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일본인 수탈 대항..상도리 해녀항일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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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일본인 수탈 대항..상도리 해녀항일운동기념탑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 승인 2017.10.07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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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민 항쟁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해녀 항일운동 전도 확산 계기 만들어


상도리 해녀항일운동기념탑

 
상도리 해녀항일운동기념탑
위치 ; 구좌읍 상도리. 하도에서 세화리로 들어가는 일주도로 북쪽
시대 ; 일본강점기
유형 ; 기념비

 

 

제주해녀항일운동이란 일본강점기인 1931∼1932년 세화·하도·종달·성산·시흥·오조·우도 지역을 중심으로 8개월간 연인원 17,000여명의 제주 해녀들이 참가하여 일본인들의 수탈에 대항해서 정게호미(해조류를 베는 데 쓰는 낫의 일종)와 빗창(해녀들이 전복 등을 따는 데 쓰는 길쭉한 쇠로 만든 도구)을 들고 일어서 238회의 시위를 벌였던 항일봉기이다. 어민 항쟁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의 발단을 살펴보자. 우리 해녀가 어렵게 따낸 해산물을 강탈하다시피 헐값에 사 가는 데 대하여 해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김태호(金泰鎬) 등이 중심이 되어 도사(島司, 近藤晋二郞)를 설득하여 '해녀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전라남도지사(일본인 玄角仲藏)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우여곡절 끝에 경상남도지사와 출가해녀들의 권익에 대하여 각서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제주 유지들의 의지와 목표는 "해녀는 객주나 중개인이나 일본 사람들의 종과 같이 노동만 해 줄 수 없으며 해조회사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1920년 4월 16일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창립되었을 때 김태호는 조합의 목적이 "벌이 나가는 해녀에게 자금을 융통하여 줄 일, 그들이 벌이하는 해안에서 어물을 잡는 권라를 보장할 것, 잡은 어물은 공동판매에 부칠 것"을 명백히 밝혔으며, "조선해조주식회사와 그 관계자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만여 명의 해녀의 생활에 큰 관계가 있는 도덕이 어그러지는 계획을 아주 버리고, 마침내 황하수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듯 해녀의 참담한 생활이 가시기를 바랄 뿐"이라고 강조한 것으로 보아 해녀들의 수난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284쪽)


이와 같이 설립된 해녀조합은 처음에는 공동판매제의 실시로 객주의 중간착취를 막을 수 있었으며 1924년에는 조합원의 수가 5,923명으로서 당시 조선 어업조합 가운데 최대 규모로 성장하였고, 해녀들의 권익을 위한 일을 좀 했으나 나중에는 점차 어용화(御用化)하여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다. 해녀조합의 조합장을 일본인 도사(島司)가 겸임했기 때문이었다.

수탈 상황을 보면 입어료(入漁料), 지정판매제, 해조회사에 수수료, 조합에 수수료, 조합비, 뱃사람 임금, 소개인 사례비 등등으로 다 떼이고 나면 생산자인 잠녀의 몫은 2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중 가장 심한 것은 선구전판매제(先口錢販賣制)였다.

선구전판매제란 해녀어업조합에서 은밀하게 암브로커들과 결탁해서 지정상인을 정하고 영업권을 내 주었다. 아직 바다 속에서 캐지도 않은 해산물을 구전입찰(口錢入札)시키는데 구전을 가장 많이 내겠다는 입찰자에게 지정판매권이 주어지는 것이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285쪽)

구전을 많이 주고 따낸 영업권이니만큼 해산물은 값을 싸게 사들여야 이익이 남을 것이 자명하므로 해녀들로서는 목숨을 걸고 캐낸 해산물인데 그들은 가격을 낮추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


1930년에는 성산포에서 우뭇가사리를 조합서기가 입찰가격보다 헐값으로 가로채려다 발각되었으며, 1931년에는 소라와 전복 수매 과정에서 저울눈을 속이다 적발되었는데, 그 후에도 해녀조합이 지정한 상인은 지정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팔라고 강요하였다.

이에 대하여 매수 가격을 재평가하고 지정가격을 엄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들고 일어서자 조합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해 놓고 수매 시일만 늦추어 버리는 바람에 감태 전복 등이 썩어 버리고 말았다.


이에 해녀들은 1932년 1월 시정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도사에게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미성년 잠녀와 늙은 잠녀가 육지로 출가할 때는 출가증명서 없이도 나가도록 할 것
㈏ 일본인에게 수의계약의 우선권을 주지 말 것


㈐ 도사는 해녀조합장으로서 잠녀 권익옹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조합장직을 사임할 것
㈑ 채취한 물품은 등급제로 하지 말고 상호협상하여 가격을 정하여 지불할 것


㈒ 날씨에 구애받지 말고 일단 채취한 해산물은 매수하여 줄 것
㈓ 현지 주재원(駐在員) 제도를 철폐할 것


㈔ 조합비를 징수하는 데 강제성을 띠어 잠녀들을 괴롭히지 말 것
㈕ 생산되는 물품은 반드시 경쟁입찰에 붙여서 처리할 것


그러나 도사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1932년 1월 7일 세화장터에 모인 세화·하도·종달·우도·시흥·오조 마을 해녀 300여 인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모여 제주읍에 있는 조합사무실로 진군했다.(제1차 세화리 시위)

이 때 이들의 결의는 다음과 같다.


1.조합원 전원 조합사무실로 가서 데모를 강행하고 그 곳을 점거하여 요구조건이 모두 관철될 때까지 농성 투쟁할 것
2.이 투쟁에 참가하는 해녀들은 모두 10일분의 양식(주로 떡)을 휴대하여 올 것


이에 당황한 경관들과 면장이 5일 후 시찰차 이 곳을 지나가는 도사(島司)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므로 제주시로 가던 길을 중단했다. 그러나 조합은 해녀들이 가장 불만으로 여기는 패류에 대해 지정판매를 1월 12일에 강행하는 공고를 내었다.


1월 12일 신임 도사(田口楨憙, 다구찌)가 초도순시차 도일주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좌면과 성산면에서 온 해녀복을 입은 천여 인의 해녀들이 세화리와 하도리 사이에 모여 있었다. 마침내 도사가 세화리로 들어서자 잠녀들은 눈깜짝할 사이에 그를 에워쌌다. 경관들이 칼과 발길질로 해산을 시도했지만 꿈쩍하지 않았다.(제2차 세화리 시위)


"우리들의 진정서에 아무런 회답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우리를 착취하는 일본 상인들을 몰아내라."


"해녀조합은 해녀의 권익을 옹호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우리들의 진정한 요구에 칼로 대응한다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응하겠다."
고 하면서 빗창을 휘두르자 도사는 사색이 되어 해산해 달라고 하면서 요구 조건을 최대한 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세화주재소로 피신하였다.

당시 잠녀들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일체의 지정판매제 절대 반대
2. 일체의 계약보증금은 생산자가 보관


3. 미성년과 40세 이상 해녀의 조합비 면제
4. 병 기타로 인하여 입어하지 못하는 자에 대하여 조합비 면제


5. 출가증 무료 급여
6. 총대는 리별로 공선


7. 조합 재정 공개
8. 상인 앞잡이인 해녀조합 서기의 즉각 면직


이 일로 부춘화(당시 25세, 해녀회장·부인회장, 1995년 사망)·김옥련(당시 23세, 소녀회장)·부덕량(당시 22세, 사망) 등 주동해녀 20여 인이 구속되었다.

이에 격분한 해녀 500여 인이 1월 24일 새벽에 세화주재소로 쳐들어가 당직순사 1명의 모자와 옷을 찢고 상처를 입혔는데 해녀들도 부상을 당하였다.

이 소식에 놀란 제주경찰서에서는 전라남도 경찰부에 응원을 요청하였다. 한편 주재소에 쳐들어갔던 해녀들은 일시 우도로 피신하였는데 1월 26일에 경찰이 우도에 가서 해녀 30 인을 체포하고 이들을 배에 태우려고 선창에 나왔다.

이 때 순식간에 800여 인의 해녀들이 경찰관을 포위하고 잡혀가는 동료들을 구하려 하자 공포를 발사하여 간신히 진압하였다. 1월 27일에도 해녀 100여 인이 주재소에 쇄도하여 동료들을 구하려 하였으나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실패하였다.(우도시위)(북제주군지 221-222쪽)

이들은 목포경찰서로 끌려가 6개월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이들의 활동은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제주도 전역으로 번지는 계기를 만들었다.(다이내믹제주 2003년 8월 20일) 그 후에도 해녀와 경찰의 충돌은 우도·종달리 등지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났으나 1932년 1월 27일에 이르자 진정국면으로 들어섰다.


이 사건으로 많은 해녀들이 갖은 고초를 당하였고 34인의 해녀가 검속되어 15일 정도 수감되어 있다가 석방되었는데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은 석방되지 않았으며, 배후에서 이들을 지도하였던 강창보(姜昌輔), 혁우동맹원이었던 문도배(당시 23세)·한원택(당시 19세)·김시곤 등 비밀결사도 이 일로 조직이 탄로되어 검거되는 등 78인의 애국지사가 검거되었으며, 이들은 2-3개월 뒤 모두 석방되었으나(한겨레신문 4328. 1. 26, 김봉옥, 제주통사 228쪽) 부춘화, 김옥련은 6개월의 실형에 복역하였다.(북제주군지 222쪽)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 중 김옥련·부춘화씨에게는 건국포장(2003년 8월 15일)을, 김시곤(1990년)·문도배·한원택(2003년 8월 15일)씨에게는 건국훈장애족장을 수여(추서)했다.(다이내믹제주 2003년 8월 20일)


그 때 주도적으로 싸움을 이끌었던 부춘화 할머니는 실제로 잠녀들이 내세웠던 요구 사항이 대부분 이루어졌다고 증언하였다.(전교조제주지부 교과위원회, 세화리 잠녀 항쟁. 1992. 10-15쪽)


이 투쟁은 일시적인 생존권 투쟁이 아니라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야학교사인 오문규·김순종 선생 밑에서 지도를 받은 해녀들이 중심이 되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지속적으로 주도해 갔던 것이라고 당시 하도리소녀회 회장으로서 항쟁을 직접 지도했던 김옥련 할머니(2003년 현재 96세, 부산 거주)는 증언하였다.

또한 김 할머니는 '당시 이 사건으로 체포된 후 만취한 일본 경찰로부터 물고문·무릎누르기 등 숱한 고문 조사를 받았다'며, '전복을 따기 위해 숨을 멈추고 물질하는 것과 같이 조금만 참으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말했다.(제주신문 1995년 8월 16일)

1995년 8월 15일에는 이와 같은 항쟁의 내용을 간략히 적은 비석이 세화중학교 교정에 세워졌으며, 1999년 8월에는 상도리 속칭 연두망 동산에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졌다. 탑은 제주 덕판배 모양의 좌대 위에 높이 12m의 탑 몸체와 삼무정신을 상징하는 세 개의 돛으로 형상화하였으며, 좌대의 왼쪽 벽에는 해녀의 일상생활 모습을, 오른쪽에는 하도리 소녀야학 장면을 부조로 새겼다.


김옥련 할머니는 일찍이 해녀로 활동하던 시절(19세)에 하도리소녀회장을 맡는 한편 하도강습소에서 2년 동안 기초교육을 받으며 당시 오문규·김순종 교사로부터 받은 애국사상과 지도력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김 할머니는 1934년 항일운동 동지인 종달리 한영택씨와 혼인, 3남매를 낳은 후 부산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겼다.(제민일보 2003년 8월 13일)

각종 고문을 말도 못하게 받았다는 김 할머니는 '당시 일본 사람들과 싸우는 열기가 넘쳐 고문받는 것을 아프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문에 내가 죽어도 조선이 독립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에서 감옥에서 고문받는 것을 참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한겨레 2003년 8월 14일)


한원택 선생은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일제의 계속적인 감시와 옥중 고문의 영향으로 1938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작고하였다. 그는 이미 그 시대에 전통혼례식을 하지 않고 요즘의 운동회 때처럼 신식혼례식을 치러서 동네 사람들이 구경가기도 했었다고 하며, 형무소에서 출소 후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중 서울에서 유명한 의사가 직접 약을 싸들고 와서 1주일 간 치료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제민일보 2003년 8월 13일, 한라일보 2003년 8월 13일)


문도배씨는 혁우동맹 소속으로 동료들과 함께 해녀와 농민들을 조직화하고 야학을 통해 해녀를 포함한 지역 주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데 앞장서다가 해녀항쟁으로 이 조직이 드러나게 되자 검거되어 3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한겨레 2003년 8월 24일)


그러나 이 항일투쟁을 주도했던 해녀들은 해녀항일운동의 내용이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또는 생존권 투쟁으로만 인식되는 등 독립운동 유공자에서 여러 번 제외되었었고, 해녀항쟁을 실질적으로 지도하는 역할을 했던 비밀결사인 혁우동맹원들도 사회주의를 표방했고 광복 후 좌익운동을 했던 점 때문에 번번이 독립유공자에서 탈락했었다.

광복 후인 1946년 인민위원회 구좌면위원장을 지낸 문도배씨도 이번 독립유공자로 선정됨으로써 유공자에 대한 기준이 이념의 잣대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제주일보 2003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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