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학교바당..온평리 해녀공로비(海女功勞碑)

해녀들은 경계 구역 바다 미역의 50%를 학교에 냈다. 1년이 지나자 1교실 분(分)이 모아졌다.

2019-08-29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온평리 해녀공로비(海女功勞碑)

위치 ; 성산읍 온평리 1577번지(성산읍 일주동로 4740) 온평초등학교 운동장 서쪽
유형 ; 비석(공로비)
시대 ; 대한민국
비문 ; 溫平海女 不懈勞力 補助文敎 表其功德

 

온평리(옛 이름 열운이)는 바다가 길기로 유명하다. 6㎞나 된다. 온평리의 바다가 길어지게 된 연유는 일제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옛날에는 마을 경계가 해안에 접하지 않은 중산간 마을에도 그 마을 몫의 바다가 있었다. 농번기를 피하여 피서도 하고 바릇잡이도 할 수 있도록 한 공동체적 정신에서 나온 배려였을 것이다.

그래서 성산읍에서는 바다에 접하지 않은 수산리와 난산리도 바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일제시대에 수산리와 난산리가 바다를 포기해 버린 것이다.

일제가 한창 전쟁을 치르면서 군인들의 시체가 해안으로 떠오르는 일이 많아지고 그 시체를 끌어올리는 일은 해녀들의 몫이었다.

그런 궂은 일을 할 인적 자원이 부족한 두 마을이 '바다를 가지지 않겠다'고 포기하게 되었고, 그들이 포기한 바다를 온평리가 떠맡게 된 것이다.


성산읍 온평초등학교 운동장에는 '해녀공로비'가 있다. 해녀공로비가 초등학교 운동장 안에 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이 비석은 온평초등학교 건립을 기념하는 다른 비석들과 함께 있다.

온평리에 학교가 설립된 것은 1946년의 일이다. 학교 부지는 독지가(고은국 등)들의 희사로 마련됐다. 학교 건물은 온평리 출신 재일동포 이두후 선생과 기성회 간부들의 희사금과 모금으로 건립됐다.

이로써 동남국민학교(1923년 성산공립보통학교로 개교→성산서공립국민학교))에 다니던 마을 어린이들은 마을에 들어선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교실이 4개 밖에 없어 심지어 한 교실에 4학년까지 합반 수업을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기성회에서 일본에 나가 있는 재일교포들에게 모금하고 재력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학교부지밖에 구할 수 없어 고심하던 차에 잠녀들 사이에서 미역판매 대금을 기부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온평리 해안의 양쪽 경계(온평리/신산리, 온평리/신양리의 경계. 난산리와 수산리가 포기한 바다)에서 생산되는 미역을 팔아 운영비로 충당했다.(제민일보 110404, 160322)


그런데 1947년에 신축한 목조건물 4교실이 1950년 12월 교무실에 불씨를 남겨둔 채 교직원이 외출하는 바람에 화재로 다 타 버렸다. 4·3과 전쟁으로 어려워진 제주도의 살림살이에서 학교를 새로 지을 재원이 없었다.

학생들은 공회당 자리 등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공부하고 있었다.
온평리 앞바다는 물살이 세기 때문에 마을 앞바다에서 나는 미역은 당시 전국에서 으뜸으로 쳤다.

당시에는 소라·전복은 부식으로 쓸 정도로 큰 돈이 안 되었고 미역과 천초가 돈이 되었기 때문에 미역해경이 되면 학교에서는 미역방학을 할 정도였다.

어린이들은 어머니가 미역을 채취하는 동안 아기를 돌보거나 말리는 미역을 지키는 게 주된 일이었다. 당시 장에서는 마른 미역 10근(斤)이면 좁쌀 1말을 살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제1훈련소와 계약을 맺어 미역을 훈련소에 공급했다. 해녀들은 경계 구역 바다 미역의 50%를 학교에 냈다. 1년이 지나자 1교실 분(分)이 모아졌다.

그리고 해녀들은 2개 학년씩 합반으로 공부하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경계 구역 바다 미역 전부를 학교에 내놓을 테니 교실 하나를 더 지어 달라고 했다.


“그 땐 왜 그렇게 추웠던지…. 해안에도 눈이 많이 왔어. 눈이 팡팡 오길래 소나무 가지를 꺾어 옷을 덮어 뒀는데 물질을 끝내고 나오니까 찾지를 못하겠더라고.”(비석에 이름이 있는 조순월씨의 증언. 당시(29세) 해녀회장. 2007년 82세. 온평리 거주)


당시에는 12세부터 늙은이까지 해녀뿐 아니라 남자들도 나서서 미역을 나르고 말리는 일을 협력했다고 한다. 이렇게 눈보라와 추위를 뚫고 채취한 미역으로 마련한 기금을 보태어 1951년 2월 23일 가교사 4개 교실을 신축하게 되고 그해에 제1회 졸업생이 배출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육지로 물질하러 가는 사람들에게는 '한글 해득' 도장이 찍힌 양민증이 필요한 시대였다. 당시는 해녀들의 사상이 온건하면 ‘양민증’을 주었다. 양민증에는 한글 해득/미해득을 표기하는 난이 있어서 ‘한글해득’이 되면 육지에 나가서 물질할 수 있도록 출타 허가를 해주었다.

이 시기 1954년에 이 학교에 부임한 고창호(우도 출신) 교사는 30~50세 되는 부녀자 50여명을 모아 놓고 한글교육을 시켰다.

이는 일제 강점기 온평리에는 야학소가 운영돼 마을 청년들이 야학 교사로 나서 민족정신과 한글을 가르쳤던 전통의 맥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글해득 판정을 받았다.


고창호 교사는 교육을 받은 해녀들에게 바다에서 딴 미역의 일부를 학교 건립 자금으로 내놓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해녀들은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마을 전체 총회를 거쳐 마을의 허락도 얻어냈고 다른 마을과의 경계에 있는 바다를 '학교바당'으로 정하였다. 학교바당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이로부터 1958년까지 학교 신축 기금을 해녀들이 마련하였다.
1960년 온평초등학교 추진위원회의 이름으로 3개의 기념비를 세울 때에는 제외되어 해녀들의 이런 노력이 곧바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이 비석은 '해녀들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은 뒤인 1961년이 되어서야 온평초등학교의 이름으로 세워졌다.


이후 학교 운영비가 국고에서 지원되고 미역 값이 하락세로 접어들자 학교 마당이란 이름은 서서히 잊혀 갔다.

비문 〈溫平海女 不懈勞力 補助文敎 表其功德〉을 해석하면 〈온평리 해녀들은 게으르지 않고 노력하여 가르치는 일을 도왔으니 그 공덕을 나타낸다〉라고 할 수 있다.(국토지리정보원, 제민일보 070625, 070702, 110516, 150120. 경향신문 150306)
《작성 080318, 보완 16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