


전설에 따르면, 진국태가 다른 마을로 글공부를 하러 밤에 다니게 되었는데, 여인이 항상 나타나 구슬을 입에 물고 서로 입으로 넘겨주며 놀게 되었다. 여인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그대로 했더니 나날이 그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제자의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눈치 챈 훈장은 진국태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범상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다시 여인이 나타나 구슬을 주면 그 구슬은 여의주이니, 여의주를 입에 넣거든 바로 삼키고 하늘과 땅과 사람을 쳐다보라고 일러주었다. 다시 여인을 만난 진국태는 구슬을 건네받자 구슬을 삼킨 후 사람만을 보았다.


이 사실을 들은 스승은 “네가 구슬을 삼킬 때 하늘과 땅을 아니 보고 사람만 보았다니 상통천문(上通天文) 하달지리(下達地理)는 되지 않겠지만 사람의 병을 너의 뜻대로 고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신의(神醫)라 일컬어졌을 만큼 의술에 능통했던 진국태는 월계 진좌수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멀리 중국까지 그 명성이 전파되어 중국인들이 처방을 청해오기도 하였다. 진국태가 죽은 뒤에도 중국인들이 찾아와 “의성(醫星)이 동남쪽에 떨어졌으니 이 지방에 명의(名醫)가 죽었다”며 진국태의 죽음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병에 걸린 사람들이 진국태의 무덤을 찾아가 빌고 있다. 흔히 탐라사절(耽羅四絶)이라 하여 의술에 뛰어난 진국태, 풍모에 뛰어난 양유성(梁有成), 풍수지리에 뛰어난 고홍진(高弘進), 복서점술(卜筮占術)에 뛰어난 문영후(文榮後) 등 네 사람을 뽑고 있다. 김석익(金錫翼)이 진국태를 칭송하여 지은 찬시(讚詩)가 현재 전해지고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조선 중기에 명월리에 진 좌수가 살았다. 그의 이름은 국태(國泰)요 호는 월계로서 의술이 능하여 유명하였다. 비석에는 康熙 庚申年生 乾隆 乙丑年終으로 되어 있다. 즉, 1680년에 태어나 1745년에 사망하였다. 묘비는 소화14년 즉 1939년에 세워진 것이다.

진좌수가 어렸을 적 일이다. 한 10리쯤 떨어진 곳(애월쪽)에 있는 서당에 다녔는데 도중에 우거진 숲과 침침한 개울이 있었다. 하루는 글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서 있고 아담한 방에서 예쁜 처녀가 창문을 바스스 열며 소년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가까이 가자 처녀는 손뼉치며 소년을 불렀다. 소년은 마음이 끌려 처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처녀는 소년을 맞아들이고 놀이를 시작했다. 오색찬란한 구슬을 입에 물고 도글도글 굴리다가 소년의 입으로 넘겼다. 소년도 입에 넣어 도글거리느라니 처녀는 제 입술을 소년의 입에 대고 구슬을 받아가곤 했다. 소년은 한없이 달콤했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찾아들 때야 소년은 집으로 향했다.


이튿날도 처녀는 기다리고 있었고 놀이는 반복되었다. 이렇게 수십일이 계속되니 소년이 몸이 이상해졌다. 핏기가 없어지고 말라가며 공부할 정신이 아니 나는 것이었다.


서당 훈장이 눈치채고 소년을 불러 앉혀 다그쳤다. 소년은 사실을 이야기했다. 훈장은 이야기를 듣고나서
"처녀가 구슬을 물려 주거든 꿀꺽 삼켜 버리고 즉시 하늘을 본 다음 땅을 보고 다음에 사람을 보아라."
하고 단단히 지시를 했다. 소년은 그 말대로 이행할 것을 단단히 다짐했다.


이튿날 소년은 처녀가 주는 구슬을 받아 물고 몇 번 굴리다가 꿀꺽 삼켜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으리으리한 기와집은 사라지고 처녀는 꼬리가 아흔아홉 달린 여우로 변해서 달려들었다. 소년은 겁이 덜컥 나서 하늘도 땅도 볼 겨를이 없이 사람 살리라고 외치면서 내달았다.

도망치는 소년의 눈에는 맨처음 훈장의 모습이 보였다. 훈장은 걱정이 되어서 동네 청년들을 데리고 뒤쫓아와 근처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훈장이 얼른 내달아 담뱃대를 휘두르며 호통을 치자 여우는 도망쳐 버렸다.

훈장이 소년에게 물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했느냐?"
"너무 겁이 나서 하늘을 볼 것도 땅을 볼 것도 잊어 버리고, 살려 줄 사람을 찾다 보니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허! 정히 아쉽다. 하늘과 땅을 보았더라면 상통천문하달지리(上通天文下達地理)했을 텐데, 너는 사람을 보았으니 의술만은 능하겠다. 내일부터는 서당에 오지 않아도 좋다. 이제 내가 가르칠 것은 없다."


훈장은 이렇게 말하고 가 버렸다. 그 후로 소년은 의술을 스스로 통달하여 명의가 되고 좌수를 지냈으므로 월계 진좌수라 부르게 되었다.

진좌수는 신기하게 병을 잘 고쳤다고 전해오며, 일생 동안 돈을 한푼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 살았을 때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까지도 사람의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한다.(제주도의 문화유산. 171-179쪽) 심지어는 오늘날에도 병원에서 구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 사람은 진좌수에게 의지하여 병을 고친다고 한다. 동명리 양○○씨의 말을 들어 보자.


"제물이나 호꼼 허영 강 진좌수 묘 산담 안에 누엉 밤을 지내는 거라. 경햄시민 진좌수가 나타낭그네 이 풀을 달영 먹으라 하든지 아무아무 괴길 먹으라 하든지 허영 그걸 먹으민 낫앙 돌아댕겼덴 허주. 명월리 아무개도 경허였덴 허고, 문수동에도 경허연 살아난 사름이 지금도 살암젠 허난 어떻헌 말산디."

진좌수에 대해서는 수많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⑴ 월계 진좌순 그 어른이 하도 이름난 어른이라부난 살아온 말을 몬 고를 수가 어수다. 허주마는 될쳇 종잰 괴괴작박으로 안뎅 허듯 진좌수가 두린 때로부터도 특출헌 디가 시였수다. 아인 때부터 글을 몬 가르치지 아니허여도 글이 자통(自通)허연 하로은 글청이 간 노는디 한 서생이  사장(훈장)고라 "귀양감을 유배옝 허는디 무사 흐를유(流)자를 썸수겐" 허난 사장도 몰란 대답을 못허연 "그건 타졍 무신거 허젠? 놔 둬시민 알아지주." 허난 진좌순 조끗디 싰단 질문헌 서생고라 솔째기 "물은 흐르민 돌아오지 안 허고 귀양가도 돌아오지 못 허난 흐를유(流)잘 썸시녠" 골았수다. 사장이 진좌수 곧는 말을 들언 놀래여수다.

또 한 번은 말고랠 놓앙 글을 지으렌 허난 진좌수가 글을 짓되 "外柄天北斗 中樞地洛陽"(외병천북두 중추지낙양)이옌 허였수다. 글 뜻은 "몰고래가 돌아가난 그 조록은 북두칠성 도는 것광 곹으곡, 가운딧 지둥은 중심을 맹그난 낙양 땅과 곹으다." 한 말이우다. 그게 비멘한 글이우꽈?


《월계 진좌수는 그 어른이 하도 이름난 어른이기 때문에 살아온 이야기를 모두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될성부른 종자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듯 진좌수가 어린 때부터도 특출한 면이 있었습니다. 어린 때부터 글을 끝까지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깨우쳤습니다.

하루는 서당에 가서 노는데 한 서생이 훈장님에게 "귀양가는 것을 유배라고 하는데 왜 흐를流자를 씁니까?" 하고 물으니 훈장님도 몰라서 "그건 따져서 뭘 하겠느냐? 놔 두면 차차 알게 된다." 했습니다.

이 때 진좌수는 옆에 있다가 질문한 서생에게 작은 소리로 "물은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고 귀양가도 돌아오지 못하니 흐를流자를 쓰는 거잖아."라고 말했습니다. 훈장이 진좌수가 하는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또 한 번은 연자매를 넣어서 글을 지으라고 하니 진좌수가 글을 짓되 "外柄天北斗 中樞地洛陽"이라고 했습니다.

글 뜻은 "연자매가 돌아가니 그 자루는 북두칠성 도는 것과 같고, 가운데 기둥은 중심을 만들므로 낙양 땅과 같다."라는 말입니다. 이게 보통 글입니까?》(진성기, 사투리로 따낸 남국의 민담 298∼300쪽, 1956년 4월 삼도동 67세 박우상 님)

⑵ 그는 귀신같은 명의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에 세수를 하려고 마당에 내려서다 말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렸다.


"허허, 어디서 누군지 강간을 당하고 있구나."
이윽고 한 여인이 찾아와 남편이 이러저러한 병으로 앓아 누웠는데 약을 써 달라고 했다.

진좌수는 약 이야기는 않고 대뜸 이렇게 물었다.


"댁은 대정고을에서 이리로 오는 도중에 도부장사한테 강간을 당했지요?"


여인이 아무 말 못하고 있자 그는 계속하여


"댁의 남편은 병이 나았을 거요. 가서 좋은 음식이나 장만해 드리시오. 원래는 댁의 남편이 죽을 운수였으나 그 도부장수가 그 액운을 떠맡아 간 것이요. 가다 보면 그 도부장수가 죽어 있을 것이요. 그리고 죽은 도부장수의 몸에 저고리라도 벗어 덮어 주시오. 본디는 남편이 아닐지라도 한 순간이나마 몸을 허락했던 사내이니…."


여인은 돌아가는 길에 자기를 강간했던 도부장수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진좌수의 말대로 저고리를 벗어 덮어 주고 나서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성한 사람이나 다름없이 일어나 앉아 있었다. (진성기, 제주도 전설 272∼273쪽) 이 때 죽은 남자가 참외밭 주인이고 강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정을 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제주도의 문화유산 174쪽)


⑶ 하루는 만만치 않은 집안에서 부인이 다 죽어간다고 찾아왔다. 베틀에서 명주를 짜는데 꾸리박(북)이 떨어지자 그것을 주우려다가 그만 기절해 버렸다는 것이다.

진좌수는 그의 집에 따라갔다. 실로 환자의 팔목을 묶고 문밖에서 그 실을 잡고 진맥을 한 다음 문을 조금만 열도록 했다. 침통에서 침을 꺼내어 환자의 복부를 향하여 침을 던졌다. 침이 부인의 배에 꽂히자 잠시 후에 부인은 숨을 내쉬고 살아났다. 진좌수는 남편더러 침을 빼오도록 하여 가지고 나왔다.


남편은 너무나 신기하여 백배사례하고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해 주었다. 명주를 짜는데 힘을 내어 짜면 실이 끊어지겠으므로 배를 매우 고프게 하여 짜다가 허리를 굽히는 순간 빈 창자가 맞붙어 버렸다는 것이니 침으로 붙은 창자를 떼어놓은 것이라 하였다. (제주도의 문화유산 175쪽)

⑷ 하루는 정의고을에서 어떤 남자가 병든 아버지를 업고 찾아와서 처방을 원했다. 진좌수는 즉석에서
"여기는 약이 없으니 돌아가시오. 가다 보면 냇가 다리 밑에 '인두골에 쌍용수'가 있으니 그걸 마시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먼 길을 찾아왔던 젊은이는 그런 약을 어떻게 찾느냐고 화를 내며 돌아갔다. 가는 길에 아버지가 몹시 목이 마르다고 졸랐다. 아버지를 내려놓고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니 내에는 물이 말랐고 사람 해골에 물이 고여 있었다. 게다가 물 속에는 지렁이 두 마리가 빠져 죽어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물을 달라 졸라대고 다른 물이 없으므로 그 물이라도 갖다 드렸다. 그걸 마신 아버지는 잠시 후에 스스로 걸어서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나중에 이 젊은이는 일부러 진좌수를 찾아가서 따졌다. '용하다더니 아무것도 아니더군. 당신 아니라도 우리 아버지는 살아났어.' 하며 큰 소리를 쳤다.

그러자
"가는 길에 해골에 고인 물을 먹지 않았소? 거기엔 지렁이도 있었겠지? 그것이 바로 인두골(人頭骨)에 쌍용수(雙龍水)가 아니고 무엇이오?"


하고 웃었다. 지렁이는 토룡(土龍)이라고 부른다. 그제서야 젊은이는 진좌수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 이야기는 대정에서 소년이 어머니를 업고 왔다고도 한다. (제주도의 문화유산 176쪽)


⑸ 하루는 진좌수가 여행을 하는데 방성대곡하는 여인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겉으로는 무척 섧게 울고 있지만 속으로는 기뻐하는 울음이었다. 진좌수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사유를 물었다. 주인이 어제 술을 마셨는데 여태 깨지를 않아서 죽은 줄 알고 그 부인이 울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진좌수는 죽은 이유나 알아보자고 하여 죽은 이를 깨끗이 목욕시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진좌수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시체를 마당에 내놓도록 하였다. 그러자 어디선가 쇠파리 한 마리가 날아들더니 죽은 이의 겨드랑이에 가 앉았다.

'이제 알았다'며 진좌수는 겨드랑이를 들치고 빳빳한 산돼지털을 한 개 뽑아 들었다. 이 털이 땀구멍을 통하여 몸통을 돌다가 염통을 찔렀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진좌수는 부인을 족치도록 하였다. 부인은 결국 간부(姦夫)와 짜고 그랬음을 털어놓았다. (진성기, 제주도 전설 273∼274쪽)


⑹ 어느 날 아침, 한 사내가 허겁지겁 찾아와서 아내가 난산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자 진좌수는 '거 문지방이나 깎아 살라 먹이지.'하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거 참 이상한 처방도 다 있다 하면서도 진좌수가 하는 말이라 그대로 했더니 곧 순산할 수 있었다. 이 일이 온동네에 퍼졌다.

그래서 다른 집에서도 난산으로 고통받는 부인에게 문지방을 깎아서 살라 먹였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더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급히 진좌수에게 달려가 말했더니 '그 때는 아침이라 문을 열 때니까 하문도 잘 열려서 아기를 쉽게 낳은 거지. 저녁에는 문을 닫을 때가 아닌가?' 하며 웃었다.


⑺ 서울에서 임금님이 병이 나서 팔도의 명의들을 부르게 되었다. 전라감사는 진좌수의 명성을 알고 그를 천거하였다. 진좌수는 가난하게 살다보니 제대로 된 의관도 없었다. 허름한 옷차림 그대로 궁중에 들어갔다. 팔도에서 모인 명의들은 진좌수의 초라한 옷차림을 보고 곁에 들어앉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달려오더니
"○○ 정승 댁에서 왔는데 어머님이 길쌈을 하다가 다 죽어가니 방문을 하나 내어 달라."
고 소리쳤다. 팔도의 명의들이라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진좌수는 혼자 바깥에 쭈그려 앉은 채로
"쌀 일곱 알을 물에 담가 먹이시오."
했다.

안에 앉은 의원들은 미친 녀석이라고 웃었지만, 조금 있더니 그 사람이 다시 와서
"어머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 정승께서 모셔 오랍니다."
하며 억지로 진좌수를 끌고 갔다.

정승은 진좌수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임금님에게 데리고 갔다. 임금님의 병은 등창이었다. 팔도 명의들의 약방문이 모두 효력이 없어 탄식하고 있는 판에 진좌수는 집 상마루에 있는 거미 일곱 집과 거미 일곱 마리를 잡아 오도록 하고 그것을 찧어서 붙여 드리니 등창은 사흘만에 다 나았다.


임금님은 크게 기뻐하며 궁중에서 벼슬을 하라고 했다. 그러나 진좌수는 부모님이 나이드신 것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그대로 궁중을 떠나려 하자 '할 수 없으니 좌수 직함이라도 내려라.' 해서 좌수가 된 것이라 한다.


⑻ 진좌수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배를 타려고 보니 뱃사공이나 손님들이 다 내일 모레 죽을 상이었다. '이 배를 타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물러서려는데 또 한 사람이 배를 탔다. 그 사람을 보니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람하고 타면 괜찮겠다 하여 진좌수도 배를 탔다. 배는 무사히 제주에 닿았다. 진좌수는 그 사람보다 먼저 내렸고 그 사람이 내리자마자 돌풍이 한 번 휘몰아치더니 배는 저만큼 밀려가 엎어지고 말았다. (제주도의 문화유산 177∼178쪽)


⑼ 진좌수가 하도 용하다고 하니 종종 그를 시험해 보려는 일이 있었다. 어느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길가에서 놀던 조무래기들이 그를 알아보고 얼마나 용한가 시험하여 보기로 했다. 한 아이가 죽은 체하고 누워 있으면 다른 아이들이 가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한 아이가 쓰러져 눕고 다른 아이들이 우루루 달려가 빨리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진좌수는 버럭 소리를 쳤다.


"이놈들, 어른을 놀리려고? 저 아이는 벌써 죽었다. 빨리 가서 부모님을 모셔 오너라."
아이들은 '진좌수도 별 수 없구나' 하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가서 보니 친구는 진짜로 죽어 있었다. 거짓으로 쓰러질 때 좀 어리숙했던 이 친구는 조심하지 않고 벌렁 드러눕다가 뾰족한 돌멩이에 등뼈가 부딪혀 죽은 것이다. 진좌수는 침을 꺼내어 급소에 놓았다. 소년이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뜨더니 부모가 달려왔을 때 '어머니…'를 겨우 부르고는 다시 숨을 거두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로는 조무래기가 아니라 청년들이라고도 하며, 쓰러질 때 뾰족한 돌멩이에 뒷머리를 부딪혀 죽었다고도 하고, 친구가 가슴을 탁 치면서 누워 있으라고 했는데 그 때 간이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제주도의 문화유산 178쪽)


⑽ 진좌수는 일생 동안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의술을 베풀어 수많은 인명을 구하였다. 살았을 때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한다.


정의고을에 사는 한 사람이 부친의 병이 위독하여 진좌수를 찾아 집을 떠났다. 명월리의 성 남문 밖에 이르러 보니 어떤 노인이 백마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


"월계 진좌수 댁을 어디로 갑니까?"
"내가 진좌수인데 왜 찾으시오?"


그 사람은 부친의 병세를 말하고 방문을 부탁했다. 그러자 진좌수는 이미 찾아올 줄 알았다면서 집을 가리켜 주고 내 방에 아무 책 틈에 방문을 적어 두었으니 그대로 약을 쓰라고 말해 주고는 그대로 가 버렸다. 진좌수의 집에 가 보았더니 이상한 일이었다.

진좌수는 조금 전에 죽었다고 하면서 상제들이 곡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손님은 조문을 하고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상제가 그 책을 펴 보니 과연 거기에는 정의고을 아무개라고 쓴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고 한다.

진좌수는 죽어서 저승으로 떠나면서도 이미 찾아올 손님을 미리 알고 약방문을 적어 놓고 떠난 것이다. 이 정의고을 손님이 본 백마는 진좌수의 애마였으며 그의 집 외양간에는 바로 그 백마가 그대로 매여져 있었다. (제주도의 문화유산 179쪽)
《작성 041106, 보완 1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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