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백성 구휼..남원2리 황구하선정비

'굶어 죽은 백성 위령제 지내고 모든 진상품 3분의 2로 감면'

2017-10-26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남원2리 황구하선정비

황구하선진활민비 黃龜河善賑活民碑
위치 ; 남원읍 남원2리 도로변. 의귀초등학교 서쪽 새가름교를 지나 과수원 비닐하우스 앞에 있었는데 2008년 운지오름 동쪽 아래로 옮겨 세었다.
유형 ; 비석(선정비)
시대 ; 조선
비석 크기 ; 높이 70cm, 너비 33cm, 두께 12cm
비석 받침돌 ; 가로 110cm, 세로 85cm, 두께 30cm 크기의 현무암
비문 ; 전면 가운데 '□□黃公□□善賑活民碑'라고
전면 오른쪽 '田□無收 公奉聖旨 區餓將□望 來賑島中
전면 왼쪽에 珉編活生炅德 死生 □政蕩□(들입아래쌀미)死命後世不忘'
뒷면에는 '□□□公龜河善賑碑' '□□德及函冥難亡千春'
옆면에는 글씨가 없다.

 


황구하의 선진활민비는 의귀초등학교 서쪽 100m에 있는 '진물교'라는 다리를 건너서 서쪽으로 직진하여 좁은 비포장도로로 들어서면 500여m쯤에 '새가름교'라는 다리가 있고, 다리의 서쪽 20여m 지점에 있다.

이곳에는 비석받침돌이 6개, 비각 지붕이 4개 있는 것으로 보아 6개 이상의 선정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황구하 어사의 선정비와 위혁만(魏赫萬)현감의 선정비만 남아 있다.

이곳에 선정비들이 남아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의귀리에는 조선초부터 의귀원이 있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광해군원년(1609) 판관 金緻의 동서방리 신설로 정의현 中面이 생길 때부터 1925년 남원리로 면사무소를 옮길 때까지 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라는 점이다.


황구하(黃龜河)는 본관은 창원(昌原). 아버지는 황건(黃鍵)이며, 어머니는 이문행(李文行)의 딸이다. 숙종31년(1705) 알성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숙종38년(1712) 지평·사서를 지냈으며, 숙종39년(1713) 정언·부수찬·수찬을 거쳐 숙종42년(1716) 교리를 지냈다.


숙종42년(1716) 정월 5일에 교리(敎理) 직에 있다가 제주별견어사(別遣御史)로 임명되었다.

황구하는 동년 1월 22일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제주 기민(飢民)의 수가 47,000여명에 이릅니다. 목사 변시태의 장계를 보니 모름지기 20,000석의 미곡은 있어야 거의 나누어 진휼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획급한 바는 전후를 통털어 27,000석입니다. (중략) 신의 생각으로는 연해 고을에 비축되어 있는 어떠한 곡식 중에서 별도로 분정(分定)하여 정대(整待)시켰다가 이미 수송한 곡물이 부족할 것 같으면 곧 본주의 배를 급송하여 적기(適期)에 주진( 賑)함이 좋을 듯합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3,000석만 더 주도록 하십시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황구하는 2월 2일에 왕을 하직하고 제주로 향하였다.


제주에 도착한 황구하는 여러 해 동안 재해를 당한 백성들을 구휼하고 행정을 감찰하였다. 굶어 죽은 백성들을 잘 묻어 주었으며 위령제도 지내게 하였고, 모든 진상품을 3분의 2로 감면해 주도록 하였다.

부임 때 가져온 조 3만 섬으로 구휼하고 남은 곡식들을 제주목·대정현·정의현에 골고루 나누어 주었고, 환자곡(還子穀)도 절반만 거두게 하였다.

한편 초시를 거행하여 문과에 고처량(高處亮, 1688~1762)·정창선(鄭敞選, 1683~1746)·고만갑(高萬甲, 1681~?) 3인을 급제시켰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진소정)


윤3월 9일에 '도민 가운데 굶어 죽은 자가 매우 많으니 청컨대 향축(香祝)을 보내시어 설단(設壇)하여 제사를 지내서 굶주린 영혼을 위안하십시오.' 하고 장계를 올리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5월 10일에는 '회전복(灰全鰒)은 해마다 봉진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장계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특별히 우선 감하라.' 하고 본도의 진상 물종도 모두 3분의 2를 감하라고 하였다.


6월 23일에는 '진제하고 남은 곡식 1,440여석은 섬의 삼읍에 분배하여 계속하여 보리가 다 된 후에 진휼하도록 하고 새 보리로 환상하는 것도 역시 감봉할 것을 청합니다.' 하고 장계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환상은 또한 절반만 징봉하라고 하였다.


황구하는 9월 8일 환조(還朝)하였다. 이 때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유생들의 시권(試卷)을 가지고 갔으므로 대제학 송상기로 하여금 과차(科次)하도록 하여 고만첨 등 3인에게 사제(賜第)하고 전시(展試)에 직부하도록 하였다.(조선왕조실록 중 탐라록 494∼498쪽)


1717년(숙종 43) 이조정랑에 임명되었으며, 1718년(숙종 44) 부응교와 사간을 거쳐 1719년 대사간을 지냈다. 1721년 대사간 재임 중 노론 4대신인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이이명(李?命, 1658~1722)·이건명(李健命, 1663~1722)·조태채(趙泰采, 1660~1722)가 김일경(金一鏡, 1662~1724)의 탄핵으로 유배될 때 파직되었다.

1724년(경종 4)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이 집권하자 대사성이 되었다. 1726년 예조참판·도승지·호조판서를 지냈으며, 1727년(영조 3) 호조판서·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70cm, 너비 33cm, 두께 12cm이며, 비석 받침돌은 가로 110cm, 세로 85cm, 두께 30cm 크기의 현무암이다.
《작성 04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