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제주성 북동 모퉁이에 세워진 서당..일도1동 삼천서당터

삼천서당이란 산저천(山底泉)·감액천(甘液泉)·급고천(汲古泉)의 세 하천이 흐르는 곳이라는 뜻

2021-09-01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일도1동 삼천서당터

 

위치 ; 제주시 일도1동 1198-8. 가막새미 북쪽, 곧 제주측후소 바로 남쪽 선일건재사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름다운가게 앞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시대 ; 조선시대
유형 ; 교육기관

 


제주도에 제일 먼저 생긴 사설 교육기관으로는 중종29년(1534) 심연원(沈連源) 목사가 세웠던 향학당(鄕學堂)을 들 수 있다.

이것이 폐쇄되자 임형수(林亨秀) 목사가 인종원년(1545)에 부임하여 김녕 포구 위에 김녕정사(金寧精舍)를 지어 동학이라 하였고 명월성 서쪽에는 월계정사(月溪精舍)를 지어 서학이라 하여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정사는 보통 명유(名儒)가 창건한 강학의 서재(書齋)이기 때문에 그의 문인들이 서원으로 발전시키는 모태가 되기도 하였으나 제주도의 경우는 향학당, 김녕정사, 월계정사가 일종의 개인의 서재적 서당으로 그치고 말아 정사가 서원으로 발전, 변모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서당은 일반 서민의 자치적 성격을 내포한 서민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교육활동이 활발해졌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

원래 서당이라고 하면 동네 사람들이 학식있는 사람을 위촉하거나 스스로 재(齋)만을 두어 훈장 한 사람이 여러 학생들을 교육하는 곳이다.

훈장 혼자서 많은 학생을 가르치기 어려울 경우 우수한 학생을 지명하여 접장을 시키기도 하였으며, 교육 내용도 기초과정이어서 이곳을 거친 학생들은 향교나 서원에 진학하였다.


삼천서당은 영조11년(1735)에 목사 김정(金亻政)에 의해 제주성 북동 모퉁이에 세워진 서당이었다. 당시 세워진 서당 건물은 노성(老成)한 유생을 기숙시키는 존현당(尊賢堂) 2칸, 삼읍(三邑:제주목·대정현·정의현) 자제를 기숙시키는 강당(講堂) 8칸, 서민의 자제를 기숙시키는 장랑(長廊) 12칸 등 세 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학생들의 기숙에 필요한 학량(學糧)은 우선 쌀 50섬과 무명 1동(50필)을 김정 목사가 마련해 주었으나 뒤에 가서는 6소폐장(六所廢場)을 획급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경비를 충당하도록 하였고(건입동지에는 김정 목사 때부터 6소폐장이 늠료용으로 획급되어 있었다고 되어 있음), 어선 1척을 지어서 찬용(饌用)을 마련하게 하였다.

한라일보 강문규 논설실장의 글에 따르면 삼천서당(三泉書堂) 아래는 천룡석(天龍石)이 있어 그 위에서 글씨연습을 했다고 한다.


삼천서당이란 명칭은 산저천(山底泉)·감액천(甘液泉)·급고천(汲古泉)의 세 하천이 흐르는 곳이라는 뜻에서 따왔다고 하여 三泉은 주변의 샘 3곳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 쉬우나 사실은 주역에 있는 내용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무지몽매함을 깨우치는 샘, 그 샘과 관련해서 선현들이 말한 것 3가지가 있어서 그런 이름을 쓴 것이라고 한다.


김정(金亻政) 목사는 상량문에서〈三泉이라 게판(揭板)한 것은 과감하게 실천하면서 묵묵히 덕을 기르는 몽상(蒙象)을 취했음이요, 뜰 아래 두 우물(麗澤)을 판 것은 친구들과 강습하는 太社(兌辭)를 실천함〉이라 하였다.

이원조 목사는 중수기에서 〈재(齋)는 가락천 위에 있는데 좌우의 원천(原泉)으로 해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산 아래에서 솟아나오는 샘물이 몽매하니 군자는 바르게 기른다고 하였고, 맹자는 이르기를 사단(四端)의 확충은 샘이 처음 솟아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며, 부자(夫子=孔子)는 이르기를 우물은 아홉길을 팠어도 샘물 나오는 데까지 가지 못했으면 그것은 우물을 포기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옛 사람들이 샘에 관해 말한 것이 셋이니 배움의 시작과 끝이 갖추어진 셈이다라고 하였다.〉(건입동지 169쪽)


학규(學規)는 엄히 적용했을 뿐만 아니라 고훈(古訓)과 격언을 게시하여 스스로 실천하도록 하였으며 김정 목사 자신도 공무를 파한 뒤에는 몸소 서당에 나가 학생들과 서로 질의하고 문답하였다. 학생 정원은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늠료(廩料)를 받는 접생은 때에 따라 15인에서 20인까지 변화가 많았다.(제주시교육50년 213~214쪽) 디지털제주문화대전에 의하면 학생 정원은 20명이었으며, 고종8년(1871)에는 좌학당(左學堂)이 폐지되면서 정원을 40명으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헌종9년(1843)에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가 중수하고 중수기를 지었으며, 철종1년(1850) 제주목사 이현공(李玄功)이 개건하였다. 광복후까지 보존되어 왔으나 1958년 헐리었다. 제주도의 사설교육기관으로서는 오랫동안 교육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펼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제주 전 지역의 선비가 이곳에서 글공부를 하였으며, 이 삼천서당을 통하여 『표해록(漂海錄)』을 쓴 장한철(張漢喆)을 비롯하여 오점(吳霑), 신상흠(愼尙欽), 오태직(吳泰稷), 안영수(安永綬), 김양수(金亮洙) 등 수많은 학자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노봉문집』 중 「삼천서당상량문(三泉書堂上樑文)」을 보면 끝부분에 "원컨대 상량한 후 영재가 구름같이 모여들고 큰 운이 하늘에서 열려 먼저 안 사람이 뒤에 아는 이를 깨닫게 하여 문교를 크게 하며, 아름다운 풍습을 열고 묵은 습속을 고쳐 영원토록 나날이 새로워지기를 기대하노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종30년(1893)에 김정을 기리는 흥학비가 삼천서당 안 존현당에 세워졌는데 삼천서당이 헐리면서 이도1동 1421번지에 있는 오현단(五賢壇) 경내로 옮겨졌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


현장보다 서쪽 큰길가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만덕로6길27호 집 앞에 위 사진과 같은 주춧돌이 있는데 고봉만(1931년생, 건입동 거주)씨에 의하면 이것은 삼천서당 건물에 썼던 것이라고 한다. 원기둥 모양의 양쪽에 위아래로 좁게 평면으로 다듬은 부분이 있다.
《작성 120414, 보완 130523,130725,13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