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신통한 목민관..와산리 장인식목사선정비

철폐시킨 남학당(南學堂, 梧登村), 서학당(西學堂, 上加村), 우학당(右學堂, 明月村) 등 세 학당 다시 개설..

2018-01-22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와산리 장인식목사선정비


使相張公寅植恤民去思碑
위치 ; 조천읍 와산리 비석거리. 2010년 경에 와산리 1166-4번지 마을운동장 옆으로 옮겨 세웠다.
시대 ; 조선
유형 ; 비석(선정비)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건립자 ; 와산리민
비문 내용 ; 앞면(使相張公寅植恤民去思碑) 뒷면(咸豊元年正月日 臥山里)
건립년대 ; 조선 철종2년(1851년)
규모 ; 높이 63㎝, 너비 33㎝, 두께 12㎝
재임 기간 ; 1848년 3월∼1850년 6월

 


장인식 겸방어사는 호는 묵암(默庵). 이의식(李宜植)의 후임으로 제주에 부임하고 1850년 6월에 사직하고 떠나자 그를 기리어 동비(銅碑, 현소재불명)를 세웠다.


장인식은 2년 3개월간 재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48년 정의현감 강이진(姜履鎭, 1798~1865)과 수산진조방장 김기찬(金沂瓚)이 방두포 해변에 일본인 선장 다나카 등 5명이 정박하였다고 보고하자 사정을 묻고 감시하였다. 1848년 12월 산마감목관 김영초(金瀛礎)를 파면하고 김경희(金景希)를 임명하였다.


본주 환곡이 너무 많음을 비변사에 보고하여 이를 절반으로 줄였고, 수세전(水稅錢)을 혁파하고 場稅米 60석을 補民庫(일명 安民庫)에 획부(劃付=떼어붙임)하였다. 外通房을 설치하여 〈養蒙齋 또는 慕蒙齋?〉라 편액하고 知印(향리로서 地方官의 官印을 맡아보는 사람)을 가르치게 하였다.


布政門 밖에 金鐘閣을 세웠다. 전에 작은 종이 걸려 있었는데 전임 목사 이의식(李宜植)이 이를 녹여 군기와 노기(鐪器)로 만들어 버렸다.

장인식이 부임하면서 탐라의 도읍지에 종이 없어서는 아니된다는 여론에 따라 만호 장석좌(張錫佐, ?~1878)로 하여금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에 있는 미황사(彌黃寺)의 큰 종을 구입하게 하여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의 문 밖에 금종각(金鐘閣)을 건립하고 달았다.


또 이 때에 공진정(供辰亭)을 중수, 또 상현사(象賢祠)를 영혜사(永惠祠)라고 개명하여 당시 본도에 유배온 추사 김정희의 제액(題額)을 받아 게시하였다.

제주향교의 전내(殿內)가 누습(陋濕)하여 단석(簞席)이 손상되어 애석(碍石)으로 1척 높이의 단을 축조, 습기가 스며들지 못하게 하였다.

三姓祠에 숭보당(崇報堂)을 건립하여 재생(齋生)을 두어 과업을 장려했고, 北射場에 심고당(審古堂)을 건립하여 무사의 사격 연습하는 장소로 삼았다. 배대정(拝待亭)을 해수사(海袖祠)로 개편(改編)하여 해신제(海神祭)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전임 목사 이의식(李宜植)이 1848년에 철폐시켰던 남학당(南學堂, 梧登村), 서학당(西學堂, 上加村), 우학당(右學堂, 明月村) 등 세 학당을 1849년 다시 개설, 도민의 비등했던 여론을 가라앉혔다.

좌학당과 우학당에 훈장을 정하고 전임 목사 이의식에 의해 철폐되었던 늠료(凜料)를 다시 설치하고 좌학당을 화촌서당(花村書堂)이라 개제(改題), 또 남학당, 서학당도 폐지되었던 늠료를 다시 설치, 유생들을 양성하였다.


정의향교를 성 안으로 이건하였다. 義士廟를 정의서당에 세워 吳興泰를 祠享하였으며, 李禮延을 永惠祠에 從享하였다.

文科初試를 設行하고 군비를 보충하여 갖추었다. 書院의 山仰門을 새로 세웠고, 귤림서원, 廟庭碑, 삼읍의 賑別儲庫 등도 세웠다. 춘추로 해신제를 설행하고 各庫의 反利木을 혁파하였다.(북제주군 비석총람 715쪽)


또 박심당(博審堂)에 돈 200냥을 별부(別付)하고 접생(接生)을 가설(加設)하였다. 1849년 화북 포구에 있는 해신사(海神祠)에 비를 세우고 각서(刻書)하여 매년 1월 6일에 행제하기로 하였다.

수년 전에 목리(牧吏) 양성진(梁聖進)의 실종 사건이 우면(右面) 고내촌(高內村)에서 발생, 목사 장인식이 주범 강태손(姜太孫)을 체포하니 신통한 목민관이라고 우러러보았다.

1850년 봄에 의사묘(義士廟)를 정의서당 안에 건립, 오흥태(吳興泰)를 향사(享祀)하게 하고 이예연(李禮延)목사를 영혜사(永惠祠)에 종향(從享)케 하였다.


실은 이예연의 종향 문제는 일부 유림들의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장인식 목사가 이를 물리치고 시행하였다. 영혜사는 본디 편액이 없었던 것인데 1841년 이원조(李源祚) 목사가 상현(象賢)이라 편액을 했었는데 1850년 장인식 목사에 의해서 영혜사(永惠祠)라 개편한 것이다.

문무 초시(初試)를 개설, 군비를 첨비(添備)하고 삼읍 진별저고(賑別儲庫)를 건립하였다. 또 각고(各庫)의 반리미(反利米)를 혁파하였다.


또 승보(陞補) 초시 제도가 사관의 미비로 오랫동안 폐지되었으나 1850년 본주 공사(貢士)가 단시관(單試官)을 두어 행하는 것이 편리함을 상서하였는데 대신이 경연(經筵)에 아뢰어 윤허를 얻었다. 그래서 문과 초시를 設行하게 되었으며 군비를 보충하여 갖추었다.


1850년 봄에는 보리 흉년이 들고 여름엔 홍수가 터졌을 때 도민들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하여 힘썼다.


장인식 목사는 문장도 뛰어나 「오현단비기(五賢壇碑記)」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철종1년(1850) 「귤림서원묘정비(橘林書院廟庭碑)」를 세웠다


철종3년(1852)1월8일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철종11년(1860)4월12일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철종14년(1863)2월24일 함경남도병마절도사, 고종1년(1864)12월20일 동지, 고종2년(1865)2월24일 겸훈련원도정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북제주군 비석총람 715쪽, http://culture.jeju.go.kr/ 제주도 역사문화예술,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한국고전종합DB
《작성 041230》《수정보완 11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