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제주성의 남문인 정원루(定遠樓)..삼도2동 제주목 남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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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제주성의 남문인 정원루(定遠樓)..삼도2동 제주목 남문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2.28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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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성 밖에는 지역의 토산물을 파는 상인들이 작은 시장을 형성했다

삼도2동 제주목남문터

 

위치 ; 삼도2동 184번지
시대 ; 조선
유형 ; 방어유적(성)

삼도2동_남문옛사진.
삼도2동_제주성남문성벽터

 


제주성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수서(隨書)에는 백제 위덕왕 35년(588)에 수나라 전함 한 척이 제주에 표착한 뒤 백제를 거쳐 본국으로 송환되었던 기록이 남아있다.

그 기사에 “탐라국 읍(邑)에 성이 있었다”라고 했다. 대략 1400여년 전 이미 읍성이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고려 숙종10년(1105) 탐라군이 설치되면서도 축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읍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탐라국 시대의 성곽을 활용하여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는 삼별초군의 별장 이문경이 성문을 열어 통과하고자 하였으나 성주(星主) 고인단이 불응, 성을 고수함으로써 성안의 피해를 모면했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태종 11년(1411) 읍성을 수축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당시 성의 규모는 병문천과 가락천 사이에 쌓아졌다. 명종 10년(1555) 왜선 40여척이 침입한 뒤 곽흘 목사가 동성을 산지천 밖으로 넓혔고, 이 때 동·서쪽에 각 1문을, 남쪽에 2문을 두었다.

명종20년(1565) 곽흘 목사가 성안에 우물이 없어 백성들이 겪는 평상시의 식수난과 변란 때의 급수 문제, 방어의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동성을 산지천 밖으로 물려 쌓을 때에도 남문에는 문이 2개였다고 한다.

선조32년(1599) 목사 성윤문이 대대적인 제주성 개·보수에 나서는데 성굽을 5척이나 확장하고 성 높이도 11척에서 13척으로 높여 쌓았다. 이 때 두 개였던 남문을 하나 없애는 동시에 문마다 초루를 만들었다.

즉, 제주성의 동문인 제중루(濟衆樓; 뒤에 延祥樓로 개칭), 서문인 백호루(白虎樓; 뒤에 鎭西樓로 개칭), 남문인 정원루(定遠樓)가 그것이다. 성윤문 목사는 이와 함께 산지천·가락천으로 나뉘어진 동·서를 잇기 위해 남쪽에 남수각을, 북쪽에 홍예교를 축조하기도 했다.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위원회 김익수 위원에 따르면 남문성 밖에는 지역의 토산물을 파는 상인들이 작은 시장을 형성했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약초와 열매, 장작이나 숯 등을 팔았다. 이는 한라산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문가에는 철물이나 육지부 등에서 들여오는 물품들이, 그리고 서문 밖에는 육고기를 파는 푸줏간과 함께 숯과 장작 등의 땔감, 어물류 등을 사고 파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룸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한라일보 2009년 3월 2일)

우리가 지금까지도 ‘남문통’, ‘남문로타리’ 등으로 부르며 ‘남문’이란 말을 계속 쓰고 있는데 그러면 남문이 있었던 자리는 정확히 어디일까?

2006년 2월 9일 제민일보는 남문로터리 북서쪽에서 제주성 남문의 옹성터로 추정되는 성터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제주성터가 발견된 곳은 남문로터리 북서쪽 첫번째 골목 공사현장. 새 건물 신축을 위해 기존 건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성의 하부구조로 추정되는 암석과 담장 구조물들이 발견됐으며, 이는 공사과정에서 다소 훼손된 상태였다. 현장을 찾은 제주도문화재위원들은 일단 제주성의 일부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홍순만 문화재위원은 “해방이후 무너진 동쪽과 달리 서쪽 제주성 일대는 1924년부터 일제에 의해 허물어지기 시작해 흔적 찾기가 여의치 않다”며 “그러나 복원된 동측 제주성 등 기존 제주성터와의 연관성, 지적도 등을 근거로 볼 때 제주성의 일부인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문화재위원에 의해 제주성터라는 것은 확인했으나 이번 발견된 제주성터가 남문을 가리던 옹성의 일부인지 치성의 일부인지 정확한 구조에 대해서는 향후 현장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관계자는 “성곽의 일부인 것은 확실하지만 옹성인지 치성인지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며 “조사기관에 의뢰해 정확한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그에 따라 복원할지, 허가할지 등 순차적인 대처가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재 남문비가 세워진 곳을 기준으로, 이번 발견된 곳이 옹성터라는 데 우선 합의를 이끌어낸 상황이다.

제주시 관계자는 “현재 성터가 발견된 공사현장은 신축에 따른 허가는 이뤄지지 않았으며, 이번 성터 발견으로 인해 현장보존요청을 해놓은 상태다”며 “조만간 다시 문화재위원회를 개최해 향후 계획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안내표석을 세우는 조건으로 건축허가는 이루어졌고 새로 지어진 건물은 삼도쉐르빌이다. 삼도쉐르빌 뒤편으로 구 인천문화당 좁은 길로 들어가면 구 인천문화당 맞은편에 표지석이 있다.

정원루. “이곳은 제주성 남문이 있었던 터다. 1512년 중종 7년 목사 김석철이 성을 개축하면서 이곳에 문루를 세워 정원루라고 하였다.

1705년(숙종31년) 1780년(정조4) 등 여러 차례 중수되어 3대 성문 가운데 가장 오래 남아 있었으나 1918년에 이르러 헐리었다.”라고 적혀 있다.

1599년까지 있었던 또 하나의 남문은 어디에 있었을까? 아쉽게도 이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위 사진은 1900년대 초의 남문 모습, 아래 사진은 성벽 위에 지어졌다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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