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일 검은 모래밭..그 위에 해안도로 만들어 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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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일 검은 모래밭..그 위에 해안도로 만들어 원통.."
  • 고현준
  • 승인 2020.01.30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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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제주올레18코스 삼양해수욕장-조천만세동산 코스는 삶의 길

 

 

“전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삼양해수욕장 검은 모래밭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서울에 오랫동안 살다 제주로 돌아와 고향인 제주시 삼양동에 거주하고 있는 난전 강법선 선생이 올레18코스 중간스탬프를 찍고 올레길에 들어서자 마자 탄식하며 했던 말이다.

해안도로를 만든다며 사라진, 길게 늘어섰던 검은 모래밭 가득했던 삼양해수욕장이 반으로 쪼개져 있는 데 대한 반감이었다.

주민을 위한 것이 아닌, 너무 손님에만 치중하는 손님친화적인 개발이 늘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난전선생은 “예전에는 삼양해수욕장이 길게 검은 모래로 가득 했고, 삼양에 사는 사람들은 동쪽 해수욕장에서 놀곤 했다”며 이제는 도로 아래로 사라지고 없는 모래사장을 참으로 안타까워 했다.

“내가 제주에 있었더라면 절대로 해수욕장을 뭉개고 만든 해안도로를 절대로 반대했을 것”이라며 "해안도로가 주민의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이야기도 했다.

 

 

지난 25일은 제주올레 18코스 하프코스인 삼양-조천 만세동산까지 걷는 날이었다.

올레꾼 고광언은 이날 신년인사회 관계로 참석하지 못했고 대신 후배 김진형이 참여해 난전 선생 부부와 함께 4명이 올레걷기에 나섰다.

삼양해수욕장에서 출발 스탬프를 찍고 나선 길에서 만난 해안도로를 보자마자 난전선생은 이토록 실망감을 금치 못한 것이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100년이 넘은 삼양포구도 공사에 나서서 돌맹이를 쌓는 사람, 중장비를 움직이는 사람 등 또 다른 공사가 이곳 포구에서 진행 중이라 더욱 어지럽기만 했다.

제주도는 요즘 어디를 가나 이같은 공사판은 부지기수로 보이니 놀랄 일도 아니다.

 

 

잔뜩 흐린 날씨였다.

이날은 특히 오후 3시부터는 비가 온다는 예보라 걸음을 빨리 해야 했다.

매일 뒤쳐져 걷던 나는 이날 가장 앞서서 걸음을 빨리 했다.

겨울철 올레길에서 비라도 만나면 걷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날 난전 선생으로부터 예전에는 아주 넓고 길었다는 삼양해수욕장을 다시 보자니 모래톱 위에 자동차도로를 만든 것이라 사실 아까운 공사인 것 같았다.

그냥 두었으면 더 좋았을 모래밭이 지금은 거의 반 이상이 해안도로 아래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포구공사는 ‘가름성창 전통포구 정비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지난 해 11월부터 공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곳에 샛도리물이 있었다.

 

샛도리물

삼양1동은 산기슭에 호미 모양의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서흘포’라 이름 짓고 ‘설개’라 불렀으며 그 포구에는 용천수들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샛도리물이다.

샛도리물은 굿을 할 때 깨끗한 물을 뿌리며 나쁜 기운과 잡귀인 새(까마귀)를 쫓아내는 ‘샛도림(새쫓음)을 하기 위해 이 물을 길어서 쓴 데서 연유됐다고 한다. 고 적힌 석비가 이곳에 서 있었다.

 

'모래가 아름다운 삼양'이라는 광고판이 무색하게 지금은 까만 모래밭은 전설처럼 남게 됐다.

마을 안길을 따라 올라가니 원당사와 오층석탑이 있는 불탑사로 올라 가는 길로 안내했다.

이 절들이 있는 곳이 원당봉이다.

 

전국 유일의 삼첩 칠봉 원당봉

 

봉우리 일곱 개, 사찰 세곳, 굼부리 안에 자리한 연못, 5층 석탑 등 원당봉은 볼거리가 많다.

봉우리가 원당봉과 함께 앞오름, 망오름.펜안오름,도산오름,동부나기,서부나기가 있어 원당칠봉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사찰로는 불탑사(조계종),원당사(태고종),문강사(천태종)가 있고 불탑사 경내에는 보물(제1187호)로 지정된 원당사지 5층 석탑이 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현무암을 재질로 삼아 축조된 것이며 축조양식은 고려 후기 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름의 주봉 분화구 안에는 문강사 절이 위치헤 있는데 절 앞에는 커다란 연못이 조성돼 있다.

 

이 길을 오르는데 보니 매화가 피어 있었다.

난전 선생은 청매화라고 했다.

원당봉은 원나라때 이 오름 허리에 원나라의 당인 원당이 세워 진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불탑사 앞에 석비에 새겨져 있었다.

 

원당사지

 

원 제국시대 제주도의 3대 사찰의 하나였던 원당사터.

13세기 말엽 원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보이며 원나라 기황후가 삼첩칠봉의 명당자리에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기 위하여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17세기 중엽까지 존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1914년 이곳에 불탑사가 재건되었다.

지금도 경내에 당시 세웠던 5층 석탑이 보물 제1187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불탑사에 들렀을 때 난전선생 부부는 5층 석탑 앞에서 정성스런 기도를 올렸다.

 

5층 석탑

햔무암으로 쌓은 이 탑의 양식은 1층의 기단과 5층의 몸돌이 심하게 좁아 특이하다. 또한 1층의 남쪽 면에 감실(불상을 모셔두는 방)이 있는 점도 독특하다. 기단면석에는 뒷면을 제외한 3면 안상내에 같은 크기와 형식의 귀꽃문이 있다.

 

불탑사 경내는 언제 와 봐도 참 정갈한 모습이었다.

깨끗하고 따뜻한 절이 아담하게 앉아있는 모습이라 포근하기만 했다.

 

불탑사 옆길을 따라 신촌으로 가는 길은 사유지라 좁디좁은 길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좁은 길을 지날 때 몇 년 전에는 뻐꾸기가 울었는데 요즙은 제주에서 드물게 만나는 뻐꾸기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이를 얘기했더니 난전선생은 “겨울철 뻐꾸기는 아마 따뜻한 지역으로 옮겨 갔을 것”이라며 “사실 뻐꾸기는 그 새의 예쁜 노래소리와는 달리 아주 나쁜 새”라고 했다.

“남의 둥지에 자기 알을 낳고 원 주인인 그 새의 알은 떨어뜨려 버린다”는 것이다.

“남의 둥지에서 어미새가 가져다주는 먹이를 다 먹고 다 큰 후에야 그 둥지를 떠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 신촌 가는 옛길이라는 곳은 뻐꾸기보다 더한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신촌 가는 옛길

삼양에 사는 사람들이 신촌마을에 제사가 있는 날이면 제사 밥을 먹기 위해 오갔던 길.

제주도에서는 집안의 제사에 직계가족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일가친척과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풍습이 있다.

 

이 신촌 가는 옛길은 풀이 자란 작은 길을 걷던 곳이었으나 이날 보니 넓게 포장돼 예전 모습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다소곳한 올레길이 아니라 아예 포장된 대로로 변해 버려 실망감이 컸다.

그리고 이 길을 다 나오자 삼양-신촌간 다른 대로가 또 만들어지고 있었다.

 

올레코스는 이 공사중인 대로를 따라가다 중간에 해안으로 나가는 작은 오솔길로 들어서야 하는데 난전 선생이 “저승문 바위가 이 아래쪽 해변에 있다며 보고 가자”고 했다.

물론 이 길로 가면 길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승문이라는 기암괴석이 궁금하기도 하여 따라 내려갔다.

그러나 저승문은 우리가 지나온 서쪽 더 멀리에 있어서 볼 수는 없었다.

결국 다시 올라오기가 싫어 오솔길을 따라 한번 길을 찾아보기로 하고 무작정 숲속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숲속으로는 길이 험해 중간에 포기하고 바닷가로 나와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용암이 흐른 돌길을 따라 조금 더 앞으로 나가니 올레길보다 더욱 아름다운 해안오솔길이 나타났다.

실은 당초 우리가 걸어야 했던 올레길보다도 걷기에 더 좋은 오솔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이어서 그런지 이곳 바닷가에는 역시나 쓰레기가 산더미였다.

이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올레코스와 다시 만났다.

우리가 잘못 들어섰던 이 해안오솔길은 올레코스로 개발해도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바다를 향해 내려오다가 중간에 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바다 해안길을 따라 걸으면 이보다 좋은 코스는 없을 것이다.

이곳 해안가 갯바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낚고 있는 모습 또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신촌으로 나가는 이 해안길은 사실 숨어있는 비경이다.

중간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길게 누워 있고 그 소나무 아래에는 작은 평상이 놓여있다.

그리고, 바닷가로 난 올레길을 따라 밭길을 옮기면 그림같은 풍경이 하나 만들어지기도 한다,

멀리 닭의 머리를 닮았다는 닭머르가 보이면 드디어 신촌이라는 마을이다.

 

 

닭모루(닭머르)

닭의 머리처럼 독특하게 생긴바위에 붙여진 이름이다.

바닷가로 툭 튀어나온 방위 모습이 닭이 흙을 걷어내고 들어 앉아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불려지게 되었다.

 

 

 

이 닭머르가 있는 곳은 팔각정이 우뚝 서 있어서 운치를 더한다.

이 바위 하나가 주는 분위기가 이곳을 특별하게 빛내고 있는 것이다.

닭머르가 있는 팔각정에 잠시 머물고 다시 걷기 시작하자 난전선생 부인 정하연 여사가 “차라도 한잔 하고 가자”고 모두에게 권했다.

우리는 이곳 마을입구에 있는 피플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작은 카페에 들어가 커피와 함께 서울에서 공수해 왔다는 찰떡으로 잠시 요기까지 했다.

 

 

바다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인지 파도가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마을을 지나는데, 신촌이라는 마을에는 무너지고 부서진 빈집이 참 많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촌이나 조천이나 이 지역 마을 안길은 아직까지 옛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마음이 푸근했다.

대 도로변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지만 옛마을은 아직 작은 골목길이 운치를 더하고 인간미를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마을을 지나 드디어 대섬에 도착했다.

예전에는 야자수올레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법개발을 했던 곳이다.

지금은 보기싫은 야자수가 다 사라지고 옛 모습을 찾았다.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택시운전기사도 이 내용을 알고 있었던지 “예전에는 보기가 싫었는데 잘 원상복구 돼서 좋다”고 말하는 애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자연은 늘 자연 그대로 둘 때 아름다운 법이다.

대섬을 지나는 동안 많은 철새는 아니지만 새들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종종 보여 안심이 됐다.

마을길을 따라 가다보니 비석거리와 만났다.

많은 비석이 서 있는 모습이 신비롭기만 한 곳,

사진만 찍고 조천포구 옆에 있는 연북정에 올랐다.

 

 

연북정 戀北亭

 

문화재 지정 사항 ; 제주도 지방유형문화재 제3호

위치 ;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2690.

건축년대 ; 미상(조선초기 추정)

유형 ; 관방유적(건물)

 

조천읍 조천리 2690번지에 있는 조천관이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 상세히 전해 주는 문헌 기록은 없다.

구전으로는 고려 공민왕 23년(1374) 박윤청(朴允淸) 목사 때에 조천관이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적 근거는 없다.

대체로 조선초에 조천관으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천관은 객사(客舍)로 처음에는 조천진 밖에 있었다고 하나 연대는 미상이다.

교수(敎授) 곽기수(郭期壽)의 중창기(重創記)에 의하면 〈조천관은 바다 어귀에 있었는데, 육지에 나가는 사람들이 순풍을 기다리는 곳이다.

 

조천이라 이름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절제사 이옥(李沃)이 부임한 다음 해 경인(庚寅)년(선조23년, 1590)에 막부(幕府)의 제공(諸公)과 협의하고 아전과 주민에게 '조천에 관을 둔 것은 실로 도적들이 다니는 길목의 요충이며 왕명을 받는 곳이기 때문인데 이 같이 성이 좁고 건물이 노후할 수 있겠는가?

어찌 농사짓는 틈틈이에 개축하여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가 옳다고 하였다.

이에 휘하에 명하니 전 부장(前部將) 서만일(徐萬鎰)이 그 일을 주관하고 애써서 마침내 재주 있는 역군들을 동원하여 10월에 착공하고 12월에 마쳤다.

성은 동북쪽으로 물려서 쌓고 그 위에 망루를 안치하여 쌍벽(雙碧)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쌍벽(雙碧)은 청산녹수(靑山綠水)에 접하여 있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제주의 문화재 증보판 187쪽)

그리고, 선조32년(1599)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건물을 중수하고 연북정(戀北亭)이라 이름을 고쳤다. '연북'이란 북녘에 있는 임금에게 사모하는 충정을 보낸다는 뜻이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했는데 지금 건물은 1973년에 수리한 것이다.

보수 당시에 〈龍 嘉慶二十五年庚辰二月十五日辰時上樑 虎〉라는 명문이 나왔는데 가경25년은 순조20년(1820)이므로 연북정은 1820년에 마지막으로 보수된 것이다.

건물 북쪽에는 타원형의 성곽을 쌓았는데 이 성곽의 모양과 크기가 옹성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이 정자는 망루의 용도로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나, 본디 朝天이란 말은 천자를 배알(알현)한다는 뜻이다.

관리(官吏)의 주재 및 숙박소인 것이다. 예로부터 조천포는 화북포와 함께 제주도의 관문이었다.

관문이란 국경 또는 요해지에 설치하여 통행인을 감시하는 곳이다.(북제주의 문화유적 163∼165쪽)-고영철의 역사교실에서 발췌

 

 

 

연북정을 뒤로 하고 바닷길을 따라 가다보면 조천연대를 지나 조천만세동산에 이른다.

조천만세동산 주차장이 오늘 걷는 제주올레18코스의 종점이다.

 

연북정에 얽힌 이야기 하나

 

이곳은 혈맹의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김명식(金明植:1891~1943)은 한성고등학교(漢城高等學校) : 현 경기고등학교) 졸업을 앞둬 겨울방학에 고향으로 내려와 연북정으로 찾아갔다.

어릴 때의 벗 홍두표(洪斗杓:1891~1977)와 고순흠(順欽:1893~1977)을 불러냈다. 더구나 이 연북정은 김명식이나 홍두표, 고순흠 등이 배웠던 의흥학교(義興學校)의 옛 건물이 아닌가!

세 동지는 자연 얘기의 화두(話頭)가 '나라는 망했으니 우리들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말로 이어졌다.

 

먼저 태어난 순서로 산(山), 동산(園), 바위(巖) 등 그 크기 순서로 정하여 그 산이나 동산, 또 바위와 같이 변하지 말자고 다졌다.

이어 산이나 동산이나 바위의 틈에 끼어 자라나는 송매죽(松梅竹)과 같이 변절하지 않은 기개로 끝까지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워 국권을 회복하자고 맹세하였다.

이러한 뜻에서 각자의 아호(雅號)는 김명식은 송산(松山), 홍두표는 매원(梅園), 고순흠은 죽암(竹巖)으로 정하여 부르기로 하였다.

다음 이를 지킬 징표(徵表)로 '천지위서(天地爲誓) 일월위증(日月爲證)'(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저 해와 달은 이를 증명할 것이다.)이란 여덟 글자를 혈서(血書)로 썼다.

이를 세한삼우(歲寒三友) 송매죽의 혈맹결의(血盟結義)라 한다. 이때의 김명식이나 홍두표는 22세요, 고순흠은 20세 되던 해의 일이다.

 

 

지금 세상은 우한 폐렴으로 국경이 막히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사스나 메르스보다 빠른 전염력을 보이는 이 바이러스는 어디서 어떻게 전염이 될지 몰라 전 세계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제주환경 문제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해지고 있다.

언젠가 제주도 역시 환경문제로 전전긍긍할 날이 오고야 말 것이기에 늘 걱정이다.

올레를 걸으면서 보이는 제주 또한 늙어가는 것인지 익어가는 것인지..

늘 변화무쌍하다.

제주다운 제주를 다시 찾을 때까지는 이 올레길을 걷는 걸음을 멈출 수 없다.

제주에는 올레길 만이라도, 마지막까지 온전히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올레꾼이 되겠다며 올레길을 걷겠다고 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지고 있어 나름 고무되기도 한다.

2월이 오면..올레를 걷는 팀이 또 하나 더 만들어진다는 점은 또 하나의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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