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슨 사연으로 암흑의 세계에서 햇볕도 외면한 채 숨어 자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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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슨 사연으로 암흑의 세계에서 햇볕도 외면한 채 숨어 자랄까?"
  • 박대문(우리꽃 자생지 탐사 사진가)
  • 승인 2019.10.24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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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문의 야생초이야기]등산로 쉼터에서 만난 대흥란

등산로 쉼터에서 만난 대흥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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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란 (난초과), Cymbidium macrorrhizum

 

 

서해안 남단 신안군은 수많은 섬이 있어 다양한 희귀식물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육지와 떨어진 섬이라서 아무래도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변했습니다. 최근 신안군의 관광객이 천사대교를 개통한 이후 급속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년보다 관광객 수 20배 달성이 눈앞이라 합니다. 지금 신안군은 관광객의 편익과 수요를 맞추기 위한 환경개선과 도로 등 인프라 시설 확충이 한창입니다. 섬 안의 도로 확충과 섬 둘레길 신설 공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주로 경운기나 트랙터가 이용했던 농로에서 버스가 교행을 하자니 길이 좁아 아슬아슬한 곳이 많습니다.

도로와 숙박시설 등 인프라 확충이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걱정도 따릅니다. 지나친 개발이 섬의 자연경관과 식물상을 비롯한 환경을 해치면 어떡하나? 그렇다 해서 지역주민과 토지 소유자에게 일방적으로 자연 보전을 이유로 개발 억제를 강요할 수도 없습니다. 자연 보전에 관한 정당한 대가나 보상을 시장과 수혜자로부터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개발과 환경 보전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곳곳에서 진행되는 건설 현장을 보며 신안군 팔금도의 산을 올랐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기에 치고는 제법 많은 귀한 식물들을 만났습니다. 육지에서 보지 못한 여러 종의 희귀한 식물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걱정도 함께 해야 하는 식물탐사였습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성주풀 등 여러 종을 만났지만, 그 중 특별히 마음에 남는 꽃이 있으니 사람 왕래가 잦은 등산로 쉼터에서 만난 대흥란입니다.


풋풋한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산을 오르자 탁 트인 신안 앞바다가 펼쳐졌습니다. 유명하지도 않은 낮은 산인데도 등산로는 사람 발길이 많아 서울 근교 산길만큼이나 반지르르하였습니다. 길옆에는 층꽃나무, 개쑥부쟁이, 취나물, 수원잔대, 당잔대 꽃이 만발했고 물매화가 하나둘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정상 근처의 쉼터에서 뜻밖에도 귀하디 귀한 꽃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멸종 위기종 2급으로 지정하여 관리하는 대흥란이었습니다. 그 귀한 꽃이 쉼터의 공터에서 꽃대를 내밀었습니다. 꽃이 지고 결실 중인 꽃대 옆에 다른 하나는 네 송이의 꽃이 달려 있었습니다. 어찌 용하게도 등산객 발밑에 밟히지 않고 견디어 냈을까 할 정도로 위태로운 곳이었습니다.

대흥란은 주로 그늘진 부엽토에서 자라는데 잎이 없습니다. 연중 내내 땅속에서 은밀하게 성숙하다가 개화기가 되면 유령처럼 불쑥 꽃대인 줄기를 올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나서 사라지는 난초입니다.

그 무슨 사연으로 암흑의 세계에서 햇볕도 외면한 채 숨어 자랄까? 그리하다가 끝내는 다 삭히지 못한 그리움을 지울 수 없는 절통의 몸부림인 양 화산의 분출처럼 햇볕 세상에 불쑥 내밀까? 유령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나약한 연녹색 꽃대와 순백의 꽃잎에 붉은 마음을 새긴 듯 홍자색을 띤 난초꽃을 피울까? 갓 솟은 여린 꽃대에 버거운 꽃을 피워내 태양을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한 맺힌 간절한 염원을 빌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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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도 없는 줄기이며 꽃대에 핀 대흥란꽃

 

   

대흥란은 두륜산 대흥사 근처에서 처음 발견되어서 얻은 이름입니다. 상록의 잎 넓은 숲속 그늘에서 자랍니다. 비옥한 부엽토에서 분해 중인 생물체 유기물, 즉 고사체(枯死體)에 의존하면서 생육하는 난초과의 부생(腐生)식물입니다.

살아있는 숙주에 의존하는 기생식물과 다릅니다. 그러나 잎 없는 줄기와 열매가 녹색인 것을 보면 미약하나마 줄기에서 최소한의 광합성을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생육지는 해발이 별로 높지 않은 어두운 곳을 좋아하며 습도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연녹색의 줄기이자 꽃대인 마디마다 짙은 갈색 또는 붉은색이 감돌고 꽃은 백색으로 홍자색을 띤 2~6개의 꽃이 성글게 달립니다. 줄기와도 같은 꽃대는 백색 육질의 근경 끝에서 나서 곧추섭니다. 남부 및 중부 해안지방 상록 광엽수 숲속에 자라며 알려진 자생지가 10여 곳에 불과한 희귀종입니다. 멸종 위기에 놓여 있어 보호 및 관리가 절실하게 필요한 대흥란입니다.

어두운 땅속에서 썩은 생물을 양분 삼아 고사체(枯死體)의 간절한 한과 부활의 염원을 담은 듯 잎도 없이 불쑥 유령처럼 줄기와 같은 꽃대를 밀어 올립니다. 푯대처럼 내 세운 꽃대에 소심란(素心蘭)과 같은 모양의 산뜻하고 조촐한 꽃을 피우고 씨앗을 퍼뜨리며 나름의 비밀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꽃입니다.

 

대흥란(大興蘭)

한여름이 저물어 가는 어둑한 숲속
영혼의 세계를 떠돌다 떠돌다
끝내는 지울 수 없는 사연 있어
화산처럼 불쑥 피워낸 단심(丹心).


가녀린 몸매, 나약한 물성(物性)
그 어디에 감춰둔 염원 있어
불쑥 대지를 뚫고 고개 쳐들어
찬연(粲然)히 꽃 이파리 펼치는가.

뉘라서 알까?
없는 듯, 나약한 듯
감추고 숨겨 온 절절한 마음.
못 다 삭힌 그리움 있어
푯대처럼 꽃대 올렸음을.


(2019. 10. 13 천사의 섬에서)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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