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동성 위 將臺 運籌堂을 세웠다.. 건입동 제주목 동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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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동성 위 將臺 運籌堂을 세웠다.. 건입동 제주목 동문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3.02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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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읍성은 동쪽의 산지천, 서쪽의 병문천을 천연의 해자(垓字)로 삼아 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응

건입동 제주목동문터

 

위치 ; 제주시 건입동 1123-11, 1177번지
시대 : 조선

제주성 동문밖
건입동_제주성 동문 연상루터


제주성은 고려 숙종10년(1105)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축성되었다. 당시의 읍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탐라국 시대의 성곽을 활용하여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유사시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읍성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성곽의 입지적 조건으로 자연적 지형이 매우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태종11년(1411) 정월에 제주성 정비를 명하였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성 둘레는 910보라 하였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석축으로 둘레 4,394척, 높이 11척이라 하였다.

이는 동쪽 산지천과 서쪽 병문천 사이를 축성한 규모를 말한 것으로, 제주읍성은 본래 동쪽의 산지천, 서쪽의 병문천을 천연의 해자(垓字)로 삼아 그 사이에 성을 쌓아서 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이 때 성내에는 우물이 없고 嘉樂泉이나 산지천은 모두 성 밖에 있었다. 따라서 성 안에 우물이 없어 백성들이 큰 불편을 느끼고 있었다.


명종10년(1555)에는 을묘왜변 때에 영암에서 패퇴한 왜선 40여척에서 1000여명의 왜구가 화북포에 정박하여 상륙하고,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이를 격퇴하여 왜병을 생포하고 적선 5척을 捕捉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때는 동쪽 성벽이 산지천 서쪽이라 왜구들은 현재의 제주동초등학교나 일도교 정도에 진을 치고 제주읍성을 공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세에 몰려 있던 김수문 목사는 70명의 별동대를 성밖으로 출전시켰다. 이 별동대를 이끌었던 김성조(金成祖)를 비롯한 4명의 장수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내었고 왜구들은 물러났다.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명종조 7월 6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주목사 김수문이 장계하기를 “6월 27일에 왜적이 무려 천여명이 하륙하여 진을 만들었습니다. 신이 효용군(驍勇軍) 70인을 골라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입하여 거리가 30보 정도였는데 왜인은 전(箭)에 맞는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퇴병하지 않으므로 정로위(定虜衛) 金直孫과 갑사(甲士) 金成祖·李希俊, 보인(保人) 文時鳳 등 4인이 말을 타고 돌격하니 적군이 궤산(潰散)하였습니다. 한 왜장이 있었는데 홍모(紅毛) 투구를 썼습니다. 자기가 활 잘 쏘는 것을 믿고 혼자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정병(正兵) 金夢根이 그의 등을 쏘아 맞히니 곧 엎드려 쓰러졌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승세를 타서 추격하여 참획한 무리가 심히 많았습니다.” 하였다.(조선왕조실록중 탐라록 340쪽)


그 후 10년이 지난 1565년 곽흘 목사는 그 때의 교훈을 살려 성 동쪽 벽을 더욱 밖으로 확장하였다. 현재의 동문파출소에서 기상대를 잇는 선이다. 산지천을 성안에 끌어들임으로써 산짓물과 가락쿳물 등의 생활용수를 보다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선조32년(1599) 成允文 목사가 부임하여 성 굽을 5척이나 늘리고 높이를 13척으로 높이는 대수축 공사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동·서·남문을 重修하여 좌우로 군영을 만들고 격대 27개 중 21개는 포루를 만들어 기와로 덮고, 남수구 위에는 制夷閣을 지으니 이를 남수각이라 통칭하였다.


정조 4년(1780) 金永緩 목사는 큰 비에 산지천이 범람하여 민가에 피해가 많으므로 산지천 서쪽 바위로 間城을 축성하니 길이 551보, 높이는 9척이었다.

그리고 북쪽 간성에 受福門을 세워 光濟橋와 연결하고, 남쪽 간성에는 蘇民門을 설치하였는데 이 문은 헌종13년(1847) 李宜植 목사가 중인문으로 개칭하였다.


李元鎭의 <탐라지>에 의하면 둘레 5,489척, 높이 11척에 격대 27개, 타첩 404개가 마련되고, 동·서·남문이 갖추어졌으며, 동쪽의 산지천에 남·북으로 수구문을 설치하고 동성 위에서 將臺인 運籌堂을 세웠다고 한다.

1925년까지 이러한 상태가 계속 보존되다가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제주항을 개발하면서 성벽을 헐어 바다를 매립하는 골재로 투석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곳은 오현단 부근 격대 3개와 성벽 길이 85.1m, 높이 3.6∼4.3m 그리고 기상청 아래 북성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우석목2로 길의 모양으로 동문 옹성 터를 확인할 수 있다. 1900년대에 찍은 위 사진에서는 4기의 돌할으방과 함께 미석이 뚜렷하고 미석 위에 길쭉한 반원형의 여장이 남아 있다. 동문파출소가 있는 동네를 지금도 ‘성굽’이라 부르고 있다.

동문의 문루를 제중루(濟衆樓) 나중에는 연상루(延祥樓)라 하였다. 『증보탐라지』에 의하면 “연상루의 옛 이름은 제중루니 읍성의 동성문이다. 1666년 병오 현종 7년에 목사 홍우량(洪宇亮)이 증수하였고, 1808년 무진 순조 8년 목사 한정운(韓鼎運)이 증수하였다. 1856년 병진 철종 7년에 목사 채동건(蔡東健)이 다시 증수하였다”라고 적혀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황경수)


동문로9길 입구에 돌할으방이 세워져 있던 자리가 남아 있다. 1963년에 이루어진 현용준의 조사에 의하면, 원 위치인 구 제주성 동문 앞의 돌하르방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현용준의 조사에 따라 당시의 위치를 보면 성문이 있었던 자리 바깥으로 길이 S자형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고부라진 두 개의 굽이에 각각 2조씩 8기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성문의 위치에서 약 35m 떨어진 곳에서 길이 한 번 굽이돌고, 그 길 굽이의 좌우에 2기씩 돌하르방이 마주 세워져 있고, 다시 약 50m 거리에서 길이 굽이도는데, 이 굽이의 좌우에 2기씩 마주 세워져 있다.

이곳이 동문 옹성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이곳에서 북서 방향으로 내려가면 우석목2로이며 우석목2로는 휘어진 것으로 보아 옹성을 헐어내고 그 자리를 길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 큰 길 맞은편 ‘청은환타지아’ 건물 자리 옆에 제주성 동문 연상루터 표석이 있다.

성벽은 남쪽으로는 동문파출소 쪽으로 북쪽으로는 기상청 쪽으로 연결되었었다. 북성은 기상대에서 내려오는 계단 바깥 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문 밖에 있던 8기의 돌할으방은 1963년까지는 원위치에 있었으나 그 이후 1968년까지 사이에 시청, KBS방송국, 제주대학교, 국립민속박물관에 각각 2기씩 옮겨졌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강경희)

위 사진은 1900년대초 동문 밖 돌할으방의 모습, 여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래 사진은 동문 연상루 터
《작성 110328, 보완 13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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