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의 의미, ‘산이 높아 산정에 서면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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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의 의미, ‘산이 높아 산정에 서면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뜻..
  • 강문칠
  • 승인 2020.11.1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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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칠 문화칼럼(연재4))한라산 속의 음악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

본지 명예문화대기자인 강문칠 선생(작곡가, 음악평론가)이 최근 한라산 속의 음악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 라는 음악으로 본 제주의 역사서로 볼 수 있는 연구서를 내놓았다. 이 연구서는 그동안 제주에는 전무하다 시피한 음악의 역사를 살피고 숨어있는 얘깃거리를 발굴함으로써 제주도 음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이번에 발굴한 내용 중에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제주도에 직접 내려와 제주시에서는 제일극장에서 서귀포시에서는 서귀포관광극장에서 제주시민과 서귀포시민들을 대상으로 직접 애국가를 가르쳤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전까지는 올드랭사인 곡에 애국가를 맞춰 불렀는데 이후 현재의 애국가로 바꿔 부르게 됐다는 얘기도 새로운 내용이다. 제주도의 작곡가이자 퍙론가인 음악가가 조사한 제주도 음악사를 통해 제주도 역사를 새롭게 아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편집자주)

 

(앞에서 계속)

 

한라산(제주) 속의 음악 사회와 노동요의 관계

 

 

(제주도 민요 연구, 상권, 김영돈 저, 출판사 민속원 초판1965, 개정판 2002년)

上記 저서는 제주의 민요(사설)를 채보한 최초의 저서이다. 지은이가 제주도 곳곳을 직접 다니면서(소아마비 증세가 있음) 제보자(唱者)를 직접 만나서 채록한 책이다. 방학과 휴일을 이용하여 제주도 일원에 걸쳐서 수집하는 도중에 괜찮은 전승자들을 만나고 훌륭한 노래를 얻는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면서 채록을 하였다고 한다.

약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제주도 낸의 망을 마을을 직접 답사하며 수집하고 나니 카드 상자가 제법 풍성해 졌다고 한다. 제주도 민요는 여성이 부르는 민요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었다. 제주도는 현무암과 火山灰土로 뒤 덮여 있는 척박한 돌 많은 섬이다.

이 메마르고 비좁기만 한 땅에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농민들에게는 눈물의 역사가 지속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노동요가 쏟아졌다. 근면성은 제주 여성의 표본이며 당연한 삶의 모습이다. 여성의 대부분이 각종 일터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입지적 가난과 눈물의 역사는 이 섬의 민요를 애수와 비통으로 물 들여 놓았다. 분명 낭만과 신비의 섬이지만 제주도는 이 낭만과 신비의 휘장 밑으로 가난이 낳는 한숨과 가슴이 미어지는 통분이 넘친다.

민요는 이처럼 통계숫자 이상으로 가장 정확하게 서민생활을 보여주며, 향토색을 드러낸다.

김영돈 교수의 <제주민요 연구>에 수록해 있는 제주도 민요 중 1,403곡 중에 한라산이라는 단어가 삽입이 된 곡은 13곡에서 발견이 된다. 그다지 많이는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가 하고 疑訝心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민요가 발생하던 시대에는 한라산이라는 존재가 제주도민들에게는 신비함과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존재로 다가 왔던 것은 아닐까?

제주의 민요는 노동요가 대부분이다. 그중에서도 <맷돌노래>, <방아타령>, <해녀노래>, <김매는 노래> 등 이 네가지 민요가 제주도민요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제 제주도 민요 속의 한라산의 이름의 사설을 살펴보자.

맨 처음 등장하는 민요는 노동요 속의 ‘팔자, 한탄의 노래’이다. 208곡 사설은,

(1)‘한로산에 쌩인 눈은/봄철 나민 쳐지주만/ 요내 가심에 쌩인 시름/쳐진 날도 시리야 ᄒᆞᆫ다’(한라산에 쌓인 눈은/봄철 나면 쳐지지만/요내 가슴에 쌓인 시름/쳐질 날도 있으랴 한다)

다음의 사설은 노동요 중에서 맷돌, 방아 노래 중 ‘發散’ 편에서 발견이 된다.

(2)‘ᄒᆞ를 헤원 볼르당 봐도/불를 놀래/수하영 싯져/한락산이 내 집이 뒈민/부를 놀레/ 다 불러 보카’(하루종일 부르다 봐도/부를 노래/수많이 있다/한라산이 내 집이 되면/부를 노래 다 불러 볼까)(745곡). 이어지는 780곡은

(3)‘한로영산/흐르는 물은/폐양도 대동강/연주 지레 간다’(한라영산 흐르는 물은/평안도 대동강 연자매 찧으러 간다). 다음으로는 해녀들의 旅情 편이다. 996곡은

(4)‘한락산 허리엔/낭덜도 하고요/요내몸 가심엔/ᄌᆞᆫ수심 하고나’(한라산 허리엔/나무들도 많고요/요내몸 가슴엔/잔 수심 많구나). 다음은 옛 타령 중에서 오돌또기 편이다. 1,144곡엔,

(5)‘한로산 허리엔/시러미 익은숭 만숭/서귀포 해녀는/바당에 든숭 만숭‘(한라산 허리엔/시로미 익은듯 만듯/서귀포 해녀는 /바다에 든 듯 만 듯). 이어지는 옛 타령 편 이야홍 1,149는

(6)‘한로산 상상봉/노프곡 노픈 봉/백록담이라 ᄒᆞ는는 곳이여’(한라산 상상봉/높고 높은 봉/백록담이라 하는 곳이네). 1,153곡은,

(7)‘ᄀᆞ실엔 감줄 빛/한로산 새 소리/신선의 나라여’(가을엔 감귤 빛/한라산 새 소리/신선의 나라에). 1,157곡은,

(8)‘한로산 들판엔/ᄆᆞᆯ덜이 ᄉᆞᆯ치고’(한라산 들판엔/말들이 살찌고). 예 타령편 이야홍 편이다. 다음으로는 1,163곡으로 산천초목 편에, 1,163곡,

(9)‘돔박꽃은 피엿는디/흰눈은 웨 ᄂᆞ리나/한로산 선네덜이/춤을 추멍 ᄂᆞ려 온다/고량부 삼성혈 ᄎᆞ아가난/가마귄 까옥까옥/소낭만 푸르고나’(동백꽃은 피었는데/흰 눈은 웨 내리나/한라산 선녀들이/춤을 추며 내려 온다/고량부 삼성혈 찾아가니/까마귀는 까옥까옥/소나무만 푸르구나). 이어지는 1,197곡에서는,

(10)‘한강물이 다 술이라도/먹을 놈 읏이민 소용 읏곡/한로산이 다 돈이라도/씰 놈 읏이민 소용 읏다’(한강물이 다 술이라도/먹을 놈 없으면 소용 없고/한라산이 다 돈이라도/쓸놈 없으면 소용 없다). 다음은 동요편이다. <줄놀이 하며> 편이다. 1,258곡 동요 편에는 1,258곡에는,

(11)(중략) ‘어기야 뚱땅 기여들언/한라산에 간 보난/아ᄃᆞᆯ아긴 장기 두곡/ᄄᆞᆯ아긴 노념 헴더라’(얼렁뚱땅 주워먹어/한ㅁ라산에 가 보니/아들아긴 장기도고/딸아긴 놀이하고 있더라). 1,197곡의 사설은,

(12)‘한강물이 다 술이라도/먹을 놈 읏이민 소용 읏곡/한로산이 다 돈이라도/씰놈 읏이민 소용 읏다’(한강 문이 다 술이라도/먹을 놈 없으면 소용 없고/한라산이 다 돈이라도/쓸놈 없으면 소용 없다). 1,338곡은 동요 편으로,

(13)‘꼼짝 꼼짝 고사리 꼼짝/즤주 한라산 고사리 꼼짝’(꼼짝 꼼짝 고사리 꼼짝/제주 한라산 고사리 꼼짝). 동요편 또 다른 학자들이 조선 시대 이전 글에서 얼마나 ‘한라산’을 그려 왔는지를 자세하게 분석을 할 자료를 만나지 못했다.

이상과 같이 김영돈 교수가 채집한 ‘제주도 민요 연구’에서는 총 1,403곡 중 한라산이라 쓰여진 단어가 가용된 민요는 총 13편만이 등장한다. 총 0.009%에 해당할 정도로 미비하게 그 명칭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제주도민들에게 ‘한라산’(漢羅山)은 높은 산으로 인식되어 왔다.

작곡가 강문칠

 

한라산의 의미는 ‘산이 높아 산정에 서면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뜻이며, 해발 1,950m로 남한의 최고봉이면서도 사람들을 가까이하여 친숙함을 느끼게 하는 산이다. 백록담, 탐라계곡, 안덕계곡, 왕관릉, 성판악 등이 유명하다.

1,002년과 1,007년 두 차례 분화한 기록이 남아 있다. 높이는 1,950m로 북위 40° 이남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 산꼭대기의 분화구 부분은 제외하면 경사가 완만한 화산이다. 산꼭대기에는 지름 약 500m인 화구가 있으며, 화구 안에는 호수인 백록담이 있다.

예로부터 한라산은 명산이며, 영산(靈山)이라고 하였다. 지리산, 북한의 금강산과 함께 한라산은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영산이라 칭한다. 제주도민들은 탐라국 시대부터 한라산 백록담 북쪽 기슭에서 천제(天際)로 봉행해 오다가 고려 후기인 고종 40년(1253년) 10월 國泰民安을 기원하는 山神祭로 봉행이 되었다.

1470년 제주목사 이약동에 의하여 2월 正日 부터, 어렵고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면 더욱 정성을 드려서 산신에게 제를 올리고, 국태민안을 빌었다. 숙종 29년(1703년) 당시 이형상 목사는 불교의 힘을 약화시키고 유교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제주도에 있는 수백 개의 당과 절을 파괴해 버린다.

그 후 무교식으로 지내던 한라 산신제는, 1908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지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신령한 한라 산신제를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산천단 마을 주민들이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한라 산신제를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1958년에 제주시에서 주관하는 기우제를 시작으로 오늘 까지 제주도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際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2011년 5월 9일에는 한라산신고선비(漢拏山神古墠碑) 3기와 제단 2식이 제주도 기념물 제66호로 지정이 된다. 한라산신제는 명실공히 제주도의 대표 축제로 정착이 되고 있다.

제주도민들은 가정이나 자신의 미래를 염려해서 한라 산신제를 드리듯이 각 가정 마다 제를 드린다. 한라산을 가지 못한 도민들은 각 가정에서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소원을 빌고 제를 올리곤 하였다.

이러한 풍경은 오늘 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며, 정월 초하루에는 도민들이 위와 같은 처소에서 제를 오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 마을 마다 ‘마을제’라 하여 제주도의 마을들은 모두 마을제를 드리고 있다.

 

(이 기사 계속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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