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음악 앞에서는 다만, 사이비처럼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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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음악 앞에서는 다만, 사이비처럼 보일 뿐이다”
  • 고현준
  • 승인 2019.04.2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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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제주올레여행자센터-제남아동센터, 푸르름이 더해진 싱그러운 작은 마을 올레길

 

나이 든 인생이 비움 공부를 하는 것이라면 올레를 걷는 마음은 일종의 도전 공부다.

시간도 필요하고, 인내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지구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까지 걷겠다는 각오와 다짐 없이는 이 길에 나서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여전히..언젠가는 걸어야지 하며 망설이는 동안에 시간은 자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올레길에 들어서면 그동안 보아왔던 제주와는 다른 고향이 보일 것이기에 누구나 올레길에 한번 서 있어 보기를 권면한다.

 

제주올레여행자쉼터는 올레 6코스 종점이라 7코스가 시작되는 구간일 것이었다.

무심코 올레 리본이 보이는 곳으로 올라가다 보니 7-1코스의 거꾸로 오는 코스와 만나버렸다.

계획으로는 7코스를 걷는 것이었지만 부득이 7-1코스를 거꾸로 걷는 여정으로 바뀌고 말았다.

올레야 어쨌건 가야하는 길이니 27일(토요일) 날씨조차 맑아 바다를 따라 걷고 싶었지만 서귀포시내 안쪽 작은 골목길들을 걷는 것으로 하프코스 걷기를 마쳤다.

7-1코스의 하프길은 올레여행자쉼터에서 제남아동센터까지 걷는 구간이다.

이날 걷고 싶었던 푸른 서귀포 앞바다는 가까이 하지 못했지만 구름과 함께 빛나는 한라산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다시 하논분화구를 관통하는 길을 걸었다.

 

 

이날은 세 번째로 하논분화구를 찾은 것이다.

 

하논분화구는 동양 최대의 마르형 분화구로 수만년 동안의 생물기록이 고스란히 담긴 ‘살아있는 생태박물관’이다. 분화구에서 용천수가 솟아 제주에서는 드물게 논농사를 짓는다. 하논은 큰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논은 전세계에서도 드물게 만날 수 있는 마르형 분화구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곳이다.

이곳을 연구하면 고생대부터 현재까지의 제주도 역사가 그대로 나타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있어 그만큼 관심 또한 높은 지역이다.

하지만 이 하논분화구를 습지로 지정하는 용역에 대해 마을주민들은 습지로 지정되면 각종 인허가상의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습지 지정을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용역은 내년 3월이나 돼야 습지로 지정할 것인 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하니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논분화구는 여전히 제주도의 중요한 세계적 자연유산임에 틀림없다.

이곳은 습지전문가들의 노력으로 현재 논농사가 시작되면 미리 예약을 한 도민들에게 가을에 추수를 마친 후 쌀을 나눠주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기자는 아직 참여해 보지 못했지만..드문 경우라 제주에서 생산되는 쌀밥을 먹어보기 위해 올해부터는 꼭 참여할 생각을 한다.

 

 

 

특히 이곳 하논마을은 또 4.3때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있는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하논분화구를 다 나오니 봉림사 앞 길옆에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다음은 이곳에 세워진 잃어버린 마을 표지석에 적힌 내용이다.

 

4,3당시 서귀면 호근리에 속한 하논마을은 160여호 100여명의 주민들이 농사와 축산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던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1948년 11월19일 무장대의 습격으로 주민 1명이 사망하자 소개령이 내려진 이후 경찰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소각되어 오랜 설촌의 역사를 지닌 하논마을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 비극의 와중에 살아남은 주민들은 인근의 남성리, 호근리, 서귀리 등지에 소개되어 생활해 오다가 소개된 마을에 그대로 눌러앉으므로 인해 하논마을은 재건될 수 없었으며 1960년대 이후에는 대부분의 토지가 감귤 과수원으로 변해버림으로써 하논 마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주민들은 소개지에서 생활하면서도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현재 하논마을 옛터에는 4.3사건으로 전소되었던 봉림사가 복원되어 있으며 주민들의 삶의 흔적인 올레와 대나무숲,팽나무 등과 서귀포지역 천주교 선교의 산실이었던 하논성당의 옛터가 남아있어 4.3사건으로 사라져버린 마을의 비극을 묵묵히 전하고 있다.

 

 

하논을 지나 밖으로 나오는 길에 우뚝 서 있는 봉림사..

길도 아름답지만..그런 아픈 역사까지 숨겨져 있는 곳이라 다시 보니..푸른 하늘과 함께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 봉림사를 지나는 동산으로 오르는 길은 새로 길을 내면서 땅을 파내서인지..곳곳에 나무뿌리가 밖으로 삐져나온 곳이 많은 곳이다.

나무들도 치열하게 서로가 차지할 영토전쟁을 하는 듯 길고 깊게 뿌리들이 밖으로 나와있는 모습이었다.

이곳 동산을 다 올라 아래를 보니 하늘 아래(?) 하논과 함께 위로는 멀리 섭섬이 보였다.

다시 걷는 올레길은 길옆 돌담 넘어 감귤꽃이 곧 꽃망을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고 ..그 감귤나무 넘어 한라산이 장엄하게 서 있다.

 

 

 

그 옛날 부를 구가하던 서귀포지역의 그 모습 그대로다.

이날 작은 동네를 지나며 길을 걷다가 나무등걸 옆에 놓여있는 작은 의자가 있어 앉아 쉬면서 보니..

단풍나무에 꽃이 핀 모습이 포착됐다.

단풍나무에 꽃이라니..

사진을 찍고보니 영롱한 빨간색 꽃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하기야 나무도 꽃도 번식을 하려면 꽃을 피워야 하는 법이다.

싱그러운 푸르름이 더해져 가는 작은 올레길..

이날 하프코스의 마지막 구간인 동산길을 오르는 동안 이날만은 가까이 가지 못해 못내 아쉬웠던 서귀포 앞바다가 멀리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의 목표구간인 제남아동센터..

약 2시간 정도 걸었나 보다.

7-1코스는 아기자기한 작은 동네 올레길이 압권이다.

바다도 좋지만 사람냄새가 많이 나는 이런 길도 너무 좋다,

길거리에는 야생딸기나 하나 둘씩 익어가고, 나무는 더욱 푸르러져 가는 늦은 봄날..

여름이 곧 닥쳐올 것만 같은 올레길은 여전히 이곳을 찾는 올레꾼을 반겼다.

출발지로 돌아가기 위해 콜택시를 부르고 차에 타자 울려 퍼진 장윤정의 노래..

기사는 장윤정을 너무나 좋아하는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운전을 했다.

제목도 모르고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기사와 함께 그 노래를 들으며 즐겁게 출발지에 도착했다.

올레를 걷는 날은 모든 일이 즐겁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8천km에 달하는 실크로드를 홀로 걸었던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라는 책에는 사진이 없다.

책 서문에 이러한 설명이 붙어있다.

“우리는 저자와 약속한 대로 어떠한 사진도 싣지 않았다. 오직 길만이 중요할 뿐이며,길을 걸어갔던-혹은 그러기를 꿈꾸었던-사람들은 길이란 게 걷는 사람의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가 세계에-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부여하는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시선이 물질화된 것임을 알고 있다. 이를 인식하는 데에는 말만으로도 충분하다”

기자가 걷는 ‘나도 걷는다’의 올레길을 걷는 글에는 사진이 많다.

제주올레를 인식하기에는 설명이나 말 만으로는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다음으로 소개한 인물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36-1791)이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모차르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모차르트를 올바로 판단할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그의 음악을 듣는 것뿐이다. 그의 음악 앞에서 다른 작곡가는 다만 센티멘털하고 히스테리컬한 사이비처럼 보일 뿐이다”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등 훌륭한 오페라를 남기고 요절한 오스트리아의 천재음악가 모차르트의 죽음에 관해서는 구구한 억측들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위대한 작곡가가 살해된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 범인은 당시 모차르트의 최대 라이벌인 안토니오 살리에라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그러나 오늘날까지 확실한 증거는 없다.

35년이라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총 1천여 곡에 이르는 모차르트의 음악은 고귀한 기품, 단정한 스타일, 아름다운 색채, 유려한 리듬, 맑은 하모니 등으로 인해 궁정 음악의 진수라 불리어지고 있다.

신동 모차르트는 이미 5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6세 때에는 궁정의 대중 앞에서 연주를 했는데 즉석에서 악보를 거침없이 읽고 곡을 만들었으며, 한번 들은 곡은 그대로 기억하여 연주를 하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임으로써 왕실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중략)..모차르트는 경제적 고통이 가장 극심했던 때인 1788년에 오히려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세 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Eb장조와 G장조, 그리고 ‘쥬피터’라 불리는 'C장조‘가 그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모차르트의 음악에만 귀를 기울였을 뿐, 그의 운명에는 무관심했다. 왜냐하면 그가 빈털터리로 죽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중략)..죽기 몇 달 전 모차르트는 몇 푼의 돈 때문에 어떤 사람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혼곡을 쓰기로 했다. 이때 그는 신경쇠약과 환각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죽음과 싸우기라도 하듯 하루 14시간씩 진혼곡 ‘레퀴엠’에 매달렸다. 작곡이 잘 되지 않자 그는 그해 11월21일 비엔나에 있는 레스토랑 ‘은뱀’을 찾았다. 예약이 안된 상태여서 그는 구석진 자리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중략)..레스토랑 주인은 지나가는 말로 그를 위로했다.

“아주 아픈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정말 아팠고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중략)

다음날 걱정이 된 레스토랑 주인이 모차르트의 집을 방문했다.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으며,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상태가 아니었다. 아내 콘스탄체가 의사를 부르려고 하자 그는 마지막 작품 ‘레퀴엠’을 끝맺지 못함을 애석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의사보다도 죽음과 만나야 할 것 같소.”

(중략).모차르트는 죽기 직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그것도 남의 이름으로 발표될 진혼곡 ‘레퀴엠’에 왜 그토록 몰두했는지 그것은 지금까지도 의문이다. 더구나 이 곡은 마치 죽음을 거부하는 듯 격렬한 음조로 전개되어 저항과 숭고함이 교차하다가 서서히 어쩔 수 없는 마력에 이끌려 죽음을 인정하는 장엄한 선율로 바뀐다.

생전에도 그랬지만 사후에도 모차르트는 불우했다. 극히 소수의 친지들만이 그의 영구차를 전송했다. 그리고 그날 따라 심하게 몰아닥친 폭풍과 눈보라는 그의 육신마저도 제대로 땅 속에 묻히지 못하게 했다. 직업적인 장의사는 강추위 때문에 공동묘지 한쪽에 그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서둘러 매장해 버렸다.

그러다 내버려지듯 묻힌 지 17년이 지난 후 그의 시체를 찾으려는 어떤 시도가 있었으나, 그의 무덤은 다른 시체를 묻기 위해 이미 7년 전에 파헤쳐진 상태였다. 때문에 오늘날 빈의 성마르크스 묘지에 자리잡은 그의 묘는 유골이 들어있지 않은 가묘에 불과하다. 가묘이긴 하지만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우리는 묘비명이 아닌 음악으로 위대한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기억한다”

(중략)..모차르트의 인생은 짧게 불타면서 그것이 음악이라는 아름다운 연기로 피어오른 것과 같다.(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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