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섬 제주,그리고 자당화는 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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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섬 제주,그리고 자당화는 고왔다.."
  • 고현준
  • 승인 2019.12.26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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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제주올레16코스 고내포구-광령1리사무소, 아름다운 시가 있는 '시인의 길'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제주올레16코스를 걸으면서 수산리 당동 돌담에 새긴 석비에서 오랜 만에 만난 시다.

한때 그 꽃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그, 꽃이라는 제목의 시.

올레 16코스는 가는 곳곳 제주 돌담에 많은 시비가 새겨져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그런 분위기를 주었다.

지난 21일은 하프올레 걷기 제주올레16코스 수산리 당동-광령1리사무소까지 걷는 코스였다.

당동 버스정류소에는 제주연구원이 선정한 농촌체험 치유마을 애월읍 수산리 ‘물메밭담길’이 이어진 곳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물메밭담길

‘제주시 애월읍에 속하는 수산리의 명칭은 정상에 못이 있는 ‘물메오름(수산봉)’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400여년 전 수산리가 생길 때 뜰안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마을의 수호목 곰솔이 천연기념물 제441호로 보호되고 있으며 수산봉 정상의 봉수대,기우제단, 사장터 등 유물 유적이 많은 유서깊은 마을이다.

아름다운 물과 산을 배경으로 고즈넉한 농촌 풍경을 함께 걸으며,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소박하고 평화로운 ‘물메밭담길’로 안내한다‘는 안내판이었다.

이 마을의 평화로움은 마을을 감싼 웅장한 한라산이 잘 보여주고 있었다.

돌에 새긴 시비와 마을 전경과 한라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다가왔다.

한라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시비에는..

 

 

그립다는 말의 긴 팔

-문인수

 

그대는 지금 그 나라의 강변을 걷는다하네.

작은 어깨가 나비처럼 반짝이겠네.

뒷모습으로도 내게로 오는 듯 눈에 밟혀서

마음은 또 먼 통화 중에 긴 팔을 내미네.

그러나 다만 바람 아래 바람 아래 물결.

그립다는 말은 만 리 밖 그 강물에 끝없네.

 

또 하나 더, 한라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석비에 새긴 시다.

 

진검(眞劍)

-김남조

 

진검을 지닌 이

진검 그것 외엔 가진 거 없는 이는

좀채 칼을 뽑지 않는다.

한 남자와 한 여자도

사랑한다는 마음의 진검을

평생 동안 아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날에 서로

알고 있었다.

 

이렇게 석비에 새겨진 시를 하나씩 읽고 걸어갔다.

그렇게 걷다가 만난 큰섬지(대천).

아래를 보니 예전에는 이 조그만 곳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이 이 주변지역 많은 사람들의 고마운 식수원이었겠다는 생각이 드는 아주 조그맣고 예쁜 샘이었다.

 

 

큰섬지

‘큰섬지는 수질이 맑고 수량이 풍부하여 설촌과 더불어 주민들이 음용수로 사용하여 왔으며, 심한 가뭄에도 샘이 마르지 않아 인근 마을인 장전리, 소길리에서도 이 물을 이용하여 식수를 해결하였다.

수산봉 서쪽에는 새섬지, 동쪽에는 공섬지, 명새왓섬지가 있어 1970년대 이전까지 이 지역 주민들의 식수를 해결하여 왔다‘는 설명이 있었다.

 

하지만 아래쪽에 쓰여있는 글은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음용수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하늘이 주신 그 물은 아직 남아 있으나, 먹을 수는 없는 물로 만들어버린 우리들의 이 어리석음을 무엇이라 말할까.

그런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이런 시가 그곳에 하나 서 있었다.

 

 

어느 날 하느님이

-박의상

 

어느 날 하느님이 물으셨다.

꽃아 너는 피고 싶으냐

예 그럼요

하느님이 또 물으셨다

한번 피면 져야 하는데도?

예 그래도요

지면 다시 못 피는데도?

예 그래도요

 

돌담과 함께 마치 자기도 돌담인 양 시를 쓰고 앉아있는 시비들.

수산리는 정서가 메마르지 않은 마을이라는, 그런 오래된 마음의 향수를 이곳에 서 있는 시들이 걷는 내내 여유로움을 주었다.

그래서 이곳에 서 있는 시비에 새긴 시들을 보이는 대로 몇 개 더 적어보기로 했다.

수산리는 이상하게도 감귤을 따지 않고 나무에 그냥 둔 곳이 많았다.

그런 감귤밭 돌담에도 시는 그런 수확의 풍요로움과 함께 존재했다.

 

 

 

달 같은 사람 하나

-홍윤숙

 

달 같은 사람 하나 어디 없을까

보름달 아닌 반달이거나 초승달 같은

어스름 달빛처럼 가슴에 스며오고

흐르는 냇물같이 맴돌아가는

있는 듯 없는 듯 맑은 기운 은은하게

월계수 향기로 다가왔다가

그윽한 눈길 남기고 돌아가는

큰소리로 웃지 않고

잔잔한 미소로 답하고

늘 손이 시려 만나도 선 듯

손 내밀지 못하는

그럼에도 항상 가슴에

따뜻한 햇살 한 아름 안고 있는

그런 사람 세상 끝에서라도

찾아가 만나고 싶다.

 

 

 

 

수산리 마을은 길을 가다 만나는 한라산은, 마치 어머니인 듯 마을을 바라보고 선 모습이다.

당동에서 시작한 걷기는 처음 예원등이라는 마을과 만났다.

이 마을에서 처음 만난 시는..

 

사랑에 관하여

-박상천

 

눈을 어깨 가득 지고 서있는

겨울나무 숲길을 걸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눈 위에 선명하게 남겨진 자국들

그 발자국을 바라보며

받아들임의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눈은 나의 몸무게만큼의 깊이로

신발 모양 그대로의 무늬로

나를 포근하게 받아들였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런 것.

자신의 가삼에

그의 깊이를

그의 넓이를

그리고 그의 선명한 무늬를 남기는 것.

 

 

 

 

이곳에서 올레친구인 고광언과 둘이 한라산이 아주 잘 보이는 조그만 동산 정자에 앉아 지긋이 마을과 주변을 살펴 보았다.

날씨는 추워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 바다가 보이고, 우람하게 서 있는 한라산과 멀리 보이는 제주시의 중심과도 만났다.

이 예원동마을이 주는 평화로움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그런 마을 중간에 있는 동산의 정자는 이 마을의 사랑방 역할이라도 하듯 운동기기가 몇 개 놓여 있어 그런 분위기를 짐작케 했다.

다시 일어나 마을을 지나니 큰 길이 나오고..

대로를 지나 항몽유적지로 오르는 입구에는 장수물이 있었다.

 

 

 

장수물

이 샘은 삼별초의 대장 김통정 장군에 관한 전설이 얽힌 유적지로 ‘장수물’ 또는 장수발자국‘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것은 1273년 고려 원종 14년 5월 여몽연합군이 삼별초의 최후 보루인 항파두성을 공격할 때 김통정 장군이 성위에서 뛰어내리자 바위에 발자국이 패이면서 그 곳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게 되었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샘물은 석간수로 사시사철 마르는 일이 없다. 는 설명이 일어와 영어 중국어로 함께 소개돼 있었다.

하지만 아래에 적힌 글은 또 우리를 슬프게 했다.

‘이 샘물은 음용수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맑고 영롱한 아주 작은 샘물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먹을 수가 없다니..

김통정 장군이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동산을 조금 오르니 곧 토성이 나타났다.

항파두리성이다.

예전에는 토성 위를 마음놓고 올라다녔지만 이번에 보니 토성 위로는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타난 낡은 창고집 벽의 빨간 하트.

안을 들여다 보니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섬 제주,

두려움과 희망은

늘 바다 넘어서 밀려왔다.

-1271년

 

그날 하늘은 파랗고 땅을 붉었다.

그리고 자당화는 고왔다.

-1273년 4월

 

그리고..

 

 

그들은 무신정권의 버팀목이었고

역사의 승자에게는 반역의 무리였다.

그들은

새로운 고려를 꿈꾸기도 했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용감한 군대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전란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쳐야만 했던

고려의 백성이었다.

 

제주항파두리 항몽유적지..

 

 

 

항파두리성이 있었던 곳은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한라산이 또 눈앞에 나타난다.

이곳은 심별초 최후 항전지인 항파두리성 내성지로 항파두리성에 내성과 외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이뤄지고 있는 곳이다.

이곳을 조금 지난 곳 정자에 올레16코스 중간스탬프가 놓여있다.

내성을 나와 걷다보면 이곳 항파두리 외성 또한 드넓은 곳에 조성돼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성의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이제 내리막 길.

한참을 걸어 나와 고성리와 광령리 사이를 지나며 잠시 길옆에 앉아 쉬는데 우람한 소나무가 하나 씩씩하게 서 있었다.

돌 틈을 잘도 삐지고 나와 예쁘게 잘 자란 소나무였다.

그러나 그 아래쪽을 보니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러운 생활하수가 그대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많은 주거단지가 생기면서 이곳은 마치 별장지처럼 된 곳이지만 이렇게 생활하수는 아무런 여과없이 버려지고 있는 상태였다.

소나무는 아마 그 물을 흡수할 것이다.

그렇게 오염된 물을 자꾸 흡수하다 보면 언젠가는 시름시름 앓게 될 것이다.

인간들의 무지가 이런 제주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어 광령마을 안쪽으로 들어 올 때도 작은 샘물이 하나 나타났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듯 입구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몇 번이나 이곳을 지났지만 이곳에 이런 물이 있는 즐도 몰랐다.

물허벅상이 있기에 뭐가 있나 하고 살펴보다 발견한 것이다.

제주올레 16코스 하프코스(고내-광령1리)를 걷는 동안 4개의 샘물과 만났지만 단 하나도, 마실 수 있는 샘물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게 제주도의 현실이다.

드디어 광령1리사무소 앞..

오전 9시05분에 출발하여 11시26분에 종점에 도착했다.

 

들꽃과 닮은 제주올레..

 

들꽃

-문효지

 

누가 보거나 말거나

피네

누가 보거나 발거나

지네

한마디 말도 없이 피고 지네

 

억새가 흐드러진 제주올레..

 

억새꽃 그리움

-이길원

 

바람 부는 날이면

한라산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붑니다.

바람의 길목 마다 억새꽃 흔들리는데

나지막이 불러 봅니다.

돌아오지 않을 임인 줄 번연히 알면서

가슴 저리도록 그리운 이름

바람 부는 날이면 까닭 없이 솟구치는 눈물

가슴에 묻은 외로움 바람에 날려 봅니다.

내 기다림의 끝은 어디일까

오늘도 제주에는 바람이 이는데

억새꽃 스친 바람아

이 마음

임에게 전해 줄 수 있다면

 

올레에서는 많은 일들과 만난다.

사람과도 만나고 사연과도 만나고 역사와 문화와도 만난다.

이런 모든 일이 제주올레가 주는 선물들이다.

아직도 올레길은, 걸어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과정에서, 올레길을 모두 시로 수놓은 한 마을의 아름다운 올레와도 마주할 수 있었다.

제주올레 16코스는 이런 아름다운 시들로 인해  ‘시인의 길’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올레꾼 고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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