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랭이마을,바래길..육지속의 섬 남해는..
상태바
다랭이마을,바래길..육지속의 섬 남해는..
  • 김평일 명예기자
  • 승인 2018.05.05 09: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평일 명예기자,그림 같은 한려수도 물길 품은 남해도를 가다
 

그림 같은 한려수도의 물길을 품고 있는 남해도를 다녀왔다.

남해도에는 관광명소가 너무 많다.

조선 태조가 산 전체를 비단으로 입히려고 했다는 금산. 상주 은모래 비치, 송정 솔바람 해변의 넓고 빛나는 백사장, 가천과 대지포해안 관광도로의 절경, 서포 김만중 의 유배지였던 노도와 물빛이 너무도 고운 앵강만, 물건방조림과 물미해안의 푸름, 지족해협의 원시어업 죽방렴 등 남해의 모든 것이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남해도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 등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큰 섬이다.

1973년 남해대교가 개통된 이후로 배를 타지 않고도 들어 갈 수 있는 육지속의 섬이다.

 

육지와 연결된 지 45여년이 지났지만 섬 특유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 남해도다.

남해도의 역사를 보면 삼한시대에는 남쪽 변한(弁韓)의 12개 부족 국가 중 군미국(軍彌國) 또는 낙노국(樂奴國)에 속하였다고 추측하고 있고 가야연합시대에는 6가야 중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현 진주 관할인 고령(古寧)가야에 속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시대에 비로소 남해군이 사적자료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통일신라 신문왕 7년(687) 때 신라는 남해도를 전야산군(轉也山郡)이라 칭하고 청주(靑州: 現 晉州) 관할에 두어 태수(太守)를 지방장관으로 하여 2개현(蘭浦縣, 平山縣)으로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그 후 경덕왕(景德王) 16년(757년)에 단행된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남해군(南海郡)으로 개칭되었고 강주(康州 : 靑州 개칭)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고려 8대 현종 9년(1018년)에 대대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남해군을 남해현이라 개칭하고 현령을 두었고 고려말기부터 왜구들이 남해안 일대를 통하여 약탈살상을 자행함에 따라 남해현은 정상행정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31대 공민왕조(1351~1353년)에는 진주관내 대야천(大也川 : 鐥川) 부곡으로 행정 관서를 옮기는 사태까지 생겼다.

조선시대에는 3대 태종13년 (갑오 1413년)에 남해현을 하동(河東)과 병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 되었다가 하동현(河東縣)이 독립함에 따라 진주의 금양부곡과 합쳐져서 해양현(海陽縣)이 되었고 그 후 금양(金陽)이 진주(晉州)에 병합됨에 따라 남해현으로 복귀되었다.

선조 25년(1592년)부터 임진. 정유왜란의 전란지로서 7년간은 남해도는 무인지경이 된 적도 있었고 고종 32년(1895년)에 남해현을 남해군으로 개칭하였으며 1906년에는 진주목에 속해 있던 창선도가 남해군으로 편입되어 8개면이 되었다.

 

현대에는 1973년 이동면(二東面)의 갈도(葛島)가 통영군에 편입되었고 1979년 남해면은 읍(邑)으로 승격되어 1읍7면이 되었으며 1986년 4월 1일 이동면 상주출장소가 상주면으로, 삼동면 미조출장소가 미조면으로 승격되어 1읍 9면이 되었다.

남해군은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여 살기 좋은 고장이다.

인구는 44,642명 (남: 21,348명, 여: 23,294명)으로 장수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남해도에서 눈길을 가장 먼저 가는 건 산비탈에 널려있는 다랑논들이다.

‘다랭이’는 협소한 농지를 뜻하는 순 우리말로 이 마을 사람들은 '삿갓배미' 라고 말한다.

 

이곳은 봄에는 유채꽃이 피고 가을에는 벼가 여물어 고개를 숙이는 등 사시사철 인간의 삶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2012년 CNN선정 대한민국 관광명소 3위에 랭크될 만큼 관광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지역이다.

남해도는 우리나라 섬 중에서 산지 비율이 가장 많아 넓고 평평한 땅을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다.

섬 주위가 모두 황금 어장이지만 섬의 둘레가 가파른 절벽인 데다 거센 파도가 몰아쳐 배가 접근을 쉽게 할 수 없는 곳이 허다하다.

 

어려운 자연환경을 남해도 옛사람들은 가파른 산을 개간하여 만든 계단식 논이 다랑논이다.

특히 가천의 다랭이마을은 마을 사람들의 발자취에 세월이 더해져 100여 층의 논으로 형성된 마을로 손바닥만한 논이 언덕위에서 부터 마을을 둘러싸고 바다까지 이어지며 680여개에 달한다.

인고의 세월이 지나 지금 다랭이마을은 오늘을 사는 후손들에게 관광이 명소가 되어 힐링과 체험의 현장으로 탈바꿈되고 있다.

다랭이마을의 최고 명물은 암수바위인데 이 두 바위를 남근석과 여근석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매년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위해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있다.

 

남해군에는 ‘바래길’이 14개코스가 개설되어 있다.

‘바래길’은 여인네들이 마을에서 산비탈을 내려가 바다에서 바닷말이나 고동 등을 잡던 길을 말하는데 14개코스 중 가천 다랭이마을에 이르는 ‘다랭이지겟길’은 16㎞로 5시간가량이 소요되지만 남해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걷는 길이다.

아름다운 남해에서도 가장 이름난 명승지는 금산이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은 경남 거제시의 지심도에서 전남 여수시 오동도까지 뱃길을 따라 자리한 크고 작은 섬들과 천혜의 자연경관을 묶어 1968년 한려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는데 금산은 한려해상 국립공원에서도 유일한 ‘산악공원’이다.

해발 705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예부터 금강산에 빗대어 ‘남해의 소금강’이라 부를 만큼 경치가 빼어난 산이다.

 
 
 
 

기기묘묘한 기암괴석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금산에는 갖가지 형상의 바위와 굴 등에 이름을 붙여 ‘금산 38경’이라 일컫는다.

이곳에 우리나라 3대 기도처로 꼽히는 보리암도 있다.

보리암에 올라 해수관음상의 자애로운 시선이 닿는 곳을 함께 바라보면 짙푸른 망망대해와 그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사방 막힘없는 전망을 가진 금산은 고려 시대부터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는 역할도 했다.

금산은 태조 이성계의 건국신화를 간직한 절경으로 조선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온 산을 비단으로 덮으려다 여의치 않자 이름을 비단금자 금산이라 바꿨다는 건국신화를 간직한 명산이다.

 
 

남해는 죽방멸치로도 전국에 이름난 섬이다.

특히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낮은 지족해협의 자연조건을 활용한 죽방렴 어업은 이제는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어업방식을 간직하고 있어 새로운 관광지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는 특히 맛이 좋고 생산량이 적어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죽방멸치는 '죽방'이라는 대나무로 만든 부채꼴 모양의 말뚝을 통해 생산되는 멸치이며 일반 멸치처럼 그물로 잡지 않고 청정해역의 빠른 유속에 의해 멸치들이 죽방렴안으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비늘이나 몸체 손상 없이 건져 올릴 수 있다.

보물섬 남해의 별미 멸치. 부드러우면서도 씹는 맛이 있고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봄날의 멸치회, 그리고 사철 맛볼 수 있는 멸치쌈밥. 남해 멸치 요리는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또 다른 체험을 하게 한다.

남해에서 본 다랭이마을이나 금산 보리암, 지족해협의 죽방렴은 남해 여행이 백미라는 생각을 하면서 삼천포대교를 건넜다.

삼천포대교위에는 얼마 전 개통을 했다는 케이블카들이 공중을 날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