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은 의구한데 거리는 비어있고.."⑮
상태바
"산천은 의구한데 거리는 비어있고.."⑮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7.12.07 0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올레14코스허프걷기)월령-저지마을 향한 길 낙천리로 나와

 


불가사의한 일이 참 많은 14코스 하프길이었다.

또한 이날은 유난히 부부 또는 홀로 걷는 올레꾼을 가장 많이 본 날이기도 했다.

적어도 10여팀 이상의 올레꾼을 만난 것 같다.

문제는(?) 월령에서 저지예술인마을까지 14코스의 나머지 반을 걸어야 하는데..
정작 걸어서 도착한 곳은 13코스를 거꾸로 걷는 낙천마을로 들어선 것이 불가사의중의 불가사의였다.

왜 14코스를 걸었는데 13코스로 나왔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 봐도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예전에도 한번 그런 일이 있긴 있었다.
14코스를 열심히 걸었는데 14-1코스가 나타났던 적이 있었다.

저지오름이 가까운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야하는 길을 오른쪽으로 틀었던 탓일까..
왜 14코스에 느닷없이 13코스가 나타나는 것인지..
나는 지금도 그게 참 의아스럽다.

지난 2일은 올레14코스의 반인 월령리 선인장마을에서 저지예술인마을까지 가는 코스였다.
오전 10시10분쯤 집에서 나와 월령리까지 달려 11시14분에 출발지에 도착, 중간스탬프를 찍었다.

 

월령리 중간 스탬프 포스트에서는 가까이에 있는 한경해상풍력단지가 눈에 크게 들어온다.

그러나 스탬프를 찍고 밖으로 나와 월령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는 그곳 대로변에는 차를 세워둘 곳이 마땅치가 않아 마을 입구쪽에 차를 세워두고 걷기 시작했다.

올레14코스 하프코스의 불가사의는 사실 월령에서 가장 먼저 만난다.

그 수많은 선인장들이 어떻게 그곳에 터를 잡아 자리하는 동안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했을까..
도무지 상상이 안가는 곳이 실은 월령리 선인장마을이다.

 

 

 

 

거꾸로 걷는 14코스의 후반코스는 바다를 따라가는 길이 아닌, 바다가 없는 숲길 또는 들길이다.

이 하프코스의 초반은 선인장마을을 지나 새로 만든 계곡길을 따라 계속 걷는 코스다.
지루할 정도로 긴 코스를 일직선으로 계속 걸어야 한다.
그래도 중간중간 쉬는 곳이 있어 다행이긴 했다.

그 길을 걸어가는데 한 지점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며느리 또 손자가 함께 밭에 나와  잘 자라고 있는 파에 물을 주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가 안녕 하며 손을 흔든다.
아주 밝은 아이였다.
나도 손을 흔들어주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14코스에서 두 번째 만난 불가사의는 코스길 중간쯤에서 만나는 밭에 정교하게 놓인 성인지 무덤인지 모를 기묘한 돌덩어리들이었다.

이 돌덩어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냥 쌓아놓은 돌무더기가 아니었다.
성처럼 정교하게 쌓인 모습도 보이고..위에는 공간도 있는 것으로 보아 무덤같기도 하고 성 같기도 했다.

 

 

 

이들 돌무더기들은 볼 때마다 궁금증을 더하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무려면 어떠랴..그냥 왜 그런 곳에 그런 돌무덤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세 번째 불가사의는 어느 지점을 지나는데 길에 물이 흥건하여 물을 따라 가보니..
상수도관인지 뭔지 아까운 물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던 모습이다.

물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누군가 이를 고치려고 하긴 했던 것인지 장갑도 그대로 남아(오래전에) 있었다. 뚜껑도 쇠로 된 것이라 묵직했다.

하지만 고치다 포기한 것인지..물은 계속 길을 따라 흘러 길을 따라 흥건하게 변하는 중이었다.

 

 

 

 

고치려면 제대로 고치던가..고치다 가버린 탓인지..아까운 물은 아마 지금도 흐르고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불가사의는 14코스의 길을 왜 쓰레기매립장으로 냈는 지에 대한 궁금증이다.

14코스를 걷다보면 악취와 함께 숲속에 비닐 등이 흩어져 날리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 길의 끝에 쓰레기매립장이 있고 올레는 그 옆길을 돌아가도록 돼 있는 것이다.

예전에 올레라운지를 찾았을 때 코스를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건의를 했었는데 올레길 코스가 여전히 개선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또 하나의 불가사의는 중산간지역에 걸려있는 건축허가증 간판이었다.

건축허가는 1층짜리 하나를 짓는다고 나와 있는데 커다란 돌과 나무뿌리가 마치 곶자왈지역을 쓸어버리듯 엄청난 면적이 다 개간되어 있었다.

 

 

     
 

그런 곳에 건축허가가 나는 것도 이상했지만 그 개발에 따른 피해는 그 이상의 문제점을 던져주고 있었다.

이처럼 월령에서 저지까지의 코스는 여러가 불가사의와 함께  들길과 숲길을 따라 걷는 코스다.
가다 보면 만나는 일들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예전에는 없었던 주거타운이 들어서 있었고 거대한 농장도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었다.

그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보아왔던 바다는 멀리서만 잠시 보일 뿐이다.


14코스 중간길에서 만난 7년 전쯤 내려와 제주에 살고 있다는 김종남 선생을 만났다.
그는 부부가 함께 올레를 걷는 중이었다.

 

“제주에 살면서 오름도 올라가고 둘레길도 다니고 있다”면서 “이제는 중산간 정도나 올라와야 제주 같고 해안쪽은 전혀 제주답지가 않아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인구가 많아져서인지 제주도가 옛날 제주도가 아니”라며 “너무 변해버려서 앞으로 계속 살 것인지를 더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다”고도 말했다.

제주도 탐라해상풍력발전 건설관계로 제주에 살고 있는 김 선생은 제주도의 환경문제로 한참 이야기하며 서로 교류하면서 지내기로 했다.

그들과 헤어진 후 마을길을 따라 올라왔는데 큰길임에도 다음 길을 안내하는 올레안내 리본이나 올레길 표시가 보이지 않았다.

 

 

저지오름은 왼쪽에 보이는데 안내표시를 찾지 못하자 할 수 없이 그냥 직진해 걸어보기로 했다.

가다보니 다행히도 저 앞에 올레리본이 보이기 시작했다.

갈림길을 만나자 내눈에는 분명 왼쪽은 13코스로 가는 길로 안내하는 것으로 보았다.
나는 오른쪽길로 걷기 시작했고...
아마 이곳이 나를 헷갈리게 한 분기점이었다는 생각이다.

열심히 걷는데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13코스 올레길이라는 표지가 나온 것이다.

그래도 어쩌랴 그냥 걸어가 보기로 했다.

결국 도착한 곳은 13코스 중간포스트가 있는 낙천리 아홉굿마을이었다.

전에는 14코스를 찾아 걸었는데 14-1코스로 길이 나타나더니 이번에는 13코스였다.

14코스는 늘 나에게 숙제를 남긴다.

14코스 중 아직 걷지 못한 3km(지난번 완주때 후배차를 타고 3km는 걷지 않은 적이 있다) 정도 남아 있다는 일도 그렇고, 다음 14-1코스를 갈 때는 다시 잘못 들어선 그 길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점에서 다음 코스를 걸을 때는 몇시간 정도는 더 걸어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날 날씨는 춥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잠시 쉴 때는 땀이 식어서인지 몸이 차가웠다.

예싱보다 더 걸은 탓에 13코스 중간지점 스탬프를 찍은 시간은 오후 2시45분 경.

3시간 30분 정도를 걸은 셈이 됐다.

 

 

 

나는 낙천리 의자마을 입구 수다뜰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라면 밖에 안된다고 해서 잘 익은 김치에 공기밥 하나를 시켜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웃뜨르 중산간 버스상태는 괜찮을까..

나는 식당에서 월령리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신창까지 가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면 될 것 같다고 해서 부지런히 걸어 정류소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방향을 거꾸로 앉았던 나는 반대편에 버스가 와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다.

보니 반대쪽으로 와서 금방 지나간 버스가 내가 타야할 버스였다.

신창까지 가는 방향을 제대로 알고 기다렸으면 그 버스를 탈 수 있었는데..
너무나 아쉬운 일이었다.

시간표를 보니 다음 버스를 타려면 아무리 빨라도 40여분 이상이나 기다려야 했다.

아무도 없는 웃뜨르마을에 우두커니 앉아 마냥 버스를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시 콜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콜택시는 10분 후에 도착한다며 요금은 9천원이란다.


택시를 타고 월령리 버스정류장이 가까워지고 차가 서자 요금을 건넨다고 했더니 그 운전기사는 보지도 않고 손만 달랑 뒤로 내민다.

나는 그 손에 돈은 놓아 주었다,

그 매너 참..
제발 서비스업 종사자는 서비스정신과 함께 매너도 좋아야 하는데..
돈을 주면서도 기분이 찝찝했다.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뒤로 건네주는 그 손에서 잔돈 1천원을 받았다.

다음에는 14코스 하프코스 남은 구간과 함께 전에 걷지 못한 3km 정도를 포함해서 더 걸어야 할 듯하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소개하는 열 두 번째 인물은 포은 정몽주다.

 

정몽주는 고려말 삼은 중의 한사람이다.


삼은이란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통해 권력을 잡고 조선을 개국하자, 그의 어떠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고려조의 지조를 지킨 세 사람을 말하는데,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가 그들이다.


정몽주는 공민왕 9년 23세 되던 해에 삼장시에 장원급제하여 예문검열을 거쳐 34세의 나이에 이미 성균관대사성에 올랐다.그는 이인임 등이 주도한 배명친원 정책을 반대하다 1년간 유배생활을 하였으나 재 등용되어 왜구토벌에 참전하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의 삭감과 대명 국교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388년 예문관 대제학에 오른 그는 공양왕 영립에 참여했으나 조준, 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에 반기를 들었다.


드디어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성계는 둘째 아들 이방원을 시켜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던 정몽주에게 조선 개국에 협력할 수 있는 지를 알아보게 했다.
이때 이방원은 '하여가'를 지어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그러나 이방원의 하여가를 들은 정몽주는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단심가'로 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결국 회유에 실패한 이방원은 조영규를 시켜 선죽교에서 그를 철퇴로 살해했고, 그때 흘린 핏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정몽주가 죽임을 당하게 될 당시 그는 이방원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건장한 무사 한사람이 앞을 지나가기에 살해의 기미를 눈치 채고, 녹사(관청에 속한 7-8품의 벼슬)에게 위험하니 다른 길로 피신할 것을 이르자, 녹사는 ‘소인이 어찌 대감을 보필하지 않고 다른 길로 도망가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끝까지 정몽주를 따랐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동반 살해되었는데, 죽을 때 서로 부등켜 안고 죽었다고 한다.

그후 조선 왕조는 오랫동안 정몽주의 충정과 절개를 두려워하여 그 어떤 찬양의 비각도 세우지 못하게 하다가 사후 400년이 지난 정조 4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를 문묘(공자나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에 배향하게 되었으며 비각에 그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덕 12년째인 정축년에 태학사의 학생들이 임금께 글을 올려, 문충공 정몽주는 효가 있고 이학에 있어서도 동방의 시조이며, 사문에도 조예가 깊으니 문묘에 배향하길 청했다. 임금이 이를 받아들여 그해 9월 그를 문묘의 서쪽 최치원 선생의 뒤쪽에 배향하였다. 그리고 명을 내려 문묘를 수리하고 표석을 세우게 하였는데, 고려의 벼슬 이름만 쓰고 시호인 문충공을 쓰지 않은 것은 그가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숙종은 그를 기리는 영모제에 ‘충절과 정의는 천년 하늘에 드높으니 내 평생초록 존경하여 따르리라’는 친필 현액을 내렸고, 후일 시인 석희박은 정몽주의 무덤과 비각을 보고 충신의 절개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산천은 의구한데 거리는 비어있고
저녁 놀 잠긴 곳엔 물소리만 처량하다.
말 세우고 홀로 와 옛 자취 찾아보니
한 조각 비석에 정충문만 남아있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정몽주의 묘는 원래 개성 근처 풍덕에 있었는데 태종때 이르러 후손이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하기 위해 예를 갖추어 묘를 옮길 때, 장례 행렬이 경기도 용인의 수지에 이르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 앞서가던 영정이 날아갔다.


바람에 날아간 명정을 찾아가 보니 양지바른 한 지점에 떨어져 있기에 이를 수상히 여긴 후손들이 지관을 불러 그곳의 지맥을 짚어보니 자리가 명당인 지라 그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오늘날 경기도 용인 문수산 기슭 정몽주의 묘소에는 왕릉에나 허용된다는 담이 둘러있고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명이 새겨져 있다.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 不事二君”

권력은 종종 정의를 추구하고 페어플레이를 하는 자들의 몫이 아니라 음모를 꾸미고 그 음모에 성공한 자들의 몫이 될 때가 많다. 음모는 음흉한 계획이므로 부당함을 정당화시켜야 하기에 늘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역사적 흐름의 대세는 의의 대세일 수도 있고, 불의의 대세일 수도 있다. 꺾을 수 없는 대세임을 알면서도 결코 불의에는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 의인이다.


포은 정몽주는 고려 말의 진정한 의인이었다.
정몽주는 그렇게 의를 지키려다 살해되어 한 조각 비석에 문충이란 이름을 새겼다. 그리고 문충의 절개는 단심가와 선죽교에 면면히 살아남아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후손들을 일깨우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