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초토화 작전..세화리 다랑쉬굴

폭탄 던지고 사격 가해 사살하고 일부는 굴 입구에 불 질러 질식사시켜

2018-09-28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세화리 다랑쉬굴
 

위치 ;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오름의 동쪽 약 500m 지점. 해발 170m. 속칭 '선수머세' 밭(현재는 경작하지 않아 억새가 무성함) 가운데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피난생활 터

 


다랑쉬오름(세화리 산6번지)의 동쪽 약 500m 지점에 경작하지 않는 조그만 밭 가운데에 굴 입구가 있었다.

지금은 굴 입구에 큰 돌을 얹고 흙을 덮어 굴 입구인지조차 모르게 되어 있으나, 이 굴 속에서는 4·3 사건 때 사람들이 토벌대를 피하여 살다가 토벌대에게 발각되어 입구에 불을 피우는 바람에 12명이 질식사(窒息死)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그 시신들이 1992년까지 방치되었던 곳이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는 "1948년 12월 18일 토벌대, 여자 3명과 어린이가 포함된 구좌면 하도리·종달리 주민 10여명이 숨어 있던 '다랑쉬굴'을 발견, 굴 속으로 불을 지펴 질식사시킴."이라고 적고 있다.

다랑쉬굴에서 사람들이 집단학살(集團虐殺)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폭도(暴徒)' 또는 '폭도가족'으로 몰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또 한 가지는 직계 가족이 모두 학살당하였기 때문에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지(日誌)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48년 12월 18일 ; 다랑쉬굴 집단학살사건 발생. 토벌대 제9연대는 다랑쉬굴 속에 있는 피난민을 발견하고, 폭탄을 던지고 사격을 가해 일부는 사살하고 일부는 굴 입구에 불을 질러 질식사시켰다.

당시 민보단(民保團) 간부로 토벌작전(討伐作戰)에 따라나섰던 종달리 오지봉(남, 1992년 75세)씨 증언에 따르면


"軍·警·民 합동토벌대가 빗질하듯 다랑쉬오름을 포위하며 수색하다가 굴을 발견했다.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은 사살됐고, 굴 입구가 양쪽에 두 개였는데 '나오라, 나오라' 소리쳤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토벌대가 처음에는 수류탄을 던졌다. 그래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검불로 불을 피운 후 구멍을 막아 질식사하게 하였다."

고 한다.(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86쪽)

이 시기는 초토화작전(焦土化作戰) 시기이며, 1948년 12월 24일 미24군단 정보보고서에는


"제주를 떠나 버린 제9연대 제2대대는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군사작전에서 민간인과 경찰의 도움을 받아 12월 18일 130명을 사살하고 50명을 체포했으며 소총 1정, 칼 40자루, 창 32자루를 노획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존·메릴의 논문 〈제주도 반란〉에도


"1948년 말이 되면서 제9연대를 본토로 귀환시켜 다른 부대와 교체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게릴라 토벌작전은 더욱 촉진되었다.

12월초에 연대 지휘부는 자신들의 부대가 섬을 떠나기 전에 섬에서 게릴라를 일소하고 그들과 교체하게 될 부대에게 압도할 만한 업적을 남기기 위하여 마지막 박차를 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기간 중에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이와 같은 학살극이 절정에 달했던 12월 중순께는 630명이 단 1주일 동안에 살해되었다.

얼마 안 되는 무기노획량뿐만 아니라 게릴라측 사상자와 국방경비대측의 희생자 손실 사이의 불균형은 엄청난 과잉학살행위가 자행되었음을 암시한다."고 기록하였다.(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94쪽)

1991년 12월 22일 ; 다랑쉬굴 최초 발견. 다랑쉬굴 토벌 현장에 동행했었다는 세화리 문은철씨 안내로 제주4·3연구소 조사팀이 유골이 있는 동굴을 발견했으나 본격적인 조사는 하지 않았다.

12월 24일 ; 최초의 다랑쉬굴에 대한 조사 결과, 11구의 유골과 유물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1992년 3월 22일 ; 제주4·3연구소가 다랑쉬굴 유골 및 유품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3월 29일 ; 제주4·3연구소와 제민일보가 공동으로 현장 확인 및 합동 조사를 실시하였다. 다랑쉬굴에 피난한 적이 있고 다랑쉬굴 시신을 수습하였다는 현장 목격자 채정옥씨가 동행하여 자신이 정리한 시신들임을 확인하였다.(이 날 다랑쉬굴 공개에 대해 논의함.) 채정옥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내가 정리한 시신들이 맞네요. 사건이 나던 날은 12월 18일로 생생히 기억이 나요. 나도 다랑쉬굴에 같이 살았어요. 토벌 당시에 나는 굴에서 나와 있었는데, 구좌면 면당부에서 다랑쉬굴이 습격당했다며 면포를 주면서 시신을 잘 정돈하고 오라고 했지.

하도리 출신 오치악과 고완규 등과 함께 갔는데, 밤에 와서 보니 우리 마을 강태용씨가 죽어 있고 나머지는 질식사해 있었어. 입구에는 불을 피웠던 흔적들이 쌓여 있었고, 굴 안은 그 때까지 연기로 가득했는데 속에 들어가 보니까 돌 구석 땅 속에 코를 파묻고 죽어 있었어.

사람들은 눈·코·귀에서 피가 나서 형편없었지. 하도 사람 한 분은 손톱이 없어질 정도로 땅을 파다 죽어 있었어. 우리는 시체를 수습했는데 남쪽에는 하도 사람들을 일렬로 눕히고, 우리 종달리 사람들은 북쪽에 일렬로 눕혔는데 10∼13명은 됐어. 그 때 눕힌 순서대로 1번 누구, 2번 누구 기록을 했었는데 그 수첩은 피난다니다 보니 잃어 버렸어."


그러나 채정옥씨는 굴 입구만 살폈지 북쪽 굴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굴 안쪽에 있던 시신 한 구는 확인하지 못했고 한 구의 시신은 고통스럽게 사망한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86쪽)

4월 1일 ; 전문가와 제주4·3연구소, 제민일보 취재단이 공동으로 합동조사반을 구성하여 현장 검증과 공동 취재를 하였다.(정형외과 전신권, 변호사 최병모, 제주대 박물관장 이청규, 제민일보, 제주mbc, 한겨레신문, 동아일보 등 참석) 10평 남짓한 천연동굴 바닥에는 시신 10구가 나란히 누워 있었으며, 어떤 시신에는 허리띠가 걸쳐 있는 채로, 어떤 시신의 발 밑에는 썩어가는 고무신이, 어떤 시신에는 천 조각이 걸쳐진 채로, 또 어떤 유골에는 노랗게 퇴색된 머리칼에 비녀가 꽂힌 채로 있었다.

전신권 정형외과 의사는


"치아 발육 상태와 두골 모양으로 볼 때 시신 11구 중 10대 어린이와 50∼60대의 할머니를 포함한 여성 3명, 성인 남자 7명을 포함한 다양한 연령층의 남녀가 일시에 숨진 것으로 보인다."
고 말하였다.

물건들(큰 유리병, 남자 고무신, 여자 고무신, 석유가 들어 있는 병, 횃불통, 무쇠솥, 놋그릇, 놋수저, 가위, 큰 양푼, 요강, 석쇠, 화로, 구덕, 된장항아리, 톱, 나대, 도끼, 자귀, 호미, 쇠스랑, 곡괭이, 철모, 버클, 단추, 안경, 수통, 허벅, 반합, 각종 그릇들 등등)은 희생되기 전의 모습이 떠올려질 수 있도록 제 위치에 순서대로 있었다. 그리고 M1소총의 탄피도 발견되었다.

4월 2일 ; 다랑쉬굴 유골 발견 기사가 각 언론을 통해 보도됐고, 제주4·3연구소에서는 제주경찰서 정보과에 다랑쉬굴 발견을 통보하였다. 경찰·행정기관·언론사에서 이 날 현장을 검증하였으며, 현장 검증 후 제주도지방경찰청은 죽음의 원인을 집단 자살,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 발표하였다.

4월 3일 ; 제민일보에서 토벌 현장에 참여했던 증언자 확인 증언을 보도했으며, KBS가 다랑쉬굴 시신수습자 증언을 보도하였다. 제주도지방경찰청은 죽음의 원인이 토벌대가 불을 지펴 집단질식사시킨 것으로 판명되자 다랑쉬굴을 남로당 아지트로 추정 발표하였다.

4월 4일 ;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에서 학살 상황 및 1차 사망자 명단을 발표하였다.

4월 7일 ; 검찰과 경찰은 북제주군청에 유골 11구와 유품을 인계하고 행정 처리를 요청하였다. 구좌읍과 경찰에서는 다랑쉬굴 입구를 시멘트로 봉쇄하고 철조망을 둘러친 뒤 출입을 봉쇄하였다.

4월 10일 ; 유족회의에서 시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관계로 '합동묘지'에 안장할 것으로 결정하였으나 얼마 후 행정기관 및 정보기관에서 마을 유지 등을 동원하여 '화장'할 것을 유도하였다.

4월 13일 ; 북제주군에서 유족 찾기 공고를 내어 5월말까지 신고받을 계획을 발표하였다.

4월 18일 ; 4·3연구소를 중심으로 제주 지역 다랑쉬굴 4·3희생자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고, 4월 21일 다랑쉬굴 희생자에 대한 장례가 범도민장(汎道民葬)으로 이루어지길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5월 2일 ; 제민일보에서 다랑쉬굴 11구의 유골에 대한 신원을 최종 확인하고 보도하였다. 11명의 희생자 중에는 9세된 어린이와 부녀자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희생자 명단 ; 강태용(남, 34), 박봉관(남, 27) 고순환(남, 27), 고순경(남, 25), 고태원(남, 25), 고두만(남, 21) 함명립(남, 21. 이상 종달리), 김진생(여, 51), 부성만(여, 24), 이성란(여 24), 이재수(남, 9. 이상 하도리) 이들은 모두 비무장이었으며, 어린이와 노부모를 동행한 가족 단위의 피난민이었고, 이들 중 남자들(고태원, 강태용, 고두만, 박봉관)은 직·간접으로 경찰을 도와 주던 우파 조직인 〈대한청년단〉소속이었다.

1948년 11월 18일 종달리 김호준과 채정옥이 무장대에 의해 납치되었는데 이 납치사건과 관련하여 책임이 자신들에게 덮어씌워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이들은 자진해서 산으로 피신하게 된 것이다.(그 전에 고태원은 '대청' 부단장이었는데 단장인 오지봉과 단장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감정대립이 생겼었다고 한다.)

이들은 납치된 채정옥과 굴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채정옥은 마을로 내려갔다가 다시 산으로 피신했는데 그 이유는 부인이 이미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희생되었고 자신도 마을에 있으면 '도피자'로 몰려 처형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5월 4일 ; 구좌읍장실에서 유족 및 구좌읍장, 이장단 등이 모여 회의한 후, 그 결과 유골을 '합동묘지에 안장할 것'에서 '화장할 것'으로 번복 결정하였다.

5월 5일 ; 유가족 일동으로 구좌읍에 '유해인도요청서'를 접수하였다.

5월 15일 ; 발견 45일만에 유골을 화장하고 바다에 뿌리는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구좌읍은 유해인도계획을 어기고 구좌읍 이장단을 동원하여 서둘러 유골을 꺼낸 후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굴 입구를 봉쇄하였다.

6월 8일 ; 세화리 주민과 구좌읍 이장단을 내세워 다랑쉬굴 4·3희생자대책위원회에 6월 10일 다랑쉬굴 희생자 추모대회 자제를 요청하였다.
6월 10일 ; 제주교육대학에서 '다랑쉬굴4·3희생자추모범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12∼13, 42∼82쪽)

위 사진은 막혀 버린 굴 입구
아래 사진은 동굴 내부에 남아 있는 무쇠솥
$$$사진은 제가 찍은 게 아니고 위 책에 있는 것을 스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