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본 제주의 역사, 제주 최초 오페라 올린 기념비적 인물 김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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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본 제주의 역사, 제주 최초 오페라 올린 기념비적 인물 김국배..
  • 강문칠
  • 승인 2020.11.0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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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칠 문화칼럼(연재2))한라산 속의 음악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

 

본지 명예문화대기자인 강문칠 선생(작곡가, 음악평론가)이 최근 한라산 속의 음악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 라는 음악으로 본 제주의 역사서로 볼 수 있는 연구서를 내놓았다. 이 연구서는 그동안 제주에는 전무하다 시피한 음악의 역사를 살피고 숨어있는 얘깃거리를 발굴함으로써 제주도 음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이번에 발굴한 내용 중에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제주도에 직접 내려와 제주시에서는 제일극장에서 서귀포시에서는 서귀포관광극장에서 제주시민과 서귀포시민들을 대상으로 직접 애국가를 가르쳤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전까지는 올드랭사인 곡에 애국가를 맞춰 불렀는데 이후 현재의 애국가로 바꿔 부르게 됐다는 얘기도 새로운 내용이다. 제주도의 작곡가이자 퍙론가인 음악가가 조사한 제주도 음악사를 통해 제주도 역사를 새롭게 아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편집자주)

 

(앞에서 계속)

 

2)김국배의 제주생활

 

 

작곡가 강문칠

 

김국배 선생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67년도 필자가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시절이었다.
<악보 2> 오돌또기 합창곡(김영돈 저 ‘제주민요연구’ 중에서)


 오현고 교악대에서 대원으로 활동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그 당시 10월이면 언제나 열리는 탐라문화제(오늘날은 탐라문화제)가 전농로에 있는 공설 운동장에서 펼쳐지고 있었는데, 교악대원이던 나는 오현고등학교 교악대 대원으로 이 행사에 참가하고 있었다. 개막식에는 빠짐없이 합창하는 순서가 있었고, 그중 한곡이 <오돌또기, 악보2>이었다.


 합창단은 제주여고 전 학생들이 관객석에서 일어서서 합창을 하는데, 그 <오돌또기>를 부르는 합창의 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3년간 한라문화제 개막식 때 마다 그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김국배가 제주에서 제주여고 교사로서 안정된 직업을 갖고 나서,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김국배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다가 우연히(오늘 날 문화예술재단 건물 1층 자리) 커텐 집을 하는 선생의 막내딸을 알게 되었다. 인터뷰를 청했는데, 사위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에 관한 소식을 알게 된 것이 몇 년이 흐르고, 해안동에서 저녁 시간에 한 식당에서 또 다시 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에는 따님께서 인터뷰를 가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녀는 가족으로서 아버지를 알 뿐이었다. 큰 오빠가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서울에 올라가게 되면서, 선생의 많은 악보를 가방에 넣고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그나저나 선생은 제주에서 3남 3녀를 두었다. 그러나 장남 종국과 큰 딸인 종순 그리고 세 번째인 종선은 제주의 형제들과 연락이 끊긴 채로 살고 있었다. 제주에는 3남인 종만과 2녀인 종렬 그리고 3녀인 종숙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의 가족사는 아픈 데가 참으로 많은 것 같다. 월급을 타면 자기가 담당한 자기 반 학생들 중에 등록금을 내지 못한 학생들의 돈을 대신 내는 일이 비일 비재하였다고 한다. 가산이 궁핍하여 자녀들이 순조로운 학업을 못했다고 하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아픈 3녀인 종숙의 어린 시절을 또 다시 기억해 내는 것은 무척이나 자존심에 상처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사위께서는 이러한 처지를 만든 장인 어르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3)김국배의 음악여정

 김국배가 평양숭실학교를 다닐 적에는 일제강점기이다. 웬만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들 일본으로 유학의 길로 떠났다. 그러나 선생은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한국에서 음악공부를 하게 된다. 졸업 후 경성으로 내려 와서 한국 최초의 관현악단인 경성방송 관현악단(오늘날의 KBS방송 교향악단)의 바이올린, 비올라 등의 연주자 활동을 하였다. 제주에 내려와서는 남문로 길가에서 초가집을 임대를 하고 시계점 수리를 하였다.


 손님이 없어서, 저녁이면 가게에서 술을 먹고, 신세타령을 하면서 지냈다. 간혹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은 시민들이 제주지역의 유지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게 되고 드디어 몇 분이 그를 초대하여 술자리를 마련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에 그가 평양숭실음악학교를 졸업을 했다는 내용을 들은 손님 중에 그를 제주여중고에 음악교사로 알선하게 된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제주에 없을 때니까 그의 존재는 얼마나 대단했을까? 드디어 제주여중고등학교에 취업이 되고 그의 생활도 안정이 되었다.
 
 1968년 제12회 제주여고 예술제에서 공연이 되니 ‘백설공주’(극본 이기형, 작곡 김국배, 안무 송근우, 무대 조영호)는 교사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제주의 최초의 오페라 공연이었다. 당시 극본을 맡은 이기형 선생이 공연 배경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한번은 음악 선생인 김국배 선생과 얘기를 나눴는데, 학생들에게 아무리 오페라가 무엇인지를 이해시키기가 어렵다고들 하길래, 그러면 내가 대본을 쓰고, 김선생이 작곡을 하여서 학생들에게 보여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어요. 비록 피아노로 반주를 하여 공연을 했지만, 제주의 최초의 오페라 ‘백설공주’가 탄생하게 되었지요”(주3, 제주여고 50년사, p244). 그리고 그 작품으로 道 일주 공연 까지 함으로써 전 도민들에게 오페라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장화 홍련 전’, ‘춘향전’, ‘콩쥐 팥쥐’, ‘심청전‘ 뮤지컬 등을 제주극장에서 관객들이 가마니를 깔고 감상을 하였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전부 몇 편을 올렸는지 불분명하지만, 김국배 선생이 제주 음악 사회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하겠다.

천부적인 재능과 음악적인 열정으로 제주음악사회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은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는 여러 가지로 뮤지컬을 할 시설이라든가 장비가 갖추어 있지 않은 상태이고 보면 어려움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후에 1990년대에 들어서 필자가 창작 뮤지컬 ’자청비’(사진 자료)를 제주도 문예회관에서 올릴 때 까지 약 40여년이 지나고 나서야 제주에서 종합 예술을 공연을 하게 되는 것이다(악보, 제주여중고 제1 응원가)

 또한 전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이셨던 김영돈 박사(작고)의 저서인 ‘제주민요연구 上’(김영돈 저, 삼원인쇄사, 1965)에 제주민요 채집 악보 10여 편을 싣기도 하였는데, 악보를 연주함에 있어서 연주상의 주의할 점에 대하여 기술하기도 하였다. 그 악보에는 <오돌또기>, <이야홍>, <봉지가>, <해녀노래>, <맷돌노래1,2>, <김매는 노래>, <방아타령>, <타작노래>, <멸치후리는 노래>, <망건노래>, <양태노래> 등 모두 12곡에 이른다.


 김국배 선생이 6/8박자의 복잡한 제주전통민요인 <오돌또기>의 다양한 리듬들과, 흔히 사용하는 장식적인 음들을 모두 버리고 단순한 리듬으로 채보를 하여 온 세상에 알린 점에 대해서 주목을 할 필요를 느낀다.

오늘날에 와서도 <오돌또기> 민요를 보면, 제주의 각 지역에서 노래하는 민요의 리듬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가 있다. 리듬이 까다롭고 장식적인 선율이 많아서 노래하기가 무척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김국배 선생은 이러한 제주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곡조의 통일을 주장하여, 위의 악보대로 부르도록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 결과로 국정 교과서에 제주의 대표적인 민요로 지금까지도 <오돌또기>와 <이야홍 타령>을 싣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採譜를 하여 후대에 까지 민요 악보를 남긴 일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 후에 제주에서는 제주 민요를 수집하기 위한 각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악보를 남긴 것은 몇이 안 된다. 김국배 선생의 노력의 흔적이 제주음악사회에 내린 첫 번째 악보라고 할 수 있다.

 

4)김국배의 음악 흔적들


 앞에서도 언급한 김국배 편곡 <오돌또기>는 여성 3부의 돌림노래형식을 쫓아서 편곡이 되어있다. 주요 선율인 서주부에 등장하는 “한라산 허리엔---”으로 시작하는 전주부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환상적으로 합창을 하기에 힘든 것을 그가 편곡을 한 것이다.

화음부는 2도, 3도, 4, 5, 6도 형태를 5음 음계의 전통적인 한국음악의 형식을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우---로”진행되는 선율은 돌림노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육지부와 동떨어진 섬나라의 경이로움과 낯설고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화음線을 유지하고 있다.(악보3, 제주여중고 제1응원가) 그 당시에 여성합창곡으로서 <오돌또기>를 공설 운동장에서 공연을 한 김국배 선생의 음악적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낸다. 제주 음악의 역사에 1950년~1960년대에 위와 같이 천부적 재능을 지닌 김국배 선생으로 인하여 제주 음악을 한 단계 끌어 올린 장본인이라 할 수가 있다.


 그가 제주에 사는 동안 작곡이 된 곡들을 보면(일일이 조사를 다하지는 못했지만) 제주여중고 학원가, 졸업식 노래, 제1,2응원가, 제주중앙고 교가, 응원가 등이 있다(그외에도 제주도내의 각급 학교의 교가들 중에는 김국배 작곡이 더러 있다는 이야기가 있음).

 
 김영돈의 저서 <제주도 민요 연구 上>에서 기재된 악보의 첫 머리에서 밝힌 김국배 선생의 얘기를 들어 보자(오페라, 뮤지컬 악보는 장남이 상경할 때에 가방에 모두 챙겨서 떠났다는 소식을 막내 딸에게서 들었다)

악보3, 제주여중고 제1응원가

 

 

 *김국배 선생이 남긴 민요의 채집을 한 소감과 민요에 대한 감상을 적어 놓았다.
 
 본 곡집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주도 고유의 고전민요 중에서도 대표적인 곡들만을 모은 것이다. 이 곡들은 오랜 옛날부터 누구의 작곡인지도 모르는 대로 제주도민들의 삶의 의욕과 희노애락의 하소연을 안은 채 절실한 리듬을 타고 면면히 흘러 내려 온 도민들이 숨결일 것이다.


 악곡형식에 있어서는 곡이 극히 짧아서 현대악식으로 보아서는 겨우 1부형식이나 2부 형식으로 된 단순한 곡들이다. 여기에 수많은 가사를 붙여 가사를 주로 한 원시적인 짧은 선율이 되풀이 되는 곡들이지만, 他道의 민요곡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설 겨운 南海孤島의 애수성과 島民들의 강력한 의지, 그리고 한 많은 꿈은 수놓은 曲想들임을편자는 신기로운 마음으로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특색 있는 제주도 민요의 채보와 작, 편곡을 시도, 여기에 소개한다.


 작, 편곡에 있어서는 짧은 선율에 좀 더 색채를 가미, 반 고전, 반현대식으로 단장함으로써 주선률을 더욱 효과적으로 장식하려 했으나, 음악적인 호화로움을 드러내고 연주용으로 살려 보려는 의도에서였다. 말하자면 주선률에 비슷한 곡을 組曲(suite)형식에 따라 여러 개의 짧은 구절을 연속적으로 작, 편곡 연결시키고, 원곡의 極致美를 드러내기 위해 전편을 통한 혼성4부를 비롯하여, 단성3부 또는 2부로 편성한 합창곡으로 작편곡한 것이다.


 그리고 민요로서의 순수성을 살기 위해서 화성의 본능적인 불협화 화성을 피하고 부드러운 협화음으로 편곡하였다. 그러므로 민요의 특징인 후렴만은 매회 되풀이하고 각 선율은 전혀 別曲에 別歌詞를 붙여 바꿔서 진행이 되며, 연주자나 감상자에게 잠깐이라도 지루한 느낌을 갖지 않도록 현대음악형식에 벗어난 접속곡 형식으로 짰으므로, 다음에 돌아올 별곡을 기대하는 흥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가사는 이해의 편의와 가창의 보급을 위하여 표준어를 택했는데, 對譯할 적당한 표준어가 없는 어휘(예: ‘각단’, ‘고적’)거나 그대로가 오히려 단어(예; ‘넘엉’)는 제주어로 기입하고 그 곡 말미에 註解했다.
 필자가 이 주 선율을 채보 내지 이 접속곡을 작편곡하고 전편을 완성하는 데는 다년간의 시일이 필요했음을 끝으로 말씀드려 두는 바이다.

 1965. 8. 15
金國培 -

 

 김국배 선생은 기회가 날 때 마다 김영돈 교수와 제주 민요 채집을 위하여 도내 마을 곳곳을 같이 다녔다고 한다. 위에 제시한 악보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14곡이 모두 직접 녹음하고 채보하여 완성이 된 것들이다.(참조 악보)

 

 

2010년 탐라문화제(대회장 강문칠) 제50회는 서귀포 천지연 광장에서 펼쳐진 개막식에서 서귀포 도립합창단은 30여년 이상이 지난 세월동안 잊혀졌던 김국배 선생의 편곡<오돌또기>를 부른 바 있다.

1960년대에 제주에서 음악에 열정을 가지시고 살아간 김국배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살리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김국배 선생이 남긴 12곡은 그 후대에 음악을 하며 살아가는 제주의 음악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현재에도 김국배 선생의 제주에서의 생활에 대한 정신과 혼이 이어지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제주에서 최초로 오페라를 올린 인물로서도 기념비적이지만, 그 정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더 높은 경지에서의 이상과 실천자로서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오페라 ‘백설 공주’, 뮤지컬 ‘장화 홍련전’, ‘춘향전’, ‘콩쥐 팥쥐’, ‘심청전’ 등의 한국 전통 역사 물 중에서 오페라와 뮤지컬을 작곡 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에, 그가 얼마나 한국전통을 생각하고 애정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1960년대의 제주사회 속에서의 종합예술인 오페라와 뮤지컬을 시작하였으나, 면면이 이어가지를 못하고, 40여년 뒤에 비로소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에는 다수의 인원들이 제주 작곡가회를 만들어서(임재규 회장) 창작 작곡 발표회와 뮤지컬과 오페라 등 종합예술의 창작 까지도 시도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 기사 계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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