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제주도민 189명 희생.. 상효동(영천동) 남영호조난자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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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제주도민 189명 희생.. 상효동(영천동) 남영호조난자위령탑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2.21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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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 안전규정 무시한 채 정원과 화물적재량 초과하고 관리 허술로 인한 '인재'

상효동(영천동) 남영호조난자위령탑

 

위치 ; 서귀포시 상효동 1510-1. 법성사와 우리들CC 사이. 아래 사진 탑 뒤에 보이는 건물이 법성사이다.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탑(위령탑)

상효동_남영호희생자묘
상효동_남영호희생자위령탑 전경


남영호침몰사건은 1970년 12월 15일, 서귀포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남영호가 침몰, 선원과 승객 326명(이 중 제주도민 189명)이 희생되고 재산 피해액도 당시 기준으로 2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재난이었다.

사고는 선박 안전규정을 무시한 채 정원과 화물적재량을 초과하고 적재방법이 잘못돼 발생, 관리 허술로 인한 '인재'였다.


남영호 침몰


1970년 12월 14일 오후 4시 부산선적 남영호가 승객 338명(승무원 20명 포함)과 감귤을 가득 싣고 출항했다.

성산항에 잠시 기항후 잔잔한 파도를 가르며 부산으로 향하던 남영호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선체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하더니 빽빽이 쌓여있던 감귤상자가 무너져 내렸다.

바람은 초속 3.7m 서남풍. 선실에서 잠을 자거나 쉬고 있던 승객들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일어나 허둥대기 시작하면서 배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결국 남영호는 복원력을 잃은 채 바다 속으로 서서히 침몰했다.


사고 현장부근을 순시하던 일본 해상 보안순시선 구사사카마루호가 남영호의 참사현장(장소는 교토통신은 대마도 서쪽 1마일 해상, 국가기록원은 전라남도 상일동 동남쪽 28마일 해상, 해양경찰전자신문에는 여천군 소리도 동남방 9마일 해상, 왕실도서관장서각디지털아카이브에는 여수 소리도 근해, 동아일보에는 거문도 동쪽 33마일 등으로 나와 있음)을 확인, 일본 해상보안청에 직접 보고했다.

이에 따라 일본 교도통신이 이를 특종보도했으며 15일 오전 11시에는 국내 라디오 전파를 타고 남영호 침몰참사 소식이 도민들에게 전해졌다.


“승객 270명을 태우고 제주를 떠나 부산으로 가던 정기여객선 남영호가 15일 새벽1시50분께 대마도 서쪽 1마일 해상 북위 34도5분 동경 128도5분 해역에서 전복 침몰돼 6명이 구조되고 나머지는 모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라는 라디오방송 뉴스를 접한 도민들은 깊은 충격에 쌓였다.


사고 뒤처리는 한심하다 못해 국가적 망신까지 불렀다. 침몰 직전 발신한 긴급구조신호(SOS)를 단 한 곳도 수신하지 못하고 일본에서만 희미하게 잡았을 뿐이다. 승객들이 처음 구조된 것은 오전8시께 일본 어선에 의해서다.

일본 측의 무선연락을 받고도 해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 교도통신의 보도가 나온 정오에도 '연락을 받은 바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하던 해경이 출동한 시각은 오후1시. 일본의 순시선 급파보다 네 시간이나 늦었다.(서울경제)


당시 치안국은 처음에는 남영호 침몰사고에 대한 방송보도가 어선조난 사실을 오보한 것이라고 부인했으며 국내통신은 이날 오전 11시40분께에도 침몰여객선의 이름을 월미호(月尾號)로 타전해 혼선을 빚게 하기도 했다.

사고가 발생한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당국은 그때까지 정확한 탑승인원과 사고원인을 확인치 못해 도민들을 실망시켰다. 또한 해군과 해경합동구조대도 15일 밤을 꼬박 새우며 수색작전에 총력을 펼쳤으나 감귤 150상자를 건져내는 데 그쳤다.


남영호에 대한 구조작업은 16일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정부는 부신지방 해운국에 대책본부를 설치하고 해군․공군․해양경찰대를 동원하고 미군항공기와 일본경비정의 도움으로 입체적인 수색작전을 벌였다. 침몰된 남영호의 선체는 16일 오전 11시께 수색중인 해군 UDT에 의해 거문도 동쪽 33마을 해상에서 발견됐다.


당국은 17일 구사일생으로 구조된 승객 12명과 그 간의 수사자료를 토대로 사고의 원인을 상갑판에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으며 적재방법이 잘못돼 배가 기울어질 때 복원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여객정원은 302명이나 승선자는 338명으로 36명이 더 탔으며 64명은 승선자명부에 등재를 않고 승선한 것으로 확인됐다.


부산지검은 선장과 선주, 부산해운국직원 3명 등 5명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남영호가 130톤인데도 250톤으로 선박명부의 내용을 변조했다가 사고후 다시 130톤으로 고친 제주지방해운국 해무계장은 공문서변조혐의로 구속했다.

제주지검은 인검경찰관 4명을 직무유기혐의로 구속하고 서귀포경찰서장을 입건하기도 했다. 박경원 내무부장관과 백선엽 교통장관이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기에 이를 정도로 국민들의 감정과 분노는 좀체 사그러지지 않았다.


이 사고를 계기로 교통부는 선박안전운항지침을 새로 마련, 각 지방해운국에 시달했다. 서귀항은 이 사건후 개항장으로 승격돼 해운행정이 미칠 수 있는 조치가 이뤄지게 됐다.


정원과 적재량을 초과해 사람과 물건을 실은 선사측과 이의 감독을 소홀히 한 기관 때문에 326명이 한겨울 차가운 바다에서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제민일보 2005년 10월 26일 김석주 기자)


서귀포인터넷일간신문에 의하면 서귀포항을 출항했던 남영호는 회항하여 다시 손님(경찰서장의 부인과 포목장수 정씨)을 싣고 갔으며, 저녁(7시25분)에는 성산포항을 경유했는데 화물이 넘쳐 선장(강태수)은 운항을 거부했으나 선박업자가 날씨도 좋고 풍랑도 없으니 봐 달라고 요청했고 선원들도 동조하여 정원(302명)보다 36명을 더 태웠고 화물도 정량(150톤)의 3배 이상(500톤)을 실어서 이미 배가 왼쪽으로 5°정도 기울었지만 적재량을 초과하는 일은 흔했기 때문에 선원들은 개의치 않았으며 출항할 때부터 기우뚱거렸다고 한다.


4시간만에 한국어선에 의해 구조된 생존자 최모씨는 “차가운 바닷물에 몸이 추워오는 것도 견딜 수 없거니와 졸음이 오는 것은 더욱 참기 어려웠다. 술취한 사람이 겨울에 길에서 자다가 동사한다는 말을 생각하니 나도 잠이 들었다가는 영락없이 죽는다는 생각도 들어 몸을 꼬집으며 잠을 쫓았다. 약 3시간이 지나자 손발이 저려오고 일부는 마비되기 시작했으나 육지나 배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보아도 날이 샐 기척도 없었다.” 부산에 사는 아들을 보겠다는 집념 하나로 고통을 버텨낸 최씨는 구조되었다고 동아일보는 전했다. (해양경찰전자신문)


하도리 해녀로 농사일까지 홀로 하던 이옥윤씨(당시 36세)는 사는 게 힘들어 6살 난 딸과 함께 남영호를 탔다. 부산에서 새 터전을 잡고 작은 가게라도 낼 생각에 3등 객실에서 딸을 품어 안은 이씨는 쉽게 잠이 오지 않았던 때문인지 침몰 순간 딸을 안고 얼른 탈출할 수 있었다.

14시간 동안 바다에 떠돌던 이옥윤씨는 수색 헬기에 포착돼 ‘엉겹결에 판자를 움켜잡고’라는 제목과 사진이 사고 발생 이틀 후 주요 일간지에 보도됐다.

“운이 좋았는지 판자처럼 생긴 구명대를 잡았지. 딸은 판자 위에 엎드리게 하고…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판자는 뒤집어 지고 딸을 잃고 말았어.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크리스마스와 양력 설을 앞두고 감귤을 산 상인들이 많이 타서 복도에도 감귤상자가 꽉 찼는데 배가 침몰할 당시 바다 주위에는 감귤과 나무상자가 떠 다녔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옥윤씨는 맨 마지막으로 우리 어선에 의해 구조됐다.(제주일보 2007년 11월 5일) 해양경찰대는 701함 등 경비함정 4척을 현장에 파견, 실종자 수색작업 끝에 사체 9구를 인양하여 서귀포에 운구하였다.(해양경찰전자신문)


최씨․이씨처럼 구조된 사람은 12명뿐이었으며 이 중 8명은 일본 어선에 의해 구조됐다. 그 중에는 선장 강씨와 통신사 김모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구조 당시 모두들 실신 직전 상태였다.

시신도 300여구는 찾지 못했다. 뒤늦게 밝혀진 사실 중 놀라운 것은 선장과 기관장 등 6명이 무자격자였으며 선원명부에 등재되지 않은 선원들이 배를 탔다는 것이다.(서귀포인터넷일간신문 2010년 12월 9일)

해양경찰과 경남경찰국 합동수사반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힌 책임을 물어 당시 남영호 선주, 선장, 통신사를 구속하여 부산지검에 송치하였다.(해양경찰전자신문)


선박검사를 맡았던 경찰관 4명은 직무유기로 구속됐고,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한 치안당국에 비판이 쏟아졌으나 치안당국은 SOS 수신을 받지 못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당시 구조신호를 받지 않은 순경도 직무유기가 인정됐다.(서귀포인터넷일간신문 2010년 12월 9일) '쌍고동에 허공 실어 침몰된 남영호야'라는 가사가 들어간 가요 '밤 항구 연락선'조차 국가 위신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였다.(서울경제)


위령탑이 세워졌다. 남영호 위령탑은 배 침몰로 인한 326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남영호 조난 수습대책위가 1971년 3월 30일 서귀포항에 세운 것이다.

제주신문 1971년 7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이승택 도지사는 위령탑 제막식에서 “슬픈 탑으로 남기지 말고 슬픔을 극복하고 지성으로 바다를 다스려 힘차게 전진하는 탑으로 남겨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원래 서귀포항에 건립된 탑은 항만 확장으로 인해 현재 위치로 1982년 9월에 옮겨졌다. 당시 서귀포시 주요 인사들이 “서귀포항을 관광미항으로 조성하는 데, 참사라는 역사적 사실이 혐오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위령탑을 바다와도 한참 거리가 먼 중산간 지역에 옮기게 됐다.

묘역은 법성사와 우리들리조트 골프장 사이에 끼어 있다. 법성사 앞에서 골프장 쪽으로 휴경지를 가로질러 가야 쉽게 갈 수 있다.

2006년 조성된 골프장은 공동묘지 진입로를 막고 별도 보상도 없이 지었다. 길이 따로 나 있거나 안내표지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입구에는 ‘남영호 조난자 공동묘지’라는 녹슨 간판이 있다. 이곳에는 무연분묘 14기를 포함한 무덤 17기, 비석 3기가 안치됐다. 꽃다운 나이에 숨져, ‘영혼결혼식’을 올린다는 내용의 비석도 있다.


남영호 사건 유족들은 지난 2005년까지는 유족들이 사고 당시 선주로부터 받은 피해보상금 300만원으로 벌초를 했다. 대부분 무연분묘라서 친족도 아니지만 제 조상으로 여기며 관리했다.

유족들이 나이가 들고 일부는 세상을 뜨면서 현재 김동일 씨만이 이곳을 외롭게 지키고 있다. 대부분 고령이 된 유족들은 5년 전부터 묘지와 탑을 서귀포시가 관리해 줄 것을 줄곧 요구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서귀포시는 유족 4명의 명의로 소유된 공동묘지를 행정이 관리할 법적 근거가 없고 명분이 부족해 난감한 입장을 드러냈다.

한편 사회복지시설 어울림터(원장 조인석)의 주최로 원혼들을 애도하는 합동제사를 지난 15년간 계속 치러 왔다.(서귀포인터넷일간신문 2008년 10월 2일, 12월 16일) 필자도 2011년 2월 23일 조인석씨의 안내를 받아 현장을 답사했다.


제주신문은 남영호 참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남영호 희생자 조위금품 접수를 하는 등 유가족 돕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이 뉴스를 전하던 라디오(KBS인지 MBC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성 아나운서가 사망자 명단을 읽다가 끝내는 울음을 터뜨렸었다.


서귀포시와 조난자추모위원회는 2014년 2월 희생자 유족을 찾기 시작했다.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새로운 위령탑을 건립하고 매년 위령제를 거행하기 위해서 유족들의 의견을 듣겠다는 취지이다.(제주일보 140217)


※제주일보(140217)에는 사망자가 323명이라고 되어 있음.

《작성 110224, 보완 1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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