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요충지에 설치, 방호 임무 수행.. 김녕리 김녕방호소(수전소)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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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요충지에 설치, 방호 임무 수행.. 김녕리 김녕방호소(수전소)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2.15 1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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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터의 동쪽 끝으로 속칭‘구렁비낭알’에 그 자취가 남아 있다

김녕리 김녕방호소(수전소) 터

 

위치 ; 김녕리 경노당
유형 ; 방어유적
시대 ; 조선

 

김녕리_김녕방호소터

 

방호소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침입이 예상되는 요충지에 설치하여 방호 임무를 수행하던 군대의 경계 감시소이다. 각종 읍지나 『제주계록』에는 ‘진(鎭)’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방호소에 관해서는 『세종실록』에 “도내 군인이 주둔하는 곳은 본주 동쪽은 김녕·조천관, 서쪽은 도근천·애월·명월이며, 대정현 서쪽은 차귀, 동쪽은 동해이고, 정의현 서쪽은 서귀, 동쪽은 수산 등입니다. 모두 왜구가 정박할 수 있는 요해처로 전에 모두 방호소를 두었습니다. 김녕소의 군인은 마보병 아울러 153명, ……번을 나누어 방수합니다.”라고 씌어 있다.

조선 전기에 모두 9곳에 방호소가 설치되었으나, 성이 축조되지 않아 방어하기가 어려우므로 축성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중종실록』에 의하면, “앞서 설치한 방호소에 각각 육군 1려(旅)를 2번으로 나누고 군관을 보내어 방어하도록 하였습니다. 수산과 차귀 2포는 옛 성을 개수하고 함정과 말뚝을 설치하였습니다. 나머지 7포는 원래 성이 없었으므로 지키는 데 의지할 곳이 없어 매우 허술합니다.”라고 하였다.

즉, 성을 쌓지 않은 방호소 7곳(이 때 김녕방호소에도 성이 없었다)이 있으며, 이들 방군(防軍)은 2교대로 나누어 방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원진의 『탐라지』의‘방호소’조에“방호소에는 아직도 군대가 있는데 바람이 온화할 때엔 특별히 각 방호소에 조방장을 파견하여 변란에 대비한다.”(防護所旅帥猶存 風和時 別遣助防將于各所 以待變)고 하여, 평소에는 여수(旅帥)의 지휘 하에 방수하고, 변란 시에는 본영에서 조방장을 파견했다.


『탐라방영총람』의 기록에 나타난 조선 후기 방호소의 군액을 보면 어느 진이든 방군(防軍)의 군액이 가장 크고, 다음으로 궁인과 시인의 군액이 컸다.

지역별로는 별방진·화북진·차귀진 등의 군액 규모가 컸다. 9진의 군액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으나 김녕방호소는 이설한 뒤 기록이라 군액을 알 수 없다.

김석익의 『탐라기년』에 의하면, 김녕방호소는 중종 때인 1510년 장림 목사가 별방으로 이설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성터의 동쪽 끝으로 속칭‘구렁비낭알’에 그 자취가 남아 있다고 한다.(구좌읍지 5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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