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와 불명예가 우리들 곁에 머무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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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와 불명예가 우리들 곁에 머무는 한.."
  • 고현준
  • 승인 2019.04.23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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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올레6코스, 정방폭포에서 올레여행자 쉼터..자연과 예술을 전하는 담론의 길

 

 

아마 가장 짧은 시간을 걸었을 올레길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선물 같은 길을 걷는 그런 여정이기도 했다.

한 달간 겨우 6코스의 반을 걷고..

지난 20일(토요일)은 오랜만에 홀로 6코스의 조금 남은 구간 올레길 걷기에 나섰다.

 

찬찬히 정방폭포에서 서귀포 시내로 들어서는 이 길은 문화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감동의 길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만난 곳은 정방폭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정방폭포에 들어서서, 많은 관광객들이 가득 몰려있는 그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몰입했다.

차마(?) 폭포 아래쪽으로 내려가지는 못하고 계단에 서서 사진만 찍었지만...

정방폭포는 그냥 그대로, 예술이라는 말 외에 다른 표현을 덧붙일 수 없었다.

인간이 만든 예술이 아닌..

자연이 우리에게 준 큰 상이라고나 할까..

어느 쪽을 바라봐도 정방폭포는 아름다움 그 자체로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 걸 아마 사람들은 비경이라고 부를 지도 모른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에 대해..

 

정방폭포는 폭포수가 수직 절벽에서 곧바로 바다로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폭포이다.

그 규모는 높이23m, 너비 10여m이다.

영주10경의 하나인 정방폭포는 여름철 서귀포 바다에서 배를 타고 바라보는 폭포수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정방하폭’(正房下瀑)이라 불렀다.

폭포의 수원은 ‘정모시’라는 못이며, 폭포수가 떨어지는 못에서 북과 장구를 두드리면 거북이들이 물 위로 올라와 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다고 전한다.

진나라 시황제의 서자 서불이 한라산의 불로장생초를 구하러 왔다가 정방폭포를 지나며 ‘서불과지’라 새겨놓고 서쪽으로 떠났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정방폭포는 이처럼, 과연 비경이다.

이 비경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오니 바로 서복전시관 입구가 나타났다.

서복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한라산)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서복전시관을 지나는 길가의 꽃들이 참 예뻤다.

 

 

 

이어 길거리에 나타난 형형색색 돌맹이들..

어디서 이런 돌을 구했을까..

누군가의 이름과 함께 작은 소망을 담아 돌에 글을 쓰고 이를 한 가득 손 위에 올려놓은 작품이 나타났다.

작품 제목도 그래서 그런지 ‘드림‘이었다.

서귀포가 주는 문화적 특이함은 이같은 벽이나 담에 그려진 그림으로도 잘 나타난다.

대작 하나가 턱 하고, 벽에 담겨져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런 길을 따라 가다 소암 현중화 선생 기념관을 만나 그 안으로 들어섰다.

소암 선생이 기거했다는 조범산방에는 많은 작품들과 기념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연하장에서부터 편지나 남농 선생의 그림 등 다양한 유물들이 이곳에 전시돼 있어 눈 여겨 보았다.

학생시절의 수암선생 성적표까지 전시된 이곳에 서 보니 서귀포 앞바다가 바로 눈 앞에 펼쳐진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지금은 그동안 높이 솟아오른 건물 들 때문에 앞이 꽉 막혀버렸지만..

아마 소암 선생이 살 때만 해도 이 집은 서귀포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곳일 듯 했다.

 

 

마침 고 청원 변성근 기증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올라가 보니..

이곳은 소암 선생이 작업하던 작업실과 곧 바로 연결됐다.

그리고..넓은 작업실에는 소암 선생이 글씨를 쓰고 있는 실제 모습이 소암선생이 기거하던 방에 함께 전시돼 있었다.

마치 살아계신 듯 그 모습 그대로의 모습으로..그렇게 그곳에 앉아 계셨다.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보니..

마치 지금도 그곳에 살아 있는 듯 했다.

 

 

이곳 기념관을 나와 시내를 관통하며 서귀진지를 지나고..

그곳 길거리에 전시되고 있는 옛날 서귀포시의 사진과도 만났다.

걷다보니 ‘함박눈 태왁’(강문신)이라는 구조물에 친구인 석산 강창화 글이라는 작품도 눈에 띄었고...

 

 

 

이어진 길은 이중섭 거리..

이중섭미술관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붐비고 있었다.

초가집도 그예전 대로 남아있긴 하지만..

좁기 만한 방안에 작은 흑백사진 하나가 이중섭이 이곳에 살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중섭거주지라는 이름과 함께..

화가 이중섭은 이곳에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곳을 나와 이중섭거리로 들어서니 서귀포극장에서는 아이들의 작품만들기 수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처럼 이중섭거리는 여전히 문화의 거리를 표방하며 변화를 모색하는 중이다.

이곳에 서면 뭔가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중섭거리를 다 올라 나오니 유명한 서귀포 올레시장이 앞에 나타났다.

시장 안으로는 갈 일이 없으니..종점을 향해 계속 걸었다.

드디어 조금 걸어가니 곧 바로 오늘의 종착지인 제주올레 여행자쉼터에 도착하고 말았다.

겨우 1시간 조금 넘게 걸은 정도였다.

이 정도 걷고 올레를 걸었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아주 짧은 거리였다.

그래도 올레를 걷기는 한 것이니..

이날은 아마 올레를 걷는 동안 가장 짧은 시간만 걸었던 단순한 올레길이 되고 말았다.

 

 

도착하자마자 올레 여행자 쉼터에 앉아 친구 김제국에게 전화를 했다.

김제국은 “맛있는 김치찌개를 먹으러 가자”며 곧 나타났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무항생제 흑돼지만을 취급한다는 신시가지 한가네 흑돼지에서 정말 맛있는 김치찌개 맛을 볼 수 있었던 일이었다.

우린 둘 다 공기밥을 2개씩이나 먹을 정도로 특별한 음식을 맛보았던 것이다.

정방폭포에서 시작된 여정은 이렇게 흑돼지 김치찌개로 마무리 되었지만..

올레6코스는 자연과 서귀포시의 문화가 잘 어우러진, 기억에 남을 만큼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참 많은 길이었다.

자연이 있고, 문화가 있고, 역사가 함께 하는 서귀포시를, 이 길은 우리에게 여러 담론을 선사하고 있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다음으로 소개한 인물은 미켈란젤로(1475-1654)이다.

 

1542년 시스틴대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이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 교황 바오로3세는 벽화에 나체상이 너무 많이 그려져 있다고 하여 그것을 수정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마무리 작업을 진행중이던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다.

“교황은 그림을 수정하기보다는 세상을 수정하는 일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으로 불리는 미켈란젤로는 그 때까지만 해도 직공 정도로 취급받던 화가와 조각가의 위상을 예술가의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그는 상당한 배짱과 고집이 있던 사람으로, 당시의 물주인 교회에서 일을 받을 때도 언제나 대등하게 대했다.

미켈란젤로의 대부분의 작품은 미술품이라기보다 기념물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4년여에 걸쳐 완성한 시스틴성당 천정화는 구약성서의 ‘천지창조’ 외에 343명의 인물을 배치시켜 그린 장대한 그림이다.

조각을 해도 그 규모가 등신대 이상의 것이어서 때로는 3m 이상 되는 조각들이 무리를 이루는 구상도 많았다.

메디치예배당의 묘비는 1524년부터 10년간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수십개의 거상을 조합한 건축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는 40개 이상의 거상으로 조합한 최대 규모의 구상이었는데, 이 구상은 율리우스 2세의 사망과 정치 불안으로 여러 차례 중단을 거듭하다 결국 미완성인 채 끝났다.

이렇듯 미켈란젤로가 그의 예술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한 것은 조화가 아니라 운동과 율동, 즉 힘이었다.

(중략)..미켈란젤로가 좋아했던 사람들 중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1564년 2월15일 밖에는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벌떡 일어나 마치 망령처럼 쏟아지는 빗속으로 걸어나갔다. 한참 걷다가 옛 친구를 만나자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을 때가 된 것 같네. 왜냐하면 이제야말로 예술 속에서 태초의 울림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지!”

그로부터 사흘 뒤인 1564년 2월18일, 그는 32년 동안이나 우정과 사랑을 지속해 온 화가 카발리에르의 팔에 안겨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영혼은 신에게, 육체는 대지로 보내고 죽어서나마 그리운 피렌체로 돌아가고 싶네.”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피렌체의 산타크로체성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그의 시가 기념비로 남아 묘지를 찾는 사람들에게 숙연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수치와 불명예가 우리들 곁에 머무는 한

돌 같은 내 삶에 있어서 잠이 유일한 안식처라오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 것도 듣지 않는 것만이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이라오

그러니 제발 깨우지 말아다오

목소리를 낮춰다오

그리고 제발 조용히 떠나다오

 

(중략)..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자신의 삶에 수치와 불명예가 있음을 자인하고, 세상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며 목소리를 낮춰달라고 주문했다.

인간이 무엇인가 성취하기 위해 매진할 때는 그것에 몰입하여 꿈을 꾸지만, 일단 성취하고 나면 열정을 쏟은 만큼 허탈감을 느낀다.

특히 예술가들은 더욱 그러하고, 예술가가 아닐지라도 누구나 죽음에 직면해서는 온 힘을 다해 추구했던 돈이나 명예, 권력도 한낱 부질없는 것임을 느낀다. 이것이 어쩌면 인간이 인성에 신성을 개입시키려는 원초적 단초일지도 모른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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