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사방 빼어난 경관 피곤함 잊게 하네..상효동(영천동) 영천관(靈泉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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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사방 빼어난 경관 피곤함 잊게 하네..상효동(영천동) 영천관(靈泉館)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2.2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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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내 관아 유적 중 독특한 역할과 기능 수행.. 발굴과 복원 필요성 강조되는 유적

상효동(영천동) 영천관(靈泉館)터

 

위치 : 상효동 1076번지.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 정문에서 맞은편 다리(상효교) 서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5분 정도만 내려가면 하천 건너 동쪽으로 영천오름이 나타나는데, 바로 그 아래 내의 서쪽이 영천관 터이다.
시대 ; 조선
유형 ; 관아 터

상효동_영천관기와

 

상효동_영천관터

 

영천관은 서귀포 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세워진 관아로서 지방관들이 정의현과 대정현을 왕래할 때와 그리고 목장의 목마들을 점검할 때 사용하였던 숙소이다.

1466년 당시 절제사였던 이유의(李由義)가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역원(驛院)이 없는 까닭에 영천천(靈泉川, 또는 학림천鶴林川) 서쪽에 영천관 2동을 세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매년 춘추에 점마할 때 병마절도사 및 현감 기타 중앙요로의 출장객들이 머무르도록 하였었고, 사철 풍류객들이 그치지 않아 기생들이 이들을 영접하였다 한다.

또 이 지역은 조선 세조13년(서기1468) 국유목장 제9소장으로 지정되어 중앙 마정사(馬政司)가 업무를 관장하는 직사점마소(直舍點馬所)가 설치된 곳이었다.

이 마을 상동과 하동을 연결하는 다리인 상효교(上孝橋)의 원래 이름은 직사교(直舍橋)였으며, 서기1880년까지 직사촌(直舍村 지금의 학림동 일대)이 있었던 점 등이 그 근거라고 할 수 있다.(서귀포교육청, 설촌유래 13-14쪽)


탐라지(1653년간)에는 영천관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고 되어 있는 점으로 미뤄, 영천관은 약 180년 가량 존치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영천관은 상효동 영천오름 서쪽에 영천천을 접하고 있고, 주변 풍광이 매우 뛰어나 나그네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또한 동쪽에는 영천사가 있고 하천 아래에는 기연(妓淵.여기소)이 있어,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정의현을 영관관으로 옮기자는 기사가 나온다.


〈제주 목사 김흠조(金欽祖)가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 …前略… 신이 다시 지금의 성 건치(建置)한 연유를 찾아보건대, 정의는 반드시 수산방호소(水山防護所)가 요해지(要害地)임을 생각한 것이고, 대정은 반드시 차귀방호소(遮歸防護所)가 서로 구원할 수 있음을 생각한 것으로서, 이쪽과 저쪽이 서로 원조하게 하려 한 것입니다.

전성(全盛)할 시기에 있어서는 민중과 물산이 많고 군졸(軍卒)들이 정예하여 믿을 데가 있었지만, 지금은 잔약하고 피폐함이 날로 심해져, 두 고을의 수백 리 땅이 모두 황무지가 되었고, 지난날에는 군액(軍額)이 6천여 명이었지만 지난해의 군전(軍籍) 개정 때는 겨우 4천 명이었으니, 군졸들이 날로 감소되어 쇠약해졌음이 이러합니다.


신의 생각에, 정의에서 서쪽으로 50리 가량에 있는 영천관(靈泉館)이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이어서, 언제나 왕래할 때 쉬고 자고 하는 곳이 되고 있는데, 형세(形勢)로 말한다면, 영천관의 동헌(東軒)은 깊고 험악한 골짜기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었으며, 물이 절벽을 둘러싸고 겹친 봉우리들이 높다랗게 동남쪽을 막고 있는데다, 서귀소(西歸所)와는 겨우 10리 거리여서 바다를 바라보기가 매우 편리하므로 적(賊)들이 엿볼 수 없게 되어 있으니, 이는 참으로 거점(據點)으로 삼을 만한 요지이고 하늘이 마련한 좋은 자리이며, 인사(人事)로 말을 한다면, 민간의 주거와 전답(田畓)이 모두 동남쪽에 있어 농사짓기가 매우 편리하고, 만일 진(鎭)을 여기로 옮긴다면 절반은 험악한 지형을 이용하고 절반만 성을 쌓게 되는데, 물도 있고 사람도 있으므로 보존하여 지키기가 어렵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비록 이사(移徙)하고 집 짓고 하는 소소한 폐단이 있기는 하지만 선편(船便)의 운반이 편리하고, 석재(石材)와 목재(木材)는 바로 앞에서도 채취(採取)할 수 있어 공력을 들일 것이 없습니다. 이미 있는 관사(館舍)는 다시 지을 것이 없고, 새로 지어야 할 것은 단지 숙고(稤庫)·관청(官廳)·공해(公廨)뿐이어서, 옮겨 설치하기 편리함이 이러합니다.

만일 처음에 잘못 설치한 것에 구애되어, 한갓 사람도 없고 물도 없는 자리를 지키느라, 단지 명색만 있는 3여(旅)의 군사로는 자체를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힘을 나누어 수산(水山)을 구원하러 가겠습니까?

혹시 성을 포위하는 변이 있게 된다면, 창졸간(倉卒間)에 비록 겹쳐 들어가게 하려 하더라도, 먼 마을의 우매한 민중들이 소리를 듣고서 놀라 흩어질 것인데, 누가 살기를 잊어버리고 자진해서 죽을 데로 가려 하겠습니까? 군졸들은 또한 주림과 목마름을 견디기 어렵게 될 것이니, 진장(鎭將)들이 아무리 용맹스럽다 하더라도 어찌 혼자 감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수산소(水山所)는 성 안이 협착하여 단지 1여(旅)의 군중을 용납할 만한데, 안에는 군수(軍需)를 저축한 것이 없고 밖에는 겹쳐서 들여보낼 민중이 없으니, 본래부터 장구하게 굳건히 지킬 계획으로 설치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전조(前朝)의 말년이나 아조(我朝)의 초기처럼 왜적(倭賊)들이 침범해와 정의에서 대정의 죽도(竹島)까지 함선(艦船)을 늘어놓게 된다면, 두 고을 수백 리의 땅이 모두 왜적들의 소굴이 될 것인데, 어떻게 감당해 낼 것입니까?

진(鎭)을 영천(靈泉)으로 옮기면 수산(水山)이 비록 멀어지기는 해도, 사세가 두 군데 다 온전할 수 있으니, 1여(旅)는 그대로 옛 성에 머물러 있으며 적(賊)들의 변동을 망보다가 좌우로 구원하도록 하고, 1여는 서귀소(西歸所)의 1여와 합작하여 본진(本鎭)을 방어하면서 강력한 대비를 하도록 하며, 만일 동쪽과 서쪽에 의외의 변이 있게 될 때는, 1여는 본진에 남아 마을 민중들과 합력하여 성을 지키게 하고, 2여는 드나들면서 분주하게 구원하도록 한다면 수산소(水山所)를 또한 보존하게 될 것이니, 어찌 장구하고 안전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또 대정에 일이 생기면 구원하러 가기가 또한 편리할 것입니다.


대정은 본래 3여(旅)의 군사로 지켰는데, 본래의 군액(軍額)보다 빈 것이 많습니다. 단지 3분의 1만 남았으니, 세 군데를 분담하여 방수하려면 서로 구원하게 될 만한 형편이 만무할 것이고, 만일 불의의 변을 만난다면 비록 3여의 군사를 모으더라도 사람이 없는 광활한 성을 반드시 보존하여 지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성 안에 본래부터 수원(水源)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염려없는 영구한 진을 만든 계책이겠습니까? 고을에서 남쪽으로 5리 가량에 파고산(把古山)이란 독산(獨山)이 솟아 있고, 그 아래 원천이 있어 끊임없이 솟아나니, 곧 지금의 물 길러오는 데입니다.

삼면(三面)이 모두 험준한 절벽이어서 인적(人跡)이 닿지 못하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요새(要塞)인데, 동쪽과 서쪽에 간혹 터진 데가 있지만 양쪽의 거리가 겨우 20여 보(步)이니, 만일 연결해서 쌓아 천형으로 된 데와 접속시킨다면, 삼면의 수비는 자연히 군사의 힘을 빌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유독 남쪽이 펀펀하게 터져 바다 어귀와의 거리가 10여 리인데, 몇 걸음 동안에 뒷등성이로 올라가면, 먼 바다의 해적(海賊)들 동태를 앉아서 바라볼 수 있어 망보기가 매우 편리하니, 만일 진을 이리 옮긴다면, 단지 1면만 지키게 되어 비록 군사가 적더라도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하여 배치하는 일은, 5리 거리의 지역이라, 이전의 재목을 실어다가 전대로 배치만 하면 되어, 공력이 저절로 덜리므로 일을 해 가기가 매우 쉽습니다. 또한 차귀소(遮歸所)와도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이상은 두 고을의 진(鎭)을 옮겨야 하는 이해 관계인데, 지자(智者)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後略…〉(조선왕조실록 중종20년(1525년) 9월 28일 기사)


이는 그만큼 서귀진이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나타낸다. 물도 있고 백성도 있어 지키기에 아주 편리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만약 정의현청을 영천관으로 옮기게 되면 , 제주목과 너무 거리가 멀어 방비가 어렵다 하여 계획을 반대하여 실현되지는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보면 〈삼공이 의논드리기를, “제주 목사 김흠조(金欽祖)의 상소에 말한 정의(旌義)와 대정(大靜) 등의 고을을 옮겨 설치하는 일은, 친히 형세(形勢)를 본 사람들과 의논해 보니, 정의에서 우도(牛島)와 대정에서 가을파지도(加乙波知島)와의 거리가 모두 멀지 않다고 했습니다.

당초 고을을 설치할 때 반드시 두 섬과 가깝게 한 것은 서로 보호하게 하려 한 것입니다. 이번에 대정을 파고산(把古山) 아래로 옮기려 하는 일은, 이전의 고을과 거리가 겨우 5리이므로 재목과 기와를 운반하기가 편리할 것이고, 그 안에 원천(源泉)도 있으므로 옮기는 것이 진실로 합당했습니다.

정의는 그렇지 않아 영천관(靈泉館)으로 옮기려고 하면, 이전의 고을과 거리가 50여 리나 되어 운반해 가기에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고, 또한 우도를 보호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 제주와의 거리가 네 참의 길이나 되어, 만에 하나라도 변이 있게 된다면 서로 구원할 수 없게 됩니다.

하물며 한때에 아울러 옮기면 반드시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니, 이번에 대정만 옮기고 정의는 뒷날 서울의 조관(朝官)들이 왕래하게 될 때를 기다려 민정(民情)과 형세(形勢)를 잘 살펴 보도록 한 다음에 옮기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중종20년(1525 을유/명 嘉靖4년) 10월 7일(임진) 3번째 기사)


이에 앞서 1470년 목사 이약동(李約東)은 영천관에 머물면서 다음의 한수를 남겼다.


영천관(靈泉館)


“영천 형승이 유달리 맑아 깨끗하니
사방의 빼어난 경관은 피곤함을 잊게 하네


성판악과 한라 능선에 눈은 내려 쌓이는데
유감과 산귤 잎은 더욱 더 푸르고나


하늘은 낮고 바다는 넓어 땅 없는 듯 외로운데
개 짖고 새벽닭 우니 사람 있음을 알았네


피곤한 여정으로 님 계신 곳 물어 가는데
깨고나니 꿈이어라 슬픔만 더할 뿐”(다음지식)


영천관과 영천사 자리에는 이설이 있다. 1601년 안무어사로 제주에 파견 되었던 김상헌이 남긴 남사록에는 “서쪽 언덕에 영천사가 있고, 동쪽 언덕에는 영천관이 있는데(모두 폐사.폐관되었다.) 목사 이유의가 세운 것이다”라고 되어 있어 장소가 정반대로 기록됐다.


현재는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으며 주변에 기와조각들이 널려있다. 제주도내 관아 유적 중에서도 독특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했던 곳이라는 점에서 발굴과 복원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유적이다.(http://cafe.daum.net/jc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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