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믿는 그, 필연으로 올레길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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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믿는 그, 필연으로 올레길 걷다
  • 문순자
  • 승인 2011.06.11 1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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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클레지오, 9일 도민과 함께 올레 18코스 걷기 행사 가져

 

명예제주도민이 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끌레지오가 제주도민들과 함께 올레걷기에 나섰다(출처=제주도정뉴스)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 중에서

 



작가 르 끌레지오
‘우연을 믿는다’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르 클레지오가 올레길을 찾았다. 그에게 있어 제주의 올레길은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우연히 만난 곳이 제주가 아니었다면 올레길도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주와 올레길의 만남은 필연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9일 오후 2시 도내 문화예술인들과 많은 취재진들의 참여 속에 ‘르 클레지오와 올레길을 걷다’라는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하얀 운동화에 청바지 차림의 르 클레지오는 마치 모리셔스를 걷는 것처럼 제주의 자연에 친숙한 발걸음이었다. 날씨도 적당히 흐린 것이 걷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이쯤에서 여행자가 《GEO》창간 30주년 기념 특별호(2009.3)에 발표한 제주여행기의 한 대목을 보자.

‘나는 이 해역에 처음 온 항해사들 가운데 한 명인 핸드릭 하멜(Hendrik Hamel)이 왠지 모르지만 켈파트(Quelpaert)라고 부를 이 섬에 난파하기 직전에 사로잡혔을 감정을 상상한다.

폭풍우, 바람, 거대한 파도를 밀어치는 바다, 그리고 돌풍이 잠시 개었을 때 검은 현무암 해안을 지배하는 거의 이천 미터에 달하는 화산 한라산의 모습이. 아마도 그는 선원들과 함께 지옥의 문 앞에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조금 있다 난파 후에 생존자들은 잿빛 해안을 걷는다.

그들은 수평선을 한 바퀴 돌고선 로빈손 크루소에 영감을 준 선원 셀키릭(Selkiry)처럼 무인도에 난파했다고 성급하게 결론지었을 게 분명하다.

몽환적인 그림자를 드리우고 풍파에 시달린 검은 바위들, 그리고 해안에는 그름 같은 폭풍이 걸리는 숲이라기보다는 털이라 할 식물군락, 그리고 섬에 접근할 때 맨 먼저 들리는 음악, 새들의 온화한 지저귐이 정적을 깨운다.

나는 네덜란드인들의 발자국이 검은 모래사장에 남긴 자취, 바람과 파도에 얼이 빠진 그들의 시선을 상상한다. 그러는 동안에 조금식 식물의 온기가 그들을 둘러싸고, 그들은 첫 냄새, 가까운 숲의 신선함, 용암의 유황냄새, 칸나와 야생 난초의 향기를 발견한다. 이것은 은총의 순간이다.'

핸드릭 하멜의 눈에 비친 제주의 풍경을 보듯 르 클레지오는 제주 풍경을 본다. 그 때와 지금이 차이가 있다면 파란 눈의 이방인을 처음 만난 제주인들은 낯선 눈으로 대했지만, 지금 제주사람들은 여행자를 환대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제 르 클레지오는 명예 제주도민이다.

김순이 시인의 안내로 제주 올레길 18코스 사라봉 등대 길을 걸으며, 그는 제주시의 한 귀퉁이에서 쪽빛 바다, 그리고 제주항을 한참동안 해바라기하며 그 풍광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 산지등대가 바로 보이는 이곳은 영주 10경중 사봉낙조와 산포조어를 한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드문드문 익은 산딸기, 개민들레, 산딸나무 꽃잎이 떨어져 있는 길에서 발자국마다 제주 바람이, 아름다운 풍광이 아픈 과거를 보듬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처 입은 큰 고래 울음소리 같은 무적이 금방이라도 우리의 가슴속을 헤집을 것 같았다.

여행자는 칠머리당 앞에 이르러 바람의 여신 영등할망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었다.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다는 얘기며, 제주 사람들은 영등신이 들어오면 약식으로 맞이하고 송별제는 크게 열어 헤어짐을 위로하고 풍어를 기원한다는 얘기에 깊은 관심을 보낸다. 훗날 제주 관련 작품의 소재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그런지 칠순의 여행자는 조금 피로해 보였다.

어제 강연이 끝나고 신성여중 문예반 학생 38명이 우르르 몰려들어 사인을 부탁했는데 그것을 들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단다.

그래서 학교에 연락해서 38명 전원의 명단을 전해 받고, 밤늦도록 사인을 하느라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어린 학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작가의 섬세함, 그래 천성이 시인이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데 젊게 사는 비결이 뭐냐고 묻자 ‘자연을 사랑하고, 걷는 것을 좋아하고, 소식하는 것이 비결’ 이란다.

미래에는 젊은 청년들이 제주를 세계에 더 많이 알릴 거라는 르 클레지오의 이름 뒤에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문장이 아주 독특하고, 유려한 단어를 골라 쓰는 작가, 방랑하는 작가, 침묵하는 작가 등등 아마도 그의 젊은 영혼이 그를 더 신비한 작가로 기억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또 제주에서 만날 수 있는 우연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시인 문순자>

 

(출처=제주도정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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