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제주민들 고단한 삶의 유산.. 환해장성1구역(변형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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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제주민들 고단한 삶의 유산.. 환해장성1구역(변형복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3.08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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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해장성은 고려 조정이 영암부사 김수와 장군 고여림을 제주에 보내 삼별초의 제주 진입 막기 위해 쌓아

동복리 환해장성1구역(변형복원)

 

제주도 지방기념물 제49-6호
위치 ; 구좌읍 동복리 마을 동쪽 해안도로변
유형 ; 방어유적(城)
시대 ; 고려~조선

동복리_환해장성東

 

동복리_환해장성복원 바깥

 

환해장성은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방어시설로, 처음에는 1270년 고려 조정에서 영암부사 김수와 장군 고여림을 제주에 보내 삼별초의 제주 진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이후 삼별초에 패한 뒤에는 삼별초가 관군을 방어하기 위해 계속 쌓았고, 조선조에 와서는 왜구를 막기 위해 여러 차례 증축, 보수, 혹은 신축되었다. 이때는 왜구와 이양선의 출몰이 잦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선후기 헌종11년(1845)에는 황당선(영국 사마랑호)이 소섬 앞 바다에 정박하여 연안을 측량하므로 당시 목사 권직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에 대비하였다.

이 때 대정현 사계리 사람 유명록이
"저 양이와 힘으로써 정면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싸우지 않고 파괴할 수는 있습니다. 소인에게 화약을 주시면 배에 몰래 싣고 접근하여 화약에 불을 놓아 양이와 함께 죽겠습니다."


하니 권직 목사가 그 충의심에 감탄하여 우대하고 화약을 준비하고 날을 정하여 시행하려던 중 영국 배는 홀연히 돛을 달아 동북쪽으로 떠나가 버렸다.(제주통사 181-182쪽)


권직 목사는 그 해 겨울 도민을 총동원하여 환해장성을 크게 수축하였으므로, 지금 남아 있는 성들은 아마 이때에 수축했던 성으로 추정된다.

환해장성은 제주의 현무암을 잘 이용해 해안가 취약 지대를 따라 해안 방어선이 만들어졌으며 지금도 해안 방어시설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 당시에는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제주민들의 고단한 삶을 느끼게 하는 유산이기도 하다.


김상헌의 남사록에서는 환해장성에 대해 “바닷가 일대에는 또 돌로 성을 쌓았는데, 연달아 이어지며 끊어지지 않는다. 섬을 돌아가며 곳곳이 다 그러하다. 이것은 탐라 때에 쌓은 만리장성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환해장성이라는 명칭은 김석익이 1918년에 편찬한 『탐라기년』에 처음 나온다.


동복리 환해장성은 마을 동쪽 해안 김녕리와의 경계선 인접까지 남아 있다. 동복환해장성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해안도로 등의 개설 등으로 거의 훼손되었으며 지형은 대체로 안쪽이 높고 바깥쪽이 낮은 곳이다. 지면은 다소 들어가거나 튀어나온 곳이다.


성의 잔존 높이는 외벽이 1.8m, 내벽이 1.5m 내외이고 너비는 하단부가 약 1.2m, 상단부가 1.0m 정도이며 길이는 75m 정도이다.

재현 구간(아래 사진)을 보면 성 위를 보면 안쪽에 돌을 한 줄로 20~30㎝ 정도 높게 쌓아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재현 구간 동쪽으로 복원하지 않은 구간(위 사진)이 남아 있는데 회곽도의 모습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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