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문의 야생초이야기] 질긴 후대(後代) 사랑, 부들과 그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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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문의 야생초이야기] 질긴 후대(後代) 사랑, 부들과 그 씨앗..
  • 박대문(우리꽃 자생지 탐사 사진가)
  • 승인 2021.02.19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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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 사는 모든 종(種)은 들고 나는 때를 스스로 알고 어긋남이 없습니다.

 

질긴 후대(後代) 사랑, 부들과 그 씨앗

부들 (부들과) 학명 Typha orientalis C.Presl

 

 

어느덧 봄이 오나 봅니다. 입춘 날에 흰 눈이 펑펑 쏟아지긴 했지만, 코끝에 감도는 바람결이 다르고 햇살도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정인보 선생의 시(詩) ‘조춘(早春)’에서처럼 ‘볕발 아래 토담집 고치는 소리’ 들릴 듯한 따사로움에 끌려 산책을 나섰습니다.

칼바람 속에서 빈 하늘에 휘둘리는 능수버들 가지가 애처로워 보이더니만 그럴싸 그러한지 벌써 푸른빛이 감돌아 보입니다. 새해 24절기 중 두 번째 절기 우수(雨水)가 지났습니다. ‘이제 곧 산천초목에 새움이 돋고 개나리, 진달래꽃도 피고 하얀 민들레 솜털 씨앗 날리는 계절이 시작되겠지.’ 하면서 호숫가를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바람결에 날리는 하얀 솜털이 있지 않습니까? “이게 뭔가?” 살펴보니 지난 한여름에 꽃 피워 열매 익힌 딴딴한 부들 열매가 봄바람에 눈 녹듯 풀어지고 그 속의 수많은 솜털 씨앗이 폭죽 통에서 터져 나오듯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풀과 나무는 꽃 피고 열매 맺어 후대를 기약하는 한살이를 끝내고 나서 혹한의 월동기를 겪거나 사라집니다. 그런데 부들은 핫도그(hot dog)처럼 단단해 보이는 씨앗 통을 꽉 움켜쥔 채 혹한의 겨울을 납니다.

겨우내 혹한 속 억센 바람에 사각대며 몸 닳도록 열매를 매달고 있다가 겨울 끝자락, 절기로는 이른 봄에 씨앗 통을 활짝 열어젖혀 품었던 씨앗을 훨훨 떠나보냅니다. 봄을 재촉하는 건조한 바람결에 솜털 씨앗을 둥둥 띄워 더 멀리, 더 넓게 날아서 새 꿈, 새 터전을 찾도록 합니다.

한겨울 추위가 느슨해지고 건조한 하늬바람 쉼 없이 이어지는 때를 맞추느라 마른 줄기에 열매를 겨우내 붙들어 매고 기다렸나 봅니다.

자연 속 수많은 생명체는 각기 나름대로 여건에 순응하며 살아남는 지혜를 터득하고 이를 잘 활용합니다. 수수만년 누대를 견디고 이겨내며 터득한 생존술인 셈입니다. 민들레는 이른 봄에 꽃 피워 열매 맺고 바로 솜털 씨앗을 날려 보냅니다.

부들은 한여름에 꽃 피워 맺은 열매를 한겨울 지나도록 마른 줄기에 붙들어 맵니다. 그러다가 황량한 벌판에 쉼 없이 건조한 하늬바람이 부는 겨울 끝자락에 열매를 터뜨려 솜털 씨앗을 둥둥 띄워 보냅니다. 자연 속에 사는 모든 종(種)은 들고 나는 때를 스스로 알고 어긋남이 없습니다.

한여름의 부들 열매와 겨울 지나 부풀어 터진 열매 모습

 

부들은 전국적으로 늪이나 습지, 호수에 주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요즘에는 도시공원 호수에도 관상용으로 많이 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꽃꽂이의 소재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어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꽃가루는 약재로 쓰입니다.

뿌리만 물속 진흙에 박고 있을 뿐 잎과 꽃줄기는 물 밖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6~7월에 작은 핫도그 모양의 꽃이삭이 달리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은 노란색의 자잘한 꽃이 핍니다. 위에는 수꽃 이삭, 밑에는 암꽃 이삭이 달리며 잎은 얇고 납작한 형태로 길게 자라며 부드럽고 매우 질깁니다.

수꽃은 황색으로 피고 암꽃은 녹색입니다. 꽃가루받이가 완료되면 수꽃은 검은색으로 흔적만 남게 되고 길이 7~10cm의 긴 타원형 암꽃은 적갈색 열매로 변해 핫도그나 소시지처럼 보입니다.

이름은 잎이 부드러워 부들부들하다는 뜻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잎이 바람에 부들부들 떤다고 해서 부들이라 불렀다고도 합니다. 부들은 부들, 큰잎부들, 애기부들, 꼬마부들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부들과 큰잎부들은 핫도그 같은 암꽃과 수꽃 사이에 간격이 없이 서로 붙어 있습니다.

큰잎부들은 잎이 넓습니다. 애기부들과 꼬마부들은 암꽃과 수꽃 부위가 떨어져 있습니다. 애기부들은 암꽃 이삭이 가늘고 길며 꼬마부들은 핫도그 모양의 암꽃 이삭이 꼬마처럼 짜리몽땅합니다.

폭죽 터진 듯 단단한 몸 풀어 헤치고 맑은 햇살 속에 부드러운 바람결 따라 흩어지는 부들의 솜털 씨앗을 보며 생각합니다. 생의 기운이 다 바래버린 잎줄기, 바싹 마른 갈잎과 줄기에 무슨 감(感)이 있어 한겨울까지 씨앗 통을 붙들어 품고 있을까?

아니면 씨앗이 하나의 생체라서 끈질기게 모체(母體)에 붙어 있다가 때가 되니 알아서 스스로 떠나는 것일까? 후대(後代) 사랑인지? 생존본능의 작용〔機作〕인지? 딱히 알 수는 없지만, 부들의 질긴 후대 사랑이라 믿고 싶습니다.

생의 기운이 빠져나간 메마른 잎줄기가 한겨울 찬바람에 사각사각 닳아가면서도 끈질기게 끌어안고 있다가 햇살 맑고 부드러워지자 마음껏 날아가도록 솜털 씨앗을 놓아주는 부들의 후대 사랑이 새삼 가슴에 와닿습니다.

떠나보내는 부들의 마른 줄기와 떠나는 부들 씨앗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후대 사랑이 엷어져 가는 듯한 요즘 우리 사회의 여러 사건이 겹쳐 떠오릅니다. 오직 자신만을 우선시하고 친자식, 조카, 어린 생명을 함부로 취급하는 최근의 사건 소식들이 가슴을 아프게 한 탓입니다.

한낱 식물에 불과한 부들의 질긴 후대 사랑도 이러하거늘 어찌 엄마가 그 어린 생명을 외면할 수 있을까? 생명체의 본능인 모성애(母性愛)를 상실해 가는 호모사피엔스가 이 추세로 간다면 유구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생물 종의 한 종(種)으로서 계속 대(代)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인지?

턱도 없는 이러한 염려가 기우(杞憂)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우수 절기 이른 봄, 사각사각 닳아가고 말라비틀어져 가는 부들 줄기와 마른 줄기를 떠나 하늬바람 타고 둥둥 흩날려 떠나가는 부들 씨앗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햇살 따라 퍼지는 부들의 솜털 씨앗이 포근한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2021. 2월 찬 바람 속에 흩날리는 부들 씨앗)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꽃사랑, 혼이 흔들리는 만남』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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