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금개판’(金蓋板) 이야기..노형동 원주변씨입도조(변세청)묘
상태바
[향토문화] ‘금개판’(金蓋板) 이야기..노형동 원주변씨입도조(변세청)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2.10 23: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금에 대한 일편단심을 노래한 시조 변안열의 '불굴가' 남겨

노형동 원주변씨입도조(변세청)묘

 

原州邊氏濟州入島祖(邊世淸)墓
위치 ;한라대 4거리에서 늘봄방향으로 올라가면 길옆에 있음.
입향시기 ; 1405년(태종 5)
성씨시조 ; 변안열(邊安烈), 입향시조 ; 변세청(邊世淸)

 

노형동_원주변씨입도조묘 비석앞.
노형동_원주변씨입도조묘


함박이굴은 주변의 지세가 특별하지 않고 평범하여 시각적으로 판단할 때 그다지 눈에 띄는 곳은 아니나 이곳에 형기론(形氣論)의 지세 판단으로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복호형(伏虎形)의 교혈(巧穴)이 위치해 있다고 한다.

좌향(坐向)의 위치가 동남쪽으로 좌를 틀고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이곳은 고사모루 동산이 단지 주산(主山)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 풍수에서 말하는 사신사의 외형이 드러나지 않는 곳이다. 다만 왼쪽으로 청룡의 맥세가 휘감은 채 함박이굴의 용세가 백호를 대신하고 있다.

다행히 용세가 물을 만나 기운이 모이는 곳으로 수맥이 묘지를 돌아 서북쪽으로 향해 흘러가기 때문에 소명당의 조건을 이룬다. 이곳은 후손들이 생전에 덕을 쌓아야 하늘이 진혈의 위치를 점지해 준다는 곳이다.

괴혈(怪穴), 또는 교혈은 천장지비로 오로지 덕 있는 자만이 쓸 수 있는 곳이다. 잘못 판단하여 괴혈로 착각하고 쓰면 그 화가 매우 크다고 하는 혈이다.(제주의 오름과 풍수)(김원순씨 자료 인용)


변안열의 묘원주변씨의 시조 변안열은 충숙왕 3년(1334) 심양에서 태어나 약관 18세에 원나라 무과에 장원급제할 만큼 무용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원나라 형부상서로서 공민왕의 왕비 노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입국하여 공민왕 11년 홍건적을 격파하고 목호의 난 때 최영 장군의 휘하로서 제주를 평정했다.

그 뒤 부안, 수원, 해주 등지에서 왜구를 격파한다. 그 후에도 이성계와 함께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쳐 황산대첩을 이룬 뒤 領三司事에 오르고 원주부원군에 봉해지니 곧 원주변씨의 시조가 된다.

한편 변안열은 이성계의 득세로 고려 왕권이 기울자 이색. 조민수 등과 왕실의 부흥을 꾀하다 실패, 죽음을 당했다. 그의 묘는 남양주 용정리에 있다.


“가슴팍 구멍뚫어 동아줄로 마주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감켜지고 쏠릴망정, 임 향한 그 굳은 뜻을 내 뉘라고 굽히랴” 임금에 대한 일편단심을 노래한 이 시조는 변안열의 「불굴가」이다.


제주 입도조 변세청(邊世淸)은 시조 변안열(邊安烈)의 3세 손으로 그는 고려조에서 중령중랑장(中領中郞將)을 지내고 조선조에는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주학교수(州學敎授)를 역임하였다.


조선조 1405년(태종 5)에 변안열은 혁명을 저지하려다 이방원에 의해 참살되자 손자로서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피신하여 제주에 입도하였으며, 제주목 노형동에 정착하여 입도 후 도민 교화에 힘썼다.

제주에 살고 있는 원주변씨는 원주부원군 변안열(邊安烈)의 제3자 변예(邊預)의 후손인 훈련공파중(訓鍊公派中)에 속한 후손들이다.(제주선현지)


이 가문에서 문과에 올라 호조참판을 지낸 변시중(邊是重)을 비롯 承文院注書에 오른 邊聖運, 숱한 일화를 남긴 벽사도찰방 邊聖輔,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을 역임한 邊景祐, 사헌부장령, 호조참의에 오른 邊景鵬, 역시 승정원주서를 지내고 상가리에 서학당을 세워 흥학에 힘쓴 邊景俊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특히 대정현감을 역임한 변경붕은 정조 18년(1794), 이른바 甲寅大凶 때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백성들의 참상을 보다 못하여 조정에 계장을 올리고 구휼미 1만5천석을 지원받아 백성들을 구제하는 치적을 남겼다.(제주선현지)


이곳에 묻힌 변씨(邊氏) 일가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으니 이른바 ‘금개판’(金蓋板) 이야기이다.

약 5백여 년 전 변씨가 처음 제주에 들어와서 제주시 노형동의 베릿가름이란 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 베릿가름이란 곳이 원래 사람이 살지 않던 곳이라 변씨는 새로 집을 짓고 황무지를 갈아 농사를 짓느라 고생이 심했다. 결국 변씨는 얼마 못 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변씨에게는 나이 어린 아들들이 세 명 있었다. 삼형제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지관을 불러 구산(求山)하는 것은 물론이고 안장을 할 일꾼도 빌릴 수 없자, 아버지를 보리짚으로 싸서 지게에 짊어지고 적당한 자리가 있으면 묻으려고 집을 나섰다.

삼형제가 '함박이굴'이란 곳에 이르러 잠시 쉬려고 지게를 내려놓을 때였다. 갑자기 지게끈이 끊어지면서 아버지 시체가 툭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삼형제는 '아, 우리 아버지가 이곳에 묻히고 싶어하는구나. 여기에다 무덤을 만드는 게 좋겠다.' 하고는 땅을 팠다. 그때 마침 근처를 지나던 지관이 이 광경을 보고는, '땅은 좋은 땅인데 금개판을 해야 크게 발복할 터이니 그것이 안타깝구나.' 하고 한탄하였다.

삼형제는 아버지 시체가 들어갈 만큼 구덩이가 파이자 아버지 시체를 구덩이에 넣고 흙을 덮으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아팠다.

그리하여 아버지 시체를 쌌던 보릿대를 골고루 아버지 몸 위에 덮었다. 그때 햇빛이 비치자 보릿대가 빛을 받아 번쩍번쩍 황금빛을 낸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보던 지관은, '인연이 닿은 땅은 어쩔 수 없는 거로구나!' 하면서 무릎을 쳤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보릿대가 곧 금개판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이 묘가 바로 변씨 집안의 입도시조묘로, 과연 지관이 말한 것처럼 그 후 변씨 일가는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제주시,『전통문화의 뿌리』198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