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성현들은, 먼저 자기 마음을 얻었도다"

(하프올레걷기)낙천리-용수포구 절부암..빈 의자가 주는 너그러운 길

2018-01-07     고현준 기자

 

송년을 맞아 걷는 하프 올레.
13코스의 절반인 낙천리에서 용수포구 절부암까지 가는 동안 코스 내내 단 한번의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다.


이 길을 관리하는 올레지기의 힘일까..
올레리본이 보이는 곳에서 다음 리본을 불 수 있어 그동안 다녀봤던 어떤 올레보다도 관리를 잘하고 있는 코스로 기억한다.

한 해를 하루 남긴 지난 2017년 12월30일 이 해의 마지막 올레걷기에 나섰다.
오전 10시 조금 넘은 시간 집에서 출발해 13코스 중간 포스트가 있는 낙천리에는 11시11분경 도착했다.

지난 2003년 아홉굿마을로 지정된 낙천리는 한경면 중앙에 위치한 마을로 지난 1960년경 여산 송씨 20대손인 송가금 씨에 의해 설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찰흙과 수량이 풍부해서 풀무요건이 갖춰진 마을로 낙천리는 아홉굿은 구색(九色), 구주(九酒), 구경(九景)을 갖추고 있고 천가지의 즐거움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1948년 4.3항쟁이 발생,이해 전주민 소개에 이어 집 259채가 소실되고 30여명이 희생됐다는 설명이 마을 연혁 게시판에 쓰여져 있었다.

낙천리를 걷는 동안 곳곳에 의자가 놓여져 있어 이 마을의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1천여개의 의자가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기 때문이다.

이 길은  곧 조수리로 이어지는데..
예전에 고사리숲길 끝에 놓여 있던 쉼터는 지금 운영을 포기한 듯 ..커피도 물도 없는, 빨간 우체통만 외로이 서 있는 안타까운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 올레가 처음 생겼을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우체통에 편지를 써넣고 잠시 앉아 마을청년들이 내어놓은 이 마을 청년들의 커피도 즐겁게 마셨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게 될 운명에 처한 것 같다.

물론 마을과 떨어진 이곳에 매일 찾아와 관리하기가 쉬울 리 없다.

고사리숲이 많아 붙여진 길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는 고사리숲길을 지났다.

13코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한 곳이 없다.
구불구불한가 하면 숲속길이 나왔다가..곧 곶자왈이 나타나고.. 돌담이 나왔나 하면 다시 숲길이고..그리고 대로변이 나온다.
잠시도 지루할 일이 없는 코스였다.

이중에 가장 압권은 밭길 사이에 놓여있었던 의자 하나가 기억에 남아있다.
특전사숲길 입구에 딱 하나 놓여진 이 의자는 잠시 쉬어가기에 좋은 아주 탁월한 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이 의자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그만큼 편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특전사숲길은 제주도에 순환 주둔하던 제13공수특전여단의 병사들이 제주올레를 도와 낸 숲길이다. 50명의 특전사 대원들이 이틀간 총 길이3km, 7게 구간에 걸쳐 사라진 숲길을 복원하고 정비했다는 올레표지판이 안내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 밭길이다.

파릇파릇 파가 익어가고 있었다.

용수교차로에 도착하자 제주시 축산과가 걸어놓은 철새도래지와 농장출입을 자제하자는 현수막이 보였다.

이곳에 도착해 큰길을 건너가자 절부암이 1.2km 남았다는 표시가 있었다.

그리고 길가에는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내어놓은 의자가 또 하나 놓여 있었다.
이런 조그만 것이 남에 대한 배려라는 것일까..

지친 올레꾼들을 위해 또는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쉬어가도록 내어준 공간..

네가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 시작할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될거야
-어린 왕자 중에서

이런 예쁜 글과 함께 아름다운 색깔로 그린 그림이 배경에 그려져 있었다.

길은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 용수리로 들어섰다.

돌담과 밭에서 익어가는 농작물들..
멀리 김대건 신부가 표류하다 도착했다는 용수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절부암이 가까워지자 윗길은 ..아마 예전에는 이곳으로 다니던 길이었겠지만 지금은 막혀 있었다.

돌계단이 고풍스러운 길..
그 옆에는 오래된 고목이 서 있어 이 마을의 무게감과 품격을 잘 말해준다.
올레길의 마지막은 그 아래쪽으로 이어진다.

어마어마한 암석들이 즐비하다.
아마..이곳에 포구를 만들면서 일부 유실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곧 돌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절부암은 이런 암석들 사이에 웅장하게 만들어져 숨겨져 있었다.
글 쓴이, 만든 이, 돌을 깎은 이의 이름이 그 위에 새겨지고..
누가 발기했는지..
발기인이라는 이름으로 암석을 파 새긴 판관과 이장 구장의 이름들이 나열돼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절부암은 그렇게 다가왔다.

절절해서 절부암인 것일까..

멀리 보이는 차귀도가 바로 코앞이다.

어쩌면 전설속 얘기처럼 물이 배에 가득 찬 모습으로 남편이 죽어서 떠내려온 모습으로 보인다고 해서 절부암이 더욱 빛나 보였다.

이곳 13코스 종점에 도착해 스탬프를 찍은 시간은 13시42분..

2시간 30분 정도를 걸은 셈이다.

근처 편의점으로 갔다.

컵라면을 하나 사서 아침에 사온 김밥과 함께 먹으니 꿀맛이었다.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얼쩡대기에 소시지를 하나 빼서 주었더니..
한입에 다 먹는다.
조금 있으니 고양이가 2-3마리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미고양이까지 합세했다.

또 하나를 던져 주었더니 아까 막은 놈이 낼름 다시 먹었다.

나는 다른 2마리에게 나머지를 다 던져주고.. 택시를 불렀다.

택시는 곧 도착했다.(용수에서 낙천리까지 8천원..아마 올레 중간코스까지는 8천원으로 정해진 듯 했다. 거의 모든 택시가 8천원을 받는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곳이라 어쩔 수가 없다.올레꾼이 더 많아지면..올레전용 버스가 생기려나..)

송년올레걷기는 봄처럼 따뜻한 날씨 속에 그렇게 편안하게 마무리됐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소개한 14번째 인물은 퇴계 이황(1501-1570)이다.

‘..퇴계 이황은 스물 네 살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고, 그 후 두 차례나 더 낙방하였다.
그가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것은 그로부터 3년후이며, 불행히도 그 해에 아내가 죽고말았다.
서른 살에 재혼한 이황은 서른 네 살 되던 해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라는 직책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호조좌랑, 홍문관 교리, 충청도 어사, 성균관 대사성 등을 거치는 동안 그의 관리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것은 당시의 세력가 김안로가 이황을 동향인이라 하여 그를 불렀으나 그가 찾아가지 않았던 바, 김안로의 미움을 사게 되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정치개혁의 중심에 뛰어 들었다가 사약을 받고 비참한 결말을 맞은 조광조를 보면서, 장차 높은 벼슬을 꿈꾸기보다는 성리학 연구에 뜻을 두었던 이황은 건강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고 마흔 여섯 살 되던 해에 고향인 낙동간 상류 토계(兎溪)의 동쪽에 양진암을 짓고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스스로 호를 퇴계(退溪)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연이은 퇴귀(退歸)와 지명 토계(兎溪)와 무관하지가 않다.


그로부터 얼마 후 조정에서 낙향해 있는 그에게 다시 벼슬을 내리자, 그는 안동에서 가까운 단양군수를 희망하였다가 9개월만에 풍기군수로 전임하였고, 마흔 아홉살에는 다시 병을 이유로 세차례나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그냥 행장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유학(儒學)이란 원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이황의 관심사도 인간의 본성과 행동에 있었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4가지 본성, 즉 타인을 가엽게 여길 줄 아는 측은지심, 부끄러움을 아는 수오지심, 양보할 줄 아는 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아는 시비지심, 이 4단을 이(理)가 발현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기쁨인 희, 노여움인 노, 슬픔인 애, 즐거움인 락, 사랑인 애, 미움인 오, 욕망인 욕, 이 7가지를 기(氣)가 발현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만일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이가 발현되도록 힘쓴다면 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성리학은 바로 이러한 도에 도달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므로 도학(道學)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중략)..이황의 만년 관직생활은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만이 계속 되었다.


홍문과 부제학, 공조참판, 공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 52세부터 70세까지 18년동안 무려 50회의 사퇴서를 냈고, 특히 정3품 이상의 벼슬은 실제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는 학자의 최고영예인 양관대제학을 제수받았으나 이마저 거절하고 고향 안동에 도산서원을 세운 다음 후학지도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이때 임금께 ‘성학십도’를 지어올렸다. ‘성학십도’는 그가 평생을 두고 최대의 심혈을 기울여 쓴 것으로 선조는 이것을 열폭의 병풍으로 만들어 거실에 두고 보았다고 한다.


그가 도산서원을 설립하자, 학문이 깊고 덕행이 높은 그에게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리 많은 유생들이 찾아와도 싫어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였다.


그리고 제자 대하기를 마치 벗을 대하는 것처럼 하였다. 비록 어린 제자라도 함부로 이름을 부른다거나 너라고 하지 않았고 보내고 맞을 때는 항상 공손히 하였다.


..이황은 1570년 11월 종갓집 제사에 참석했다가 감기에 걸린 것이 악화되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많은 후학을 배출한 70세의 노학자는 이제 자신의 생명이 다한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자신의 묘갈명을 이렇게 썼다


“젊어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병치레가 많았도다. 그 사이에 배운 것이 얼마나 된다고 늘그막에 벼슬을 탐했던가?


배우기를 구하였으나 길은 멀기만 하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다가왔었다.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발을 헛디뎌 물러가 숨기에는 뜻이 곧았으니, 나라의 은혜에 부끄럽고 성인의 말씀이 두렵도다.

산은 우뚝 솟았고 샘물은 끊임없이 흐르는데 관복을 벗으니 학창의 소매가 너울거려 사람들의 비방을 떨쳐버렸도다.


제 생각을 제 스스로 막을 때도 있거늘 품은 뜻을 누가 알리오. 옛 성현들은 생각하노니 그들이야 말로 먼저 자기 마음을 얻었도다. 그러니 후세에 제 마음을 얻을 이가 없다고 하지는 못하리라.


시름 가운데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속에 시름이 있는 것, 죽으면 남김없이 돌아가리니 다시 무엇을 구하랴“

(중략)..이황의 묘갈명은 역설의 주장이다. 학문은 구할수록 가까위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멀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