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을 걷는 사람 그대는 살펴보라..가야 할 젠 가고 그쳐야 할 젠 멈춰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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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을 걷는 사람 그대는 살펴보라..가야 할 젠 가고 그쳐야 할 젠 멈춰야지"
  • 고현준
  • 승인 2019.11.17 22: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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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올레14코스, 저지마을-월령 선인장마을은 모든 길 다 걷는 '다양성의 길'

 

압록강을 건너 용만성을 돌아보다(渡鴨綠江回望龍灣城)

 

손바닥만 한 외로운 성에 빗발이 어지럽고

갈대 억새 아득아득 변방 해는 어둑어둑

먼 길 나선 말 울음 쌍나팔에 어울리고

고향 산은 점점 희미하게 만겹 구름에 감싸였네

 

용만이라 군리들은 모래톱에서 돌아가고

압록강에서 새와 물고기도 물 사이에서 나눠지네

고국 소식 담은 편지 예서부터 끊어지니

가없는 저 벌판으로 고개 돌려 어이 들리

 

[출처] 燕巖을 다시 읽다 |작성자 구 글(블로그)

 

조선 시대 선비들이 맡은 관직도 주로 자신들의 학문과 신념을 펴는 직책이 많았다. 홍문관, 예문관,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 학문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거나 언로를 맡아 임금에게 간언하는 직책이었다.

관직에 오르면 위로는 임금을 섬겨야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선비는 임금에게 무조건 복종과 충성을 하지는 않았다.

선비는 임금과 의리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언제나 그 직책의 성격과 임금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여야 했다.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뢰어 바로잡으려 하고, 직책이 도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비는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서기를 쉽게 생각하는 태도를 가져야 했다. 그것은 부귀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불의에 대한 비판 정신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선비로서 평생 과거시험을 보지 않거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경우를 흔히 ‘처사(處士)’라고 하였다. 처사가 관직에 나간 선비보다 많은 존경을 받았다.

학문에 조예가 깊어 후생을 많이 가르치고 바른 도리를 제시하는 사람을 ‘선생(先生)’이라고 불렀다. 선생은 벼슬에 나간 사람의 호칭인 ‘공(公)’에 비해 훨씬 높은 존중을 받았다.

선비에겐 지향하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한 시대에 나가서 도를 시행하고, 또 하나는 후세에 말씀을 내려주어 가르침을 베푸는 일이다. 즉 자신의 학문을 제자들을 통해 전하기도 하지만 직접 저술을 하여 후세에 가르침을 내려주는 것이다.

이렇게 선비의 일생은 도를 밝히고 자신을 연마하여 세상을 바로잡고자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위키백과]

 

 

위에 있는 한시는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쓰기전 중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쓴 시로 알려져 있다.

사실 조선시대의 이름난 선비들은 거의 모두가 청백리였다.

어떤 선비는 높은 벼슬까지 했지만 죽어서 장례를 치를 때는 장례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백성들의 어려움과 함께 하는 청렴한 선비가 많았다.

올레를 걷다보면 차도 없던 시절..

이 모든 지역을 모두 걸어다녔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릴 적 할머니의 손을 잡고 지금은 용강이라는 이름의 웃무드네길을 하루 종일 걸어서 갔던 때가 생각난다.

아침에 일찍 집을 나서면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도착했다.

제사를 모시기 위해서다.

그리고 아침이면 또 일찍 서둘러 길을 나서야 했다.

언젠가 버스가 생겨 오전 오후에 하루에 딱 한 번씩만 다니는 버스를 아침 일찍 탔던 기억도 있다.

그런 세월을 지났다.

누가 올레가 무언인지를 묻는다면 아마 우리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갈 수 없는 멀리 있는 무형의 것이 아니라 언제든 들어서기만 하면 되는 실체적 고향이기에 올레는 지금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길이라고 말할 것이다.

 

 

지난 16일 제주올레14코스의 하프코스인 저지마을-월령리 선인장마을 까지의 올레는 수많은 종류의 길이 이어진 놀라운 여정이었다.

숲길 들길은 물론 오시락길, 굴렁진 길, 잔디가 놓인 길, 돌길, 흙길, 자갈길, 농로길, 꽃길, 억새길 등 다양한 길들이 올레길을 특이하게 만들었다.

길의 종류를 총망라한 그런 길들이 14코스 하프를 걷는 구간에 다 있었다.

올레친구 고광언과 시작점인 저지마을 미센터 앞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14분..

저지오름 옆길을 따라 걷는 14코스는 초입에 서있는 보호수인 수령 350년의 팽나무가 가장 먼저 나타나 우리를 반겼다.

노랗게 감귤이 익어가는 길을 따라 걷다보니 하늘까지 맑아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그림을 그리듯 하늘에 놓인다.

억새꽃이 흐드러진 들길이 먼저 나오더니 곧 돌길이다.

농로로 사용됐을 이 길은 자갈밭이라 우마도 다니기 힘들었을 정도로 길이 척박했다.

이런 길은 계속 이어졌다.

 

 

 

처음 나타난 길은 ‘큰소낭 숲길’.

제주올레가 길을 개척하면서 만들었다는 이곳에는 실제로 큰 소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호젓한 숲길이 걷기에 참 좋은 느낌이 드는 그런 길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길을 만들었을까 할 정도로 숨겨져 있었을 길..

사실 올레길이 아니라면 다닐 일도 없을 정도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 길도 돌길 또는 흙길이었다.

한라산은 구름이 막고 있었지만 하늘에는 거대한 구름이 한라산 위를 구름으로 덮었다.

올레길의 구름은 친구와도 같다.

 

 

 

다음에 나타난 길은 ‘오시록헌 농로’였다.

이 길도 제주올레에서 명명한 이름으로 아늑하다는 의미의 오시록과 이 밭길을 걷는 느낌이 오시록해서 명명했다는 설명이 있었다.

오시록하다는 것은 비밀의 장소라는 뜻도 조금은 있을 것이지만..

이 길도 자갈밭과 흙길이 이어졌다.

5km 지점을 들어서자 곧 나타난 커다란 산..

쓰레기산이 눈앞에 턱 하고 나타났다.

예전에 걸을 때는 저렇게까지 높지는 않았는데 벌써 하나의 높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마주보고 서 있는 금악오름과 대비되는 쓰레기산..

 

 

 

참담한 마음으로 이 길을 지나는데 쓰레기산이 나타나는 곳 까지는 또 ‘굴렁진 숲길’이라는 이름의 숲길이 다시 하나가 나타났다.

굴곡이 있는 숲길이라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데 이곳은 거의 돌밭 수준이었다.

이 ‘굴렁진 숲길’을 나오면 쓰레기산이 앞에 나타난다.

우리가 매일 버리는 쓰레기는 이렇게 산이 되어 쌓여가고..

해결방법은 없고..

한숨을 지으며 쓰레기산을 지나니 이제 선인장밭이 나타난다.

월령까지는 건천이 길게 바다까지 이어져 만들어져 있고 이 개천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지 억새가 가득 했다.

제주 가을의 상징인 억새..

바다를 향해 내려가는 내내 억새꽃이 우리를 환영하듯 흔들거렸다.

길고긴 들길..억새와 이름 모를 꽃들이 해안까지 이어진 이 길을 안내했다.

 

 

 

한림읍 월림리 월령마을은 선인장마을이다.

집 돌담에도 선인장이 자란다.

무명천 할머니길이라는 벽화가 아름답게 그려진 마을길을 따라 오늘의 목적지를 향했다.

이 벽화는 제주에서 처음 모녀작가전을 열었던 전윤숙 화백(제주벽화 대표)과 젊은 작가 박주애 화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모녀는 무명천할머니길이라는 스토리텔링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월령 선인장마을에는 이 두 화가가 그린 아름다운 그림들이 마을 곳곳을 수놓고 있다.

바다색이 참 아름답다.

드디어 도착한 월령리 바닷가에 있는 중간스탬프 ..

수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선인장과 아름다운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바다는 포효하듯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자꾸 바위에 부딪혔다.

 

 

 

중간스탬프를 찍은 시간은 12시21분..

약 3시간 정도를 걸었다.

이곳 평상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고행을 하듯 걷는 젊은이도 평상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친구들이 단체로 여행을 온 듯한 젊은 아가씨들은 까르르 까르르 웃으면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는다.

이 모든 정경이 올레길에서 만나는 세상의 모습이다.

 

 

 

퇴계는 소박하게 자연을 사랑했다. 그는 산수를 사랑했고 자연물과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자연을 세속에서 얻은 병의 치유처로 여겼다.

퇴계는 또한 그가 처한 주위의 산수가 선계(仙界)로 통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떨 때는 주위의 산수를 바로 선계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퇴계는 또한 자연과 산수를 소박하게 즐기면서도 이러한 현상적인 자연과 산수를 넘어선 근원자인 천도(天道)를 잊지 않는다.

퇴계의 시에서는 생생불식(生生不息)하는 천지자연의 생의를 읊은 시가 많다.

 

나는 애당초에 시골사람 기질로서

고요함을 사랑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했네

 

지껄임을 좋아함은 실로 옳지 않겠지만

고요함을 사랑함도 또 하나의 편견일세

 

한길을 걷는 사람 그대는 살펴보라

서울에 살면서도 시골이나 다름없네

 

정의로움이 편안하니 곧장 이를 행하련다.

가야 할 젠 가고 그쳐야 할 젠 멈춰야지

 

다만 세속 물들기가 쉬울까 저어하니

차라리 고요한 것이 마음 수양 좋으리라.

 

이 시는 ‘화도집(和陶集)’에 실린 음주시(飮酒詩) 20수에 대한 화답으로 쓴 시 가운데 다섯 번째의 시이다.

퇴계는 여기서 자신은 시끄러운 서울을 싫어하고 차라리 고요한 시골을 좋아하지만 고요함만을 사랑함도 한편으로 치우친 성벽임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비록 그렇긴 하지만 마음 수양에는 역시 고요함을 좋아함이 더욱 유효하니 그러한 성벽을 버릴 뜻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출처] 퇴계 시의 자연 사상|작성자 곡주]

 

 

 

 

우리는 중간스탬프가 있는 선인장마을 해안가에 앉아 한경면 택시를 호출했다.

다시 저지마을로 돌아가면서 보니 길이 참 멀어보였다.

 저지리마을 저지당몰국수집(대표 김경심)은 이번에 3번째로 연속적으로 가게 된 국수를 파는 식당이다.

이 집은 고기국수가 참 맛있다.

국수는 직접 끓여주는데..국물이 배지근하다.

벌써 이름이 났던 것일까

홀 안에는 단체손님이 2팀이나 앉아 있었다.

제주에서 유명한 고기국수 맛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말이 많지만..

이 국수집은 맛이 달랐다.

그래서 한번은 꼭 소개해 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오래 변함없이 잘 만들어 팔아 주시라는 뜻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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