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밤중, 새벽 부르자니 바람만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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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밤중, 새벽 부르자니 바람만 차다.."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8.09.18 0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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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남원포구-토산초등학교, 그림같은 바다가 압권
 

 

오랜만에 걸어서였을까.

올레4코스에서 3코스 중간지점인 토산초등학교까지 가는 길이 참 멀기만 했다.

길을 잘못 들어 걷는 내내  산과 밭만 보이는 산등성이를 오르면서 4-5번이나  엄청 헤맸다.

결국 중간에 너무 지친 나머지 걷기를 포기한 것이 결국은 좋은 선택이었다. 내려오는 중에 올레코스를  찾아  다행스럽게도 중간스팸프를 찍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4코스를 걸을 때는 조심하라는 얘기인지..전조였는지.. 지난해 걸을 때도 준비가 부족했었다.

출발점에 도착해서야 올레수첩을 놓고 온 걸 알고 지도를 하나 얻어 스탬프를 찍었는데, 마치 징크스나 되는 것처럼 이번에도 똑같이 그런 일이 있었다.

 
 

지난 15일 오전 올레4코스사무소가 보이는 곳에 도착한 후에야 수첩을 놓고 온 걸 또 알게 된 것이다.

이날도 다시 지도를 하나 얻으려고 했는데, 마침 사무소 문까지 잠겨 있어 참 난감했던 차에...

그때 반대편에서 차를 세우고 뛰어 오는 이가 있었다.

올레사무소 직원이었다.

"잠시 점심을 먹으러 가려는데 내가 서 있어서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고마운지...

나는 "수첩을 놓고와서 지도를 하나 얻으려고 한다"고 했더니 흔쾌히 지도를 주시더니 덤으로 혼저옵서예라는 제주도 여행지와 맛집을 소개한 책을 하나 더 주셨다.

“하나 밖에 남지않았다”면서..

나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고 그 분은 오히려 내게 자꾸 미안하다고 했다.

올레 4코스에서 3코스 중간까지 걷는 하프코스의 시작은 그런, 아주 작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남원포구를 지나 남원 앞바다를 지나는 3코스로의 출발은 파아란 하늘과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바다와 더불어 그림 같은 장관부터가 압권이었다.

마치 엽서에 나오는 사진같이 하늘과 바다가 너무나 푸르렀다.

당연히 사진 몇 커트를 찍었지만 사실 카메라로는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담아낼 수가 없다.

그래서 이번 올레걷기에서는 사진은 최소화하고-어차피 찍어봐도 활용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걷기에 집중하기로 결심하고 처음부터 나선 길이었다.

몇 달이나 쉬어버린 몸이라 무리가 오면  안되겠기에 또한 천천히 걷고자 했다.

 
 

당초 토산초등학교가 토산봉(망오름) 인근에 있는 줄(?)만 았았던 나는 토산봉(망오름) 만을 보며 계속 잘못된 방향으로만 따라 걷고 있었던 것 같다.

잠시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반대편쪽 오르막길을 무지막지하게 올라도 오름을 오르는 길도 만나지 못했고 자꾸 헛된 길만 찾아 다시 오르기를 게속 했다.

사실 해안도로로 올라와서는 큰 길을 따라서 가야하는데 오름을 보며 다른 길을 따라 오른 탓에 생긴 일이기도 하다.

동네가 참 평화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계속 위쪽을 향해 걸었지만, 아예 처음부터 올레리본은 보이지도 않았는데 나는 어딘가 있으려니 하고 계속 걸었다.

 
 

오랜 만에 걷는 때문이라 다리도 무거운데 계속 오르막길을 계속 올랐으니 지칠 만도 했지만..

나는 오랜 만에 걸어서 그런 것이라고 애써 참으며 걷고 또 걸었다.

한참 오르다보니 공동묘지터가 나오고 올라가봐도 길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다시 처음 시작된 길로 내려오다가 중간에 다시 왼쪽 옆길로 계속 걸어가자 큰 길이 나와서 또 다시 오르면 되려니 하고 걸었지만 올라가도 올라가도 올레리본도, 그 길의 끝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더 이상 걷기는 무리라고 생각해 포기하고 걸어서 한참을 걸어 내려오다 보니 동네 아랫쪽에 와서야 올레리본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올레리본이 보이는 그 길은 내가 올라간 반대방향이었던 것이었다.

참으로 힘들게 걸었던 날이었다.

 
 
 
 

아예 버스를 타려고 일주도로쪽으로 내려오다 보니, 토산초등학교는 아주 아래쪽인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다음 주에 오면 어차피  출발점을 다시 찾아봐야 할 길이었는데 길을 찾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는 길을 몇번이나 잘못 들어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네 인생도 가다가 잘못 길을 들었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다.

길은 잘못 들어가면 그 길에서 나와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는데, 인생은 지나온 그 길이  다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돼 버리니 되돌아 갈수도 없고 참 답답한 일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당초 3시간 정도를 걸으면 될 것으로 생각했던 길을 4시간 30분이나 걸었고 길을 잘못 들어 몸을 힘들게 함으로써 이 날은 시간과 육체를 많이 혹사했다.

더욱이 이날 오전 날씨는 제주시쪽이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하여 걱정하며 떠난 길인데 제주도의 남쪽 남원지역은 너무 더웠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몸에 땀이 흥건해질 정도로 무더웠다.

올레꾼은 2팀 정도만 만났고 해안도로나 큰 길에는 사이클을 타는 사람들이 눈에 뜨게 늘어나 있었다.

환상자전거길이 이제 동호인들의 길이 되고 있는 것인지..반갑기조차 했다.

 
 

하지만 길이 좁아 사실 자칫 잘못 되면 올레꾼과 부딪칠 염려가 많은 길이기도 하다.

어쨌는 이날 수십개의 자전거동호인들이 단체로 혹은 2-3명이 다전거를 타는 모습을 가장 많이 봤다.

그리고 더 이상 걷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정도로, 진짜 원 없이 길고 힘거운 길을 걸었던 하루였다.

오래 걸어도, 힘이 들어도 걷는 일은 늘 좋은 일이다.

걷다 보면 몸은 늘 제자리를 찾아온다.

몸이 또 계속 걷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걷는 그 시간만은  너무나 좋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에서 20번째 소개한 인물은 김옥균이다.

 

김옥균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7세때 당숙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에서 살다가 1861년 강릉부사로 부임한 양아버지를 따라 강릉으로 내려가 그곳 송담서원에서 율곡의 학풍을 공부하였다.

고종 9년인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전적을 거쳐 1874년 고종의 특지로 홍문관교리에 올랐다.

새로운 사조와 사회변동에 예민하였던 그는 유횽기, 오경석, 박규수, 이동인 등으로부터 개화사상과 신학문을 배우고 개화당을 조직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다 1861년 김옥균은 이동인의 알선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메이지유신의 진전 과정과 정치적 동향을 돌아본 다음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교리에 복직하였다.

...(중략)

김옥균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양반 제도를 폐지하고 신분에 상관없이 인재를 뽑아 쓰며,상업과 공업을 장려하고 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실시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대주의에 젖어 개화정책을 반대하는 민씨 일파와 청나라의 간섭으로 그의 개혁론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63년 김옥균은 국가재정과 신식군대 양성에 필요한 차관을 얻을 목적으로 다시 일본에 건너갔으나 실패하였다.

이때부터 개화당과 개화정책을 탄압해온 청나라와 민비, 수구파를 제거하여 나라를 개화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1884년 12월 마침내 조선군 1천여명과 일본군 150여명을 규합하여 우정국 낙성연에서 한규직 등 민비, 수구파를 제거하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의 호조참판이 되어 실질적으로 신정부를 지휘하였다.

하지만 청나라 군사의 개입과 도움을 주기로 한 일본마저 철수해 가버려 갑신정변은 사흘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은 박병효, 서광범, 서재필 등 아홉명의 개화파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와의 관계를 염려한 일본은 김옥균을 박대하여 1886년 오가사와라 섬으로 유배를 보냈고, 1888년에는 홋카이도로 추방하였다.

그 뒤 도쿄로 돌아온 김옥균은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1894년 민씨 일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가 죽자 청나라와 조선은 그를 역적으로 몰아 시신을 서울로 가져온 뒤 양화진에서 능지처참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효시하는 등 잔인한 형벌을 가했다.

그러자 평소 김옥균을 존경했던 한 일본인이 그의 시신 일부와 유품을 거두어 일본의 본원사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리고 그의 묘비명은 이렇게 표해졌다.

“비상한 시대에 비상한 인물이 비상한 재주를 갖고 태어났으나 끝내 비상한 공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김옥균은 갑오개혁으로 개화당 내각이 조직된 1895년에야 총리대신 김홍집과 법무대신 서광범의 상소로 반역죄가 사면되었으며, 1910년에는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다음은 훗날 후손에 의해 만들어진 무성영화 <김옥균전>의 노랫말 중 일부..

 

아침 꽃 저녁달에 부치는 정은

오로지 동양의 길 하나이어니

이 목숨 죽고 죽어 진토가 된들

대장부 큰 뜻이야 버릴 길 있나

....

첫 아침 맞으려는 우렁찬 소리

천추의 한 남기고 사라졌구나.

황포강 흐린 물에 낚시 잠그고

세상은 밤중인데 홀로 일어나

고국의 시절 낚는 타향살이라

세벽을 부르자니 바람만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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