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명령한다...그대들 자신을 발견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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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명령한다...그대들 자신을 발견할 것을!”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9.03.0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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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남원포구-동백나무군락지..완연한 봄의 바다를 반기는 반짝임
 
 

봄이 완연한 3월의 첫날..

세상은 미세먼지 주의보까지 내린, 하늘은 가득 뿌연 날씨였지만..

제주시와 달리, 제주올레 5코스 시작점인 남원포구부터 위미리 동백나무군락지까지 가는 동안 미세먼지와의 싸움은 없었다.

이날 남원포구에 도착한 시간은 3월1일 오전 10시26분..

제주올레 5코스는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코스가 더 많은, 올레코스 중 으뜸으로 치는 코스중 하나다.

걸어가는 내내 햇볕에 반짝이는 바다가 눈길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고, 돌과 자갈이 깔린 바닷길을 걷는 묘미도 일품이다.

5코스에는 특히 제주도에서는 보기가 힘든 암맥군이 많았다.

 

곳곳에 용암이 흘러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풍광은 오직 제주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를 보는 즐거움 또한 올레 여행의 묘미다.

더욱이 자연이 주는 바다색과 어울려 올레길을 걸으며 만나는 마을마다 평화가 흐른다.

오징어를 해풍으로 말리는 그 모습도 정겹고 양식장이 없는 지점의 바다는 더욱 푸르고 더 예쁘다.

남원바닷가 큰엉은 그 중 압권..

이날 함께 올레길 걷기에 나선 고광언과 나는, 큰엉으로 가는 길에서 좁디좁아 걷기조차 힘든 바닷쪽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그래야 올레를 걷는 예의를 갖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엉 큰 바위 위에 올라 바다를 포효해보기도 하고..

가는 길에 추장의 얼굴이나 사자바위 모습도 감상한다.

 
 

이들 모두가 자연이 우리에게 준 고마운 선물이다.

이날 고광언은 드디어 5코스를 접어들게 되자 스탬프를 찍은 후 “벌써 5코스까지 걷고 있다”며 뿌듯하다고 했다.

“시작하기만 하면 모르는 사이에 21코스를 다 걷게 된다”고 했더니 “21코스는 어니냐”고 물었다.

“지미봉이 있는 종달,,땅의 끝, 그래서 지미..”라고 했더니 그는 “올레완주의 꿈을 곧 이룰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시작만 하면 끝까지 걷게 되는 올레걷기..

올레수첩을 장만하면 이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올레꾼이 되면 잘 알게 되는 일이지만..

“처음 와 보는 곳아 많아 놀라게 된다”는 그는 “이렇게 걸으면서 제주도를 다시 알게 되어 너무 좋다”고 했다.

제주에 살면서도 우리는 제주를 너무나 모른다.

왜 환경이 지켜져야 하는지..

왜 제주환경을 지키는 일이 중요한지..

올레를 걷다보면 그런 제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로 생기기에..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올레를 걸어보기를 늘 권장한다,

그래야 제주가 보이고 실체적인 환경문제가 보이기 때문이다.

 
 

전에는 없었던 건물이 지역마다 쑥쑥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보면 놀라웁기도 하지만 이렇게 개발에 치중하다 보면 제주환경이 남아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경관이 좋은 지역에는 늘 그런 커다란 건물부터 들어선다.

그러면서 제주의 아름다움을 하나씩 둘씩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제주바다처럼 아름다운 바다는 다른 지방에서는 만날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보기에만 좋은 바다나 다름없다..

걷다보니 밝은이 홍병두 본지 객원기자가 만들고 있는 탐모라질 리본이 이곳저곳에서 마구 나부끼고 있었다.

어떤 곳에는 올레리본과 함께 날리고 있어 반가웠다.

해안도로만을 걷는,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는 바다올레길이다.

 
 
 

그렇게 새로 만들어지는 바다올레길도, 그렇게 걷는 바닷 속에도 생물이, 생명체가 더 많아지기를 고대한다.

이날도 큰엉 언덕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가득 했다.

하지만 걱정은 이렇게 개발 개발하다가, 어느날 사라진 제주환경에 실망해 이곳 마저도 사람이 찾아오지 않게 된다면..

더우기 앞으로 진행될 지도 모를 제2공항과 이에 더한 도로건설 등 가는 곳마다 공사판으로 변한 제주를 보면서 사람들이 분노까지 느끼게 된다면(?)..

제주는 아마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는 곳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이렇게 개발, 또 개발만을 외치게 된다면..

결국 제주도에 남아 있을 곳은 한라산과 제주바다 정도가 아닐까..하는 걱정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걱정이 올레를 계속 걸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매해 변해가는 그 과정을 눈과 사진으로 담아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겨둬야 한다.

지금은 일단 많은 사람들이 올레길을 많이 계속 걸어봐야 하기에..

기자는 될 수 있으면 아름다운 것만 남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올레를 걸어 보면 그런 제주도의, 또는 제주환경에 대한 문제가 바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5코스의 중간스탬프 포스트가 위치한  위미리 동백나무군락지는,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왼쪽에 보이는 제주수산연구소 옆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아주 가까운 곳에서 불쑥 나타난다.

군락지 입구에 들어서니 떨어진 동백꽃잎까지 참 예뻤다.

 

이런 곳에 동백나무군락지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동백나무군락지는 현병춘 할머니가 해초캐기와 품팔이 등 근면 검소한 생활로 어렵게 모은 돈 35냥으로 이곳 황무지(속칭 버둑)을 사들인 후 모진 바람을 막기 위해 한라산의 동백씨앗을 따다가 이곳에 뿌린 것이 오늘날 기름진 땅과 울창한 숲을 이룬 것“이라는 설명이 도지정기념물39호라는 표지에 쓰여 있었다.

이곳에 도착해 스탬프를 찍고 보니 12시16분..걸은 시간은 2시간 남짓..너무 짧은 것 같기도 했고..

고광언은 “현재까지 만보도 못 걸었고, 8천보 정도밖에 안된다”고 했다.

우리는 잠시 쉬다가 한 시간쯤 더 걷기로 했다.

위미항에서 점심을 하기로 하고 계속 걸어가니 한 시간 후쯤 위미항이 보이는 곳에 다달았다.

 

처음 만난 경관은 조배머들코지..

'원래 이곳에는 70척이 넘는 기암괴석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형상이 비룡형(飛龍型) 또는 문필봉형(文筆峰型·책을 받아 앉아서 공부하는 상)과 비슷하다고 해 마을 사람들의 신앙적 성소가 돼 왔다'는 설명이 비에 적혀 있었다..

이곳을 돌아 작은 쉼터에 앉았다가 가다보니 화장실 문이 잠겨 있다.

올레꾼을 위한 화장실인 듯 한데..화장실문을 왜 닫아놓는지 위로 올라가니 화장실 표시는 해놓고 문은 잠가 놓았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화장실은 어디에 있건 문이 항상 개방돼 있어야 한다.

만약 관리하기가 싫어 문을 닫아놓았다면 차라리 없애버리는 게 낫다.

‘보여 주기식 생색내기는 제발 이제 그만 하자’다..

위미항에 도착해서는 가끔 갔던 식당에서 시원한 물회를 먹고 싶었지만..

식당을 찾아 물회를 먹으려니, 예약관계로 물회는 없다고 해서 아나고탕을 시켰지만 생각보다 맛은 없었다.

대신 우리는 다음 올레코스는 약 4km 정도 남은 5코스 구간을 걷고 6코스 중간지점까지는 걸을 수 있는, 하루의 여유를 얻게 됐다.

하프코스를 걷는 중이지만, 거리가 짧은 곳은 조금 더 걸으면 하루 이틀은 걷는 시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은 정말 따뜻한 봄처럼 햇살이 따뜻했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다음으로 소개한 인물은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미 13세 때에 ‘자전’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나아갈 길을 정했다.

“인생의 생애는 하나의 거울, 그 속에서 자신을 끝까지 지켜본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첫째의 일, 나는 애써 그 일을 하리라.“

니체는 1844년 10월5일 독일 라이프치히 근교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에서 어머니의 보살핌 아래 자라났다. 그는 처음에는 본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다가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긴 후에는 문헌학을 연구하는 한편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 심취하기도 했다.

1869년 니체는 스승의 소개로 24살의 젊은 나이에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가 되어 그곳에서 고전문헌학을 강의하다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종군하였으나 병 때문에 귀환하여 다시 강의와 연구에 몰두하였다.

1872년 그는 처녀작 ‘비극의 탄생’에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룬 후, 이를 기점으로 ‘반시대적 고찰’에서는 당대 유럽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문화의 이상으로 설정했다.

이 사상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한층 분명해졌는데,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이라 하여 새로운 이상의 가치 전환을 시도하였다.

새로운 가치 모색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생전에 그 업적을 인정받지 못한 철학자이다. 그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전통적인 이상철학에 대립하여 의지철학을 정립하고 삶 자체를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은 철학자로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20세기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인정되어 ’현대 실존철학의 선구자‘로 존경받게 되었다.

니체가 죽은 1900년을 현대 철학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독일의 시인이자 수필가인 고트프리드 벤이 다음과 같이 말 한 데에서 유래한다.

“현대인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문제는 이미 니체에 의해서 모든 검토를 끝냈다”

니체는 항상 병고에 시달렸다. 이미 10대 때부터 시작된 두통과 발작인 죽을 때까지 되풀이 되었고, 각혈을 동반한 위경련, 우울증, 뇌매독 등에 시달리기도 했다. 게다가 1865년 부터는 조기 매독성 골수막염까지 앓게 되었다. 강단에 설 기력조차 없어 학교를 사직한 후에는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에 머물면서 요양과 연구를 병행했다.

그는 병고 때문에 허무와 고뇌의 심연 속에 있으면서도 생의 비약과 환희, 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고통을 껴안고 운명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면서 초인적 노력을 경주하여 독창적인 저서들을 계속 발표하였다.

‘여명’, ‘환희의 지식’. 선악의 피안‘. 도덕의 계보학’ 등을 통해 그는 기독교와 이상주의 도덕을 배격하고, 초인과 영원회귀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일종의 형이상학을 정립하였다.

그러나 그가 각각 10여일 만에 완성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2.3부는 1년동안 겨우 60부만 팔렸을 뿐, 4부는 그나마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자비로 출판해야했다.

1890년 니체는 토리노 거리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졌다.(중략)..

그는 알수 없는 소리를 마구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을 붙잡고 ‘내가 신이다. 이렇게 변장하고 온 것이다’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평생을 불우하게 보낸 니체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중략)..

‘신은 죽었다’고 외친 36세의 철학자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들었고..(중략)..

생전에 ‘정직한 이교도로서 무덤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한 그는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에는 친구들의 고별사가 몇 마디 있었을 뿐, 목사의 기도는 허용되지 않았다. 다만 저서에서 인용된 다음과 같은 말이 그의 묘비명으로 표해졌다.

“이제 나는 명령한다. 차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발견할 것을!”

(중략)..

이쯤에서 우리는 거미줄 짜기의 속도를 늦추고 100년전의 철학자 니체가 고민하고 또 그가 묘비명에서 명령한 것, ‘우리들 자신을 발견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진지하고 사려깊은 시도를 해야 할 것이다. 존재는 신의 몫이지만 철학과 성찰은 인간의 몫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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