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세계지질공원..성산리 성산망(봉수대)(멸실)터

일출봉의 원래 이름은 성산..오름 중 10여개는 수성화산활동으로 생겨

2019-07-28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성산리 성산망(봉수대)(멸실)터
 

위치 ; 성산읍 성산리 30. 일출봉 서쪽 봉우리
유형 ; 방어유적(봉수)
시대 ; 조선

 


제주도 내에 있는 360여개의 오름 가운데 10여개는 수성화산활동으로 생겨난 것들이다.

일출봉을 비롯해 서귀포 하논, 대정의 송악산, 창천리 군산, 고산 수월봉과 당산봉, 김녕 입산봉, 종달리 말미오름, 우도 등 대체로 바닷가 근처의 오름들이다.

뜨거운 마그마가 지표면을 향해 올라오다가 지하수나 바닷물, 호수 등 물을 만나게 되면 물이 끓게 되면서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게 된다.

끓는 기름에 물을 떨어뜨리면 물이 튀어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것이 수성화산활동이다.


마그마와 만나는 물의 양이 많으면 폭발력이 크다. 화구에서 터져 나온 화산재와 암석 등 화산분출물은 축축하게 젖은 채 공중으로 튀어올랐다가 천천히 떨어지면서 쌓인다.

모래성을 쌓을 때 마른 모래 보다는 젖은 모래가 경사진 성을 쌓기 쉬운 것처럼 이 경우에는 화산재가 쌓일 때도 경사가 가파라진다. 이것을 '화산재 언덕'을 뜻하는 '응회구'(凝灰丘)라고 부른다.


반면 마그마와 물의 양이 비슷할 경우 폭발력은 더 크지만 화산분출물들이 뜨거운 화산가스나 수증기와 뒤섞여 수평으로 퍼져나간다.

사방으로 사막의 모래폭풍 처럼 빠르게 땅 위를 흘러가다가 쌓이는 것이다. 거기다 물기도 적어 경사도 물론 완만해진다. 이것은 '완만한 화산재 언덕'을 뜻하는 '응회환'(凝灰環)이라고 부른다.


일출봉은 물론 경사가 가파른 응회구다. 그러나 일출봉은 화산폭발 당시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해버렸다. 수천년의 세월 속에 경사면이 파도에 깎여 나가면서 화구 내부만 남은 형태가 됐다. 그리고 바깥쪽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지금의 모양으로 변한 것이다. 침식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화구의 둥근 모양만 남아있는 일출봉은 바다쪽에서 계속 진행되는 침식으로 인해 분화구 내부가 깎여나갈 것이다. 끝내는 일출봉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수성화산활동에 의해 생겨난 일출봉은 화산 분출에 의해 생겨난 오름의 탄생 과정은 물론, 오랜 세월을 두고 침식돼가는 과정까지 보여주는 세계적인 지형이다.

거기다 화산 분출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의 모든 퇴적물들을 잘 보여준다. 이런 점이 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받기에 이른 것이다.

일출봉(지방기념물 36호)의 원래 이름은 성산(城山)이다.

성산반도의 중심을 이루는 높이 182m의 석봉(石峰)으로 화산의 분출에 의해 형성된 분화구로서 본도에서는 산방산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기생화산의 하나이다.

분화구의 바깥쪽은 오랜 기간 강한 해풍 등에 의해 대부분의 토양·암석이 유실되어 직벽을 이루고 있고, 분화구 안쪽은 넓이 2.64㎢의 초원으로 평지를 이루고 있다.

분화구 안은 옛부터 성산리민의 연료와 초가 지붕을 이는 띠와 억새 등의 채초지로 이용되었고 방목지로도 쓰여져서 매년 화입(火入)을 했기 때문에 나무는 거의 없고 억새와 띠의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일출봉을 이루는 암석은 제주도의 거의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현무암과는 다른 응회암이다. 일출봉 절벽을 해안에서 보면 푸른 빛이 감도는 치밀하고 고운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에 운반되어 퇴적된 퇴적암처럼 보이지만 퇴적암이 아니라 화산 활동에 의하여 생성된 암석이다. 대략 10만년전으로 추정되는 일출봉의 생성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온도가 1천도가 넘는 용암이 지표로 나오다가 갑자기 물을 만나면 폭발하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폭발성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현무암질 용암도 분출도중 물을 만나면 폭발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용암이 모래(화산재)처럼 부서져 분화구 주위에 쌓이게 된다.

수중폭발화산의 폭발력은 용암과 물의 비가 1: 1 정도일 때 가장 크다. 이 경우 화산재는 점성이 크지 않아 분화구 둘레로 넓게 흘러 나가 거의 수평에 가까운 층리를 이루며 쌓인다. 이렇게 생긴 것을 응회환이라고 하며 송악산 하부·수월봉·산방산 앞 용머리 해안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런데 물의 비율이 더 많을 경우 폭발력은 줄지만 폭발로 부서진 용암 조각이나 가루·화산재 등의 점성이 높아져서 원뿔처럼 경사가 급한 화산체인 응회구를 이룬다.

일출봉은 바로 이런 조건에서 만들어진 응회구이다. 서북사면을 제외한 모든 곳이 절벽이 된 것은 파도에 의한 침식 때문이다.


이들 수중 분출 화산체는 층이 발달해 1960년대 초반 아일랜드의 대륙붕에서 수중폭발이 일어나 스루치라는 섬이 만들어지는 것이 직접 관찰되기 전까지는 화산재가 물 속에서 운반돼 쌓인 뒤 융기한 것으로 생각됐다.

어느 날 갑자기 섬이 만들어지는 실제상황을 본 후에야 화산재가 아닌 수중폭발 자체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제주도내에서 일출봉처럼 수중폭발 화산에 의해 만들어진 오름은 모두 10여 개에 달한다.

시흥리 두산봉, 구좌읍의 아부오름과 입산봉, 우도의 소머리오름, 표선면의 매오름, 한경면의 당산봉과 수월봉, 안덕면의 왕이메, 대정읍의 송악산 하부, 바굼지오름 등이다

성산망은 수산진에 소속된 봉수로서 해발 182m의 일출봉 서쪽 봉우리에 있었으며, 동경 126°54′, 북위 33°26′에 해당된다. 봉수대 남서쪽으로는 수산봉, 북서쪽으로는 두산봉과 지미봉이 있다.

남동쪽에서부터 북쪽 해안까지 장애물이 없어서 적을 감시하기에 용이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남서쪽의 수산봉수(4.2Km)와 북서쪽의 지미봉수(5.4Km)와 교신하였다.

성산봉수는 기록상으로는 서기1653년의 탐라지에 처음 나오며 서기 1899년 정의군읍지에는 폐지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정의현성의 처음 위치가 고성리이며 우도 인근 바닷가에 왜구의 출몰이 잦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조선 전기에도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남제주군의 문화유적」124쪽) 위의 두 책에서는 성산망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었다고 쓰고 있다.

마을 홈페이지에는 유래와 현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조선조 세종 21년(1446년)에 성산 앞바다에 왜구(倭寇)와 외적(外敵)이 침입하니 이를 빨리 알리는 전달통신(傳達通信) 수단으로 당시 제주목사 정양(丁良)이 주로 오름을 이용하여 봉수정망(烽燧偵望) 22개소를 설치했는데 성산관내에는 고성리의 수산망(首山望), 신산리의 독자망(獨子望), 성산리의 성산망(城山望)을 두었다. 성산봉수(城山烽燧)에는 별장(別將) 6명, 봉군(烽軍) 12명이 근무했다.'


그러나 정양이란 목사는 없었고 비슷한 이름으로는 세종21년(1439) 4월부터 세종23년(1441) 10월까지 근무한 정간(丁艮)이라는 목사가 있었다.

아마 정간(丁艮) 목사의 이름 '간(艮)'을 '양(良)'으로 읽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나 재임 기간에서 차이가 있다. 1446년에는 이흥문(李興門) 목사가 재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