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등록문화재 등록 제주 4‧3 최초 유적, '수악주둔소'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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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등록문화재 등록 제주 4‧3 최초 유적, '수악주둔소'는 지금..
  • 홍병두 객원기자
  • 승인 2020.05.20 14: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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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 탐방)제주 4.3 유적지. 수악주둔소를 찾아 가 보니


수악주둔소의 의미를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해방 이후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당시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 속에서 한국 현대사의 중요 사건이었던 제주 4·3사건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간직한 유적지라 할 수 있다.

제주 4‧3 사건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간직한 유적으로 하는 그 상징성을 인정받아 2018년 6월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고시되었는데 이는 제주 4‧3 유적 최초이다.

서귀포시 남원읍에 위치하며 신례천 생태 탐방로 2코스를 연계할 경우 만날 수가 있다. 단품으로 진행하는 방법이 있으나 전진 코스를 통하여 화생이궤와 해거문이소를 비롯하여 이승이오름을 지나는 동선을 따르는 과정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찾아가는 방법은 서성로(1119번 도로)의 송목교 옆이 초입이며 양 방향 주차 시 목장 입구 맞은편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도로변 다리 옆으로 안내판이 있으며 돌담을 넘어 숲으로 들어가는 자체가 힐링 코스의 시작이기도 하며 수악주둔소로 가는 초입이다.

 

 

신례천 생태탐방로는 특별하다.

제주에 많은 숲길이나 곶자왈 등 자연 탐방로가 있지만 신례천 생태탐방로는 단품의 숲 산책로가 아닌 탐방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곳이다. 숲과 계곡을 비롯하여 역사와 문화 등을 망라하는 자연의 깊은 숲이며 힐링과 치유의 공간으로서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

길 따라 자연 따라.......
깊은 숲과 계곡을 따라 이동을 하는 동안 변화하는 환경과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는 데다 함께 연계하는 구성이 잘 되어 있다.

유적지는 이곳 수순을 따르다가 상잣성과 안내문이 있는 곳을 조금 지난 후 방향을 돌리게 되는데 곳곳에 리본 등 표식이 있어 어려움이 없다.

 

수악주둔소로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머체.

무심코 지날 수가 있는데 사전에 숙지를 하면 지난는 김에 머체의 사방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제주에서 머체라 함은 돌무더기 정도를 일컫는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머체왓이나 머체왓 숲길 등도 흔하게 쓰는 표현인데 여기서 '왓'은 일정한 공간이나 구역을 뜻하는데 '터'와 같은 맥락이다.

자연 생태가 살아있는 깊은 산중이나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숲속 같은 곳은 곶자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런 환경에서도 규모와 상관없이 머체들을 만날 수가 있다. 곶자왈 역시 '곶'과 '자왈'의 합성어인데 돌과 나무, 바위와 숲 등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이해를 하면 된다.

참식나무가 성장의 계절을 맞아 곱게 새순을 내밀었다. 다른 식물에 비하여 묘하게도 새순이 퇴색 빛을 띄기 때문에 마무리 과정의 낙엽으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생태적 환경을 갖추고 있는 일대인 만큼 가는 동안에 양치식물과 이끼류를 비롯하여 다양한 식생을 만날 수 있다.

 

 

수악주둔소에 진입하기 전에 만나는 안내문.
수악주둔소의 국가 문화재 등록은 4·3유물·유적 중 보존가치가 있는 것을 문화재로 지정해 평화. 인권의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2014년부터 추진해 왔고 지난 2018년 등록이 되었다.

등록문화재라 함은 지정문화재(국보나 보물을 포함)가 아닌 문화재 중에서 건설, 제작·형성된 후 50년 이상 지난 것으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한 문화재를 말한다.
 

 

경건함과 숙연함을 필요로 하는 표석과 안내문이 있다.

여기서 제주 4.3을 정의하는 내용을 되살펴볼 필요가 있다. 4.3의 개요와 의미 등은 크게 차이 나게 정리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해에 다소 도움이 된다.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와 미 군정의 강압이 계기가 되어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주 4.3특별 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제2조 :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주둔소 바로 옆으로는 정교하게 산담을 두른 묘가 한 기 있다. 이미 천리(이장)를 해간 상태이지만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어서 쉽게 확인할 수가 있다. 그간 세월이 지나면서 잡목 몇 그루가 봉분이 있던 곳을 차지하고 있었고 부분적으로 산담의 일부는 허물어져 있다.

 

제주 4‧3 수악주둔소 는 1949년 가을경에 만들어졌다. 주둔소의 위치는 수악의 동남쪽이며 신례천과 하례천의 계곡 사이에 있는 동산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주변을 조망하기에 아주 적지라고 여겼었는데, 남쪽으로는 신례리와 하례리를 비롯하여 효돈 쪽까지 깨끗하게 조망할 수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한남리 경까지 한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또한 서쪽으로는 수악의 주변과 북쪽으로는 물오름 주변의 모든 것들을 볼 수 있었기에 주둔소로 적합하다고 판단을 했을 것이다.

 

 

이 제주 4‧3 수악주둔소가 만들어질 때 작업을 하는 데는 인근의 신례리와 하례리는 물론 서귀포시 상효동 사람들까지 동원되었다고 한다.

성을 쌓고 나서는 경찰토벌대의 지휘 하에 토벌을 다녔는데, 인근 마을에서 올라와 이 주둔소에 집결하고는 토벌을 하였다고 한다. 주둔소까지 물자를 나르는 지원 사업은 대부분 가까운 신례리 사람들이 맡아서 했다.

일정하게 쌓아진 돌담들의 일부는 무너진 채 역사와 세월을 떠올리게 하지만 대부분은 원형을 잃지 않고 있어 당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돌담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해서 쌓았으며 외성은 회곽을 이루고 있다.

 

 

회곽의 바깥쪽 높이는 3.5m 정도였으며 내벽은 2m 가량 되었다. 주둔소의 내부 면적은 대략 250평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외부의 환경 상태가 더러 변화가 이뤄진 때문에 가늠하기에는 한계가 따랐다.

세월..역사..흔적..
오래된 쇠솥의 모습은 마음을 울컥하게 하였고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하였는데, 이곳을 찾은 누구인들 이 모습을 보겠지만 애써 치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전형적인 제주의 돌담과 다를 바가 없다. 촘촘하고 견고하게 쌓은 모습에서 인근 신례리 마을 주민들의 수고가 역력하게 드러났다. 외각은 물론이고 내부로 이어지는 곳 역시 구분과 경계를 포함하여 잘 쌓아졌다.

과거 한동안 사람들의 출입이 없었던 까닭으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그 형태가 남아 있다. 외성과 내성의 전체적인 둘레는 물론이고 외성의 회곽과 높이 등도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수악주둔지와 관련하여 요약한 개요는 다음과 같다.

해방 이후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당시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 속에서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이었던 제주 4.3과 관련한 유적지이다. 무장대 토벌을 위해 만들어졌던 많은 주둔지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돌담 등 건축적인 면에서 형식과 구조가 독특할 뿐 아니라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4.3의 흔적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현존하는 유적 역시 극소수인 상황에서 당시의 사건을 재조명하고 그로인한 교훈을 얻기 위한 현장유구로서 상징적 의미와 가치가 있다.

외부를 살피다가 동백나무 몇 그루를 만나게 되었다. 시기를 달리한 때문에 떨어진 꽃마저 시든 채 마지막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흩어진 꽃잎 몇 개를 주워 한데 모아서 무릎을 꿇고 셔터를 눌렀다.

근년에 제주4.3의 상징으로 선택된 동백꽃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몇 걸음 더 전진을 하니까 떨어진 솔방울들이 보여 다시 데코로 이용을 하여 흔적을 담았다.

내부의 모습에서도 건물이 있었던 곳과 난방을 했던 아궁이의 모습 등을 확인할 수가 있다. 화장실 터는 물론이고 외성에서 내성으로 들어오는 올렛목과 내성에서 건물로 들어오는 길목의 흔적들도 무너지고 훼손된 밑돌로나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있어서 지속적인 보존이 필요하다.

돌담 주변을 터전으로 삼아 성장을 이어가는 식물들은 역사를 알 리가 없다. 이끼류와 양치식물 등이 대세였는데 콩짜개 덩굴을 시작으로 개모시와 관중도 일대를 차지하여 푸르름으로 봄의 중심을 알리고 있었다.

4.3 당시 토벌대는 무장대와 주민들 간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해 제주도 산간 곳곳에 주둔소를 설치했다. 이 주둔소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무장대의 활동을 제한하고 효율적인 토벌을 위해 각 경찰서별로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1952년 4월에는 전도에 32개의 주둔소가 있었다고 한다.

주둔소는 마을 주민을 동원하여 석축을 쌓고 경찰 1명과 마을 청년 5~6명이 상주하며 경계를 했으며, 토벌대 60명이 동시에 취침 및 식사를 할 수 있을 규모의 주둔소도 있었다.

 

내부와 외부를 포함하여 크게 한 바퀴 돌아본 후 다시 원점으로 왔다. 작은 가방을 열어 과자 몇 개를 꺼내 표석과 안내문을  앞에 놓고는 절을 세 번 올렸다. 이번의 방문은 그런 절차를 하나의 의례로 삼아서 마무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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